내 이름은 분홍

분홍은 죄가 없다.

분홍색이 무슨 죄라고

친한언니가 해준 얘기. 남자친구랑 걷고 있는데 어떤 여성이 머리띠부터 신발까지 분홍색으로 도배를 하고서 지나갔다고 한다. 저 사람 진짜 분홍색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하니 남자친구가 언니를 빤히 바라봤댄다.

‘너도 분홍분홍 하잖아.'

이 말이 언니에게는 크게 충격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집에 가자마자 옷이랑 물건을 살펴 봤을까. 하지만 결과는… 분홍 필통, 분홍 가방, 분홍 코트 등등 분홍색들이 그야말로 우르르 쏟아졌고, 그제야 자신이 보통이 넘는 핑크겅듀임을 알게 되었다고 내게 고백했다. 그리고 언니의 얘기를 듣는 내내 뜨끔했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분홍색을 ‘공주님 같은' 유치한 색으로 규정해왔기 때문이었다.

삥끄색 원삐스 이블꺼야!!

삥끄색 원삐스 이블꺼야!!

어떤 것을 사려고 할 때 분홍과 파랑이 있다면 나는 주로 파란색 물건을 선택했다. '분홍색은 좀 그렇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사회적으로 분홍색을 바라보는 시선에 많은 편견이 내제되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홍색은 단순한 하나의 색깔이 아니라, 특정한 반응을 유발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분홍색에 새겨진 '주홍글씨'

분홍색에게 쏟아지는 편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단은 여성의 색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남성들은 함부로 분홍색이 들어간 옷을 입지 못한다. 용기내어 입었다간 ‘니가 여자냐?’란 말 부터 심지어는 ‘게이냐?’는 폭력적인 비아냥을 듣기 마련이다. 무채색 의상을 즐겨 입는 여성이 어쩌다 분홍색 소품을 가지고 나오면 또 어떠한가. ‘너도 여자가 맞구나’ 라는 무식한 말이 당장 날아온다.

1111

사대천왕도 극복하지 못한 분홍색에 대한 편견 ⓒ무한도전

두번째로, 분홍색은 ‘애 같다’는 편견.

쉽게 말해 분홍색이 유치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분홍색 옷을 입는 것을 주저한다. 실제로 내 옷장에는 분홍색 옷이 몇 벌 있다. 하지만 룸메이트가 내 ‘분홍색 옷’을 발견할 때면 나는 먼저 ‘내가 입기엔 좀 그렇지?’라고 선수를 치고 만다. 혹시나 상대방이 뭐라 한 마디 떼기도 전에, 잽싸게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모여 나온 궁극의 편견이 바로 분홍색은 공주님 색이라는, 실로 웃기는 관점 되겠다. 물론 여기서 ‘공주님’은 우리가 아는 고귀하고 우아한 이미지가 아니다. ‘겅듀’라는 말에 담긴 비아냥에서 짐작할 수 있듯, 상대를 폄하하고 조롱하는 의미다.

공주님_옷장

그런데 솔직히 공주가 분홍색만 입겠냐. 64색 드레스를 종류별로 다 가지고 있겠지.

 

당신이 몰랐던 분홍

누군가는 말한다. 어쨌든 옛날부터 여자들이 써왔으니 그런 것 아니겠냐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사실 분홍색은 남성만이 쓸 수 있는 색이었다는 사실!

붉은 색은 태양을 상징하는 의미로 왕이나 교황 같은 권위자들만 쓸 수 있는 색이었고, 분홍색은 ‘작은 빨강’이라는 개념으로 남성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색이었다. 그 예로, 중세시대 그려진 아기 예수의 그림의 경우, 예수님은 대체로 분홍색 옷을 입고 있다. 이처럼 분홍색은 곧 왕이 될 존재, 미래의 왕을 상징하는 매우 남성적인 색이었다.

정말이다

정말이다

분홍색의 날도 있다. 사건은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고등학교에서 어느 학생이 분홍색 셔츠를 입고 오면서 시작된다. 사람 사는 곳은 정말 어디서나 같은건지, 분홍색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 그 학생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 행동을 반대하는 의미로 모든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분홍색 셔츠를 입었고, 이제는 PINK Shirt Day라는 이름 아래에서 학우들간의 괴롭힘을 금지하는 전국적인 켐페인으로 자리 잡았다.

알면 알 수록 매력적인 핑크로다

알면 알 수록 매력적인 핑크로다

그밖에도 분홍색의 매력은 많고도 많다. 서양에서 분홍색은 사랑, 활력, 행복을 의미하는 색깔이며, 인도에서 분홍색은 해탈의 경지를 상징하는 색이다. 뿐만 아니라 에너지를 서서히 약화시켜 진정작용을 유도하고, 심장 근육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심리학적인 효과까지, 분홍색은 단 한번도 긍정적 이미지를 놓친 적이 없었다.

 

죄가 있다면 예쁜 것이 죄

사람들은 남색이나 카키색 옷을 즐겨 입는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유독 분홍색 옷을 즐겨 입는 사람에게는 몇 마디씩 덧붙이곤 한다. 이건 불공평하다. 분홍색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색(色)종차별이라고 보이콧을 벌인대도 할 말이 없을 수준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분홍색을 입자. 무지한 자들이 분홍색의 진정한 매력을 모르고 놀려도 좋다. 공주님 색이고 아이 같은 색이면 어떤가? 세상에 멋진 공주님들이 얼마나 많이 있으며, 또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밝음과 순수함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용감하고, 우아하며,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스칸디나비아 공주님 ⓒ영화 '킹스맨'

용감하고, 우아하며,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스칸디나비아 공주님 ⓒ영화 '킹스맨'

너무 말이 길었다. 하고 싶은 말을 줄여본다.
분홍색 좀 좋아하면 어떤가. 다른 이유는 없다. 예쁘기 때문이다. 어쩜 이름도 분홍이다.

 

[기사 참고]
박미성. (2008). 분홍색의 상징적 이미지에 관한 의미. 한국색채학회논문집, 22(4), 11-19.

Tweet about this on TwitterShare on FacebookShare on Google+Pin on PinterestShare on TumblrEmail this to someone
The following two tabs change content below.
최희선

최희선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기숙사 죽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