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인권이 약장수 되는 이야기?
‘약장수’라는 영화를, 대다수의 영화 소개 기사들은, 딱 이렇게만 소개했다. 코믹한 역할로 자주 나와 약방의 감초 노릇을 톡톡히 하던 배우 김인권과, 걸출한 표현력과 재치로 능숙한 코미디를 선보이는 배우 박철민이 각각 애처로운 가장과 악덕 약장수로 출연해 진지하고 무게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무대는 각종 상품을 중장년 여성들에게 반 강제로 팔아치운다는 “떴다방”이 될 것이다, 영화는 진정한 효(孝)가 무엇인지, 아버지의 고단한 삶과 어머니의 외로운 마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까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냥 그런 영화겠거니 하고 별 기대 없이 표를 샀다. 왜 그런 경우 있지 않은가. 별 관심이나 기대는 없는데 그냥 왠지 한 번 보고 싶어서 계획 없이 영화를 고르는 경우 말이다. 어쩌다 보니 아는 사람들과 함께 ‘어벤저스2: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두 번이나 봐 버린 뒤였기 때문에, 정말 무슨 영화든 좋으니까 그렇게까지 헐리우드스럽게 시간을 푹푹 죽여 없애는 오락 영화만 아니면 된다 싶었다. 그래서 그냥 골랐다. 그날 그 극장의 절대 다수는 내가 들어가던 상영관 대신 ‘어벤저스’를 틀어 주는 곳을 찾아 들어가고 있었다.
두 시간 좀 안 되는 시간이 지나고 영화가 끝난 뒤 상영관을 나오면서 처음 했던 생각은, 내가 대강 읽고 온 그 영화 소개 기사들이 하나같이 정말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전혀 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게 김인권과 박철민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렇다고 ‘일범’이나 ‘철중’의 이야기만도 아니고, 사실은 나와 우리, 당신의 이야기라는 바로 그 포인트 말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 포인트에 대한 생각을 제작자에게든 감독에게든 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약장수’의 전체 제작을 맡아 진행한 26컴퍼니의 박재현 대표를 컨택했다. 뜻밖에도 그는 내일이라도 괜찮으면 방문하라며 흔쾌히 취재 제의를 수락하고는, 논현동의 한 카페 주소를 일러 주었다.
인터뷰이 소개
박재현. 1982년생. ‘전두환 배우’로 유명한 박용식(1946~2013)의 차남. 중앙대학교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현재는 논현동 소재의 카페26과 영화제작사 26컴퍼니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하의 인용문 발언은 모두 박재현 대표의 말을 따온 것이다.
노골적인 직장, “홍보관”
사실 ‘약장수’의 초반 줄거리는 그다지 시선을 사로잡지 않는다. 주인공은 식솔이 딸린 신용불량자고, 무슨 일을 해도 잘 안 풀리고, 그래서 궁지에 몰리다 못해 어딘가 수상한 곳에 취직한다. 굉장히 알기 쉬운 상황 설정이, 조금 답답할 정도로 느린 템포와 다소 촌스러운 서사적 장치를 통해, 일단 소개된다.
“사실 훨씬 더 나쁘게 평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었어요. 댓글을 봐도 그렇고. ‘이건 너무 뻔하지 않냐’ 같은 얘기부터… 요즘 영화들의 호흡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는 지루했을 거예요. 생각 없이 멍하게 보고 있다가 ‘아 이 영화 뭔 소리 하는 거야, 지루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데, 거기까지가 조금 뻔하게 느껴져도 상관없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주인공 ‘일범’이 ‘장 실장’으로 취직하는 그 수상한 곳이, 대다수 관객에게는 완전히 낯설고 엄청나게 생소한 장소인 것이다. 첫 출근을 한 일범은, ‘아줌마스러운’ 인테리어와 잔뜩 들뜬 분위기로 꽉 차 있는 100여 평의 홀에서, 얼 빠진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님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는 나 같은 관객들 역시, ‘도대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뭔가’ 싶어서, 일범처럼 얼 빠진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떴다방”이라고 부르는 그 괴기한(?) 공간을, 영화 속 인물들은 시종일관 ‘홍보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뭘 홍보하길래 이런 이상한 무대를 ‘홍보관’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홍보랑 노래 불러 주기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아마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일범’은 홍보관 일을 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다. 되도록 많은 수의 ‘엄마’들에게 (조금 좋고 많이 비싼) 물건을 팔아치우기 위해서는, 그렇게 촌스럽게라도 놀아드리며 정을 붙이는 게 가장 효율적인 최선의 홍보 방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떴다방’의 사정을 자세히 알게 된 박재현 대표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머니들 할머니들은 감성적으로 그곳 사람들에게 끌리는 거잖아요. 감성적으로 끌렸을 때는 절제가 안 되고요.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은 ‘내가 이만큼 버니까 이만큼 써도 된다’ 하고 타산을 맞추는데 어머니들은 절제가 안 돼서 수십만 원짜리를 사고 그 돈을 못 내신단 말이에요. 그러면 미수금이 몇천만원씩 쌓이고… 그러면 이게 범죄가 아니냐, 언론에서는 그렇게 다루는 거지요.”
그런데, 감성적으로 끌려서 불필요한 물건을 비싸게 사게 되는 경우가 꼭 약장사에만 한정되는가? 항상 방실방실 웃는 모델들을 데리고 주문전화를 재촉하는 ‘홈쇼핑’, 각종 영화와 TV 프로그램에서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은밀하게 꾸준히 자기를 노출하는 간접광고 등은, 과연 ‘로하스 홀쇼핑’의 사업 모델과 전혀 무관한가?
어쩌면, 당신이 지금 아무데나 살펴보아도 언제든 볼 수 있는 그 많은 ‘마케팅’과 ‘홍보’라는 것은, 이런저런 포장과 수식어와 세련됨을 다 벗겨내고 보면, ‘약장수’에 나오는 약 팔기 장사와 딱히 다를 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뭘 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놀아 주고 → 물건을 떠넘기고 → 돈을 받아낸다’만 성립하면 그만인 것이다. 영화 ‘약장수’는 그 과정을 시종일관 굉장히 원초적이고 거짓말 같은 (하지만 어딘가에서는 분명 오늘도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로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진실임을 설득해 낸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 있다.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단골 “엄마”에게 쓸개 빠진 놈처럼 ‘엄마 엄마’ 애교를 부리던 철중이, 밀린 물건값을 받아내러 가정 방문을 했을 때는, (박철민의 목소리를 상상해 보자) “이런 씨발 노친네, 내 돈 달라고, 내 돈. 반지 빼!” 마구 윽박지르면서, 기어코 그 단골 할머니의 칠순 기념 금반지를 물건값 대신으로 받아낸다. 철중과 동행한 일범이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철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금반지를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물어본다. “너 내가 개새끼라고 생각하지?”
홍보관에서 ‘효’를 파는 일을 하고 있는 이상, 철중이든 ‘장 실장’이든 더 특별한 개새끼인 것은 아니다. 그냥 할머니들에게 물건을 팔고 돈을 받는 홍보관 장사가 원래 그토록 노골적으로 원초적인 ‘장사’일 따름이고, 그걸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처신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이건 저희끼리 감독님이랑 했던 얘긴데, 만약 <약장수2>가 나온다면, 거기서 ‘일범’은 ‘철중’ 자리에 가 있을 거라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 했었어요. ‘일범’도 힘든 일을 겪고 적응을 하다 보면 점장까지도 가게 되지 않을까요? 일을 시작해서 적응하고 승진해 올라가는 과정이라는 건 약장수 일뿐만 아니라도 모든 직업에 다 있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약장수’의 갈등과 비극에는 드라마틱한 급반전도 해피 엔딩도 없다. ‘일범’ 같은 우리가 벌어먹고 살 방법이란, 일에 적응하고, “엄마”와 “노친네”를 동시에 상대해 가며, 그저 가장 철저한 약장사가 된다는 옵션뿐인 것이다.
고달픈 사회초년생, ‘일범’
일범의 모습과 20대의 교집합이 없는 것은 아닌데, 바로 ‘사회초년생’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당신이 지금 당장 취직할 수 있는 곳이 없다면, 그래서 장기적인 대책 없이 일용직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한다면, 당신도 홍보관 일을 결심하기 직전의 일범과 마찬가지다. 당신이 몇 달 간 ‘방세’를 못 내는 삶이 뭔지 안다면, 일범의 아내가 “당신은 왜 당신만 생각해, 우리가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왜 남들을 신경 써”라고 읍소하는 장면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사패와 상품들이 허술하게 전시된 작은 방에 들어가 “기본급 200에 판매 수당 뽀나스, 여기서 열심히만 하면 월 사백도 벌어갈 수 있어”라고 호언장담하는 ‘사장님’ 앞에서 면접을 본 적이 있다면, 로하스홀쇼핑 출입구를 빠져나오는 일범과 함께 “월 400 같은 소리 하네, 사기꾼 새끼들” 욕을 같이 해 주고 싶을 것이다. 군 생활 때 상병 5호봉 선임의 지시에 “그러지 말고 일단 좀 지켜보면 안 됩니까?”라고 물었다가 내리갈굼 당한 적이 있다면, 철중이 ‘실장’과 ‘팀장’들에게 미수금 회수를 지시하는 어떤 장면의 위태로움을 잘 느낄 수 있다.
딸의 병이 다시 악화되어 급전이 필요해진 일범은 점장(철중)을 찾아가 월급을 가불해 달라고 한다. 그 월급은 일범이 철중과의 내기에 졌다는 이유로 못 받게 된 돈이다. 일찍이 일범은 그의 판매를 많이 도와준 ‘옥님 엄마(이주실)’가 미수금을 알아서 가져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다가 철중과 내기를 해야 했었다. 그리고 졌던 것이다.
일범이 제 발로 찾아와 싹싹 빌기를 기다렸다는 듯, ‘회장님 책상’ 앞에 앉아 돈을 세던 철중은 무릎을 꿇은 일범을 가까이 부른 뒤, 돈다발로 뺨을 때린다. 이 장면만으로는 사회초년생 일범이 당하는 “갑질”의 비참함을 표현하기에 부족했던지, 감독은 철중에게 무슨 ‘사회 진출 선배 멘토링’ 같은 대사를 시킨다. “내가 그랬지, 사람이 사람 속이는 거 아니고 돈이 사람을 속이는 거라고. 돈이란 게 그런 거야.”
이와 같이, ‘약장수’의 장면들은, 적어도 요즘 영화치고는 대단히 관념적이고 전형적이며 비현실적이다. “부모님에 대해서든 자기 자신이나 ‘홍보관 같은’ 세상에 대해서든 한 번 더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리고 ‘떴다방’이라는 소재와 그 속을 살아가는 사회초년생의 서러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약장수’는 할 수 있는 모든 영화적 조치를 다 취하고 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포인트는 거기에 있지 않다. 이토록 단선적으로 추하고 보기 힘들 만큼 냉정한 이 영화 속 광경들이,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실제와 가깝다는 데 핵심이 있다. 이 영화가 숱한 관계자들을 설득해내 기어코 ‘어벤저스2’와 나란히 상영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알고 보니 거기에 있었다.
“이거는 실제와 거의 같아요”
형식상 준비한 인터뷰 질문이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홍보관은 실제 약장수들의 떴다방과 비슷한가요?” 그 질문을 들은 박재현 대표는, 한번 영화 내용을 전체적으로 돌이켜보는 듯하더니, 전혀 형식적이지 않게 대답했다.
“거의… 같아요. 영화적인 포인트들이 있기는 있어요. 예를 들어서 철중이 영화 막판에 물건을 부수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건 일반적이지 않은 영화적 허구가 맞아요. 그런데 나머지 대부분은 거의 같다고 보셔도 돼요. ‘홍보관’ 안에서 물건을 파는 등의 장면들은 거의 흡사해요.” 곧바로 이어진 그의 설명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이 픽션이, 현실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만들었다는 것.
이를테면, 대사가 있는 일부 배우들을 제외하면, 대다수 ‘엄마들’은 진짜다. “영화에 출연한 엑스트라 어머니들이 사실은 홍보관에 다니셨던 분들이에요. 한 100분 이상이 촬영장에 오셨는데, 그분들이 보조출연자가 아니라 실제 홍보관에 가 보신 적이 있는 아주머니들을 모은 거예요. 그분들 중 대장 아주머니가 있어서, 그분께 ‘논다고 생각하시고 영화 출연해 주십사’ 부탁드렸는데 너무 흔쾌히 수락하시고 도시락도 싸들고 오셔서 출연해 주신 거예요. 거기서 도시락 먹는 장면들도 다 실제거든요.”
심지어 “그 ‘홍보관’ 세트 자체도 실제로 홍보관을 했던 장소”라고 한다.
“워낙 저예산이다 보니까 세트를 지을 수도 없었고. 실제로 ‘홀’만 해도 100평 정도 되거든요. 서울 시내에서는 그런 공간을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던 중 인천에서 “몇 개월 장사를 하고 이사를 가려고 철수를 끝마친” 진짜 약장수들이 있었더란다. 그들이 짐 꾸리고 있는데 제작사가 찾아가서 “우리가 좀만 쓰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그 공간을 그대로 썼다는 것이다.
“거기서 장사하시던 실제 약장수 분들도 (‘약장수’란 영화의 촬영을) 잘 하고 있나 어떤가 하고 그 장소를 왔다 갔다 하시더라고요.”
약장사란 거짓 재롱을 떨어 주는 가짜 자식이 가짜 엄마를 모시고 놀아드린 뒤 전혀 진실하지 않은 상품 매매를 하는 사업이다. 그런데 영화 ‘약장수’는, 거짓으로 가득한 그 장사를, 실제적인 공간과 사람들을 통해 사실주의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극명한 대비의 공존이, 현실과 픽션 사이의 괴리를 무너뜨려, 관객의 감정 이입을 이끌어내고 있다. ‘약장수’는 시종일관 말하고 있다. 여기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들을 연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세상을 잘 봐 두세요. 이게 영화라서 이럴 것 같죠? 실제로도 이렇습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약장수’를 단순히 픽션이나 상품으로서의 영화 이상으로 생각하고 몰입하고 동참해 주었던 것은. “(실제 홍보관을 다니던 어머니들이) 오히려 보조출연 연기자들보다 더 즐기면서 하루 몇 시간씩의 촬영을 같이하셨어요. 배우 분들이 웃긴 거 하면 정말 자지러지시고, 일범이 무릎 꿇고 울 때는 같이 울기도 하시고. 이게 영환지도 알면서도.”
‘영화인 줄 알면서도’ 동참한 것은 이 업계 전문가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약장수’ 홍보 대행을 해 주신 회사의 실장님께서 얼마 전 술자리에서 말씀해 주신 건데, 자기가 10여 년간 수많은 영화의 홍보 마케팅을 해 봤지만 ‘약장수’만큼은 회사에서 정한 방침 없이, 그분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의 인맥과 역량을 동원해 주셨다는 거예요. 이렇게 애착이 갔던 영화가 없었다고. 이렇게 다 같이 분위기 좋게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한 경우는 못 봤다고, 자기 영화 홍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언론 기자들 역시, 제작자가 스스로 “소재 자체도 그렇고 영화 전체의 분위기도 그렇고, 요즘 영화스럽지는 않다”고 시인한 영화를 굳이 “전반적으로 ‘아 이런 영화가 지금 우리나라에 한 번쯤 나와야 한다’라고들 평가”한 이유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저희가 언론 시사회를 할 때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악플러들은 ‘이 기자 돈 받고 글 쓰냐? 얼마 받았냐?’ 하는데, 그 기사들은 정말로 기자님들이 그렇게 느끼셔서 써 주신 거예요. ‘약장수’가 조금이라도 더 잘 되길 바라시는 것 같아요. 흥행은 잘 안 됐지만. 분명 40대든 20대든 의식이 있는 분들은 되게 좋아들 하셨다는 거예요. 굉장히 많이 공감해 주셨고, 가치 있다고 여겨 주시고. 저는, ‘약장수’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남는 영화’가 됐다고 생각해요. 창립 작품이기도 하지만, 조치언 감독님과 김인권, 박철민 배우들에게도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좋은 영화의 필모그래피가 남았다고 생각하고요.”
그가 비록 흥행은 못 했을지언정 부끄럽지는 않다고 말할 때, 드러내놓고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일범에게서도 철중에게서도, 가짜 아들 도와 주려고 산 물건이 친아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애써 숨기는 옥님 엄마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떳떳함이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일범과 다를 바 없이 시급을 벌려고 일종의 약장사를 하고 있기에, 그 당당함이 왜 내게는 허락될 수 없는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아쉬워하며 살아간다.
거짓말 같겠지만, 사실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막 천만 관객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어떤 영화가 있다.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전문가들이 아주 세련되게 만든 이 영화는, 두 시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국적과 연령과 성별을 막론하고 관객을 웃기고 울리고 흥분시키며 마지막 한 장면까지 끊임없이 재미를 준다.
사람들은 “아 재미있다, 잘 봤다” 보람찬 감탄사를 내뱉으며 먹다 만 팝콘을 객석 아래에 버려 두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상영관을 나간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활약은 내 활약이 아니고, 그들의 갈등과 방황은 나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나는 그냥 티켓 값, 팝콘 값, 관련 특별 상품 값만 잘 치러 주고 나가면 그만인 일개 손님이고 고객이다. 그 거대한 오락은, 다만 그 결제와 계산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상영관을 잠식하고 있다.
이 광경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 암암리에 전국적으로 몇천 군데가 있다”는 떴다방의 풍경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홍보관의 ‘아들’들은 매일같이 찾아오는 ‘엄마’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공짜 선물을 잔뜩 안겨 주며 “하루 네 시간씩 지 엄마한테 노래 불러 주고 재롱 떨어”주면서 그들에게 ‘효’와 재미를 준다. 하지만 그 ‘아들’들은 ‘엄마’들의 아들이 아니고, 사실 ‘엄마’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으며, 다만 ‘오메가-3가 들어 있는 샴푸’ 따위를 충동구매한 뒤 반품하지 않을 일개 손님이자 고객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어떤 사족도 세련됨도 없이 처절하게 보여 주니, 이것은 차라리 ‘모시는 장사’의 민낯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약장수’는 우리 20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효와 편리와 관심과 재미를 돈으로 사고파는, 너무도 거짓말 같은 세상에서 일개 ‘장 실장’의 역할로, 약장수로 살아간다. ‘약장수’는 그 무겁디무거운 공기 아래에서도 기어코 일어나서 우리의 불편한 현실의 민낯이 이렇다고 굳이 말하는 영화였다.
“요즘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땐 오락성을 많이 추구하잖아요. 세상이 경기도 안 좋고 뒤숭숭하니까 그런 것 같은데, 그래서 역으로 좀더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무거운 주제를 감독님이 던져 주신 거죠. 김인권 배우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요즘 사람들이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힘드니까 극장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영화만 두 시간 동안 보는데, 이 영화는 그 두 시간 동안 좀더 생각을 할 수 있는 영화라고.”
그리고, 그 영화는, 이름에 하나도 걸맞지 않게, 눈 딱 감고 관객들에게 재롱 떠는 짓을 하지 못했다. 그냥 거짓말 같은 현실을 104분 동안 꾸준히 쓸쓸하고 서글픈 분위기로 설명 또는 고발할 뿐이었다. 그리고 약장수들의 수법은 지금도 거짓말처럼 먹혀들고 있기에, 우리 20대의 절대 다수는 그냥 미국 히어로들의 ‘떴다방’에 가서 웃고 놀다가 오기를 선택했다. 그냥 그뿐이고 말았다.
김어진의 이름으로 나온 최근 기사 (모두 보기)
- 애국청년 변희재 :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맞다 - 2018년 2월 26일
- 대만/일본/홍콩 계신 여러분, 그쪽 상황이 정말 이런가요? - 2016년 12월 30일
- “사회가 고령화되는 게 민주주의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 2016년 1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