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 기사는 전국의 여러 대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총학생회 관련 제반 상황들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투표율이 낮다니 실망스럽습니다
기말고사다. 리포트 양이 장난이 아니길래 그걸로 대체될 줄 알고 대충 공부했던 수업은, 내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책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 원래 시험 기간에 잠깐 딴짓하는 건 다 공부에 도움 되는 거야. 스트레스 받으면 공부에 안 좋아.”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래, 와 비슷한 소리를 하며 페이스북을 켰다.
대나무숲에는 역시 동지들이 가득했다. 시험을 망쳤다는 사람, 리포트 제출기간을 잘못 알았다는 사람, 아예 포기했다는 사람. 쯧쯧 그러니까 미리미리 준비했어야지. 내 목소리에 양심이 찔리지만 무시하기로 한다. 그리고 스크롤을 계속해 내리다 마주한 글.
이렇게 투표율이 낮다니 실망스럽습니다. 결국 당신들 덕분에 투표장에 간 학생들은 학생회가 없는 1년을 보내게 됐습니다. 어떻게 책임지실겁니까. 투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 아닌가요? 당신들은 민주주의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격도 없습니다. 20대 투표율이 낮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나 봅니다. 투표 안 한 탓, 결국 당신들에게 다시 돌아갈 겁니다.
갑자기 키배 의욕이 솟구쳤다. 비단 시험 스트레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아니, 투표를 안 하게 만든 게 누군데. 학생들이 투표장을 찾지 않게 만든 누군가가, 분명히 있지 않느냔 말이다. 나는 댓글을 달면서 지난 번 총학생회의 막장스러움을 떠올렸다.
아니 투표를 안 하게 만든 게 누군데
올해 총학생회는 확실히 이상했다. 지난 번 선거부터가 그랬다. 운동권 총학생회를 ‘무능력’한 ‘좌빨’이라고 비난했고, 자신들은 그와는 정반대로 무언가 세련되게 잘 해낼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비권이었다. 학생들은 그들을 신임했다. 공약은 사실 특별할 게 없었다. 대단한 걸 준비한 듯 했지만 대단하게 평범했다.
그렇게 그들은 당선됐다. 이번 총학생회는 이전의 운동권들과는 다르게 학생회를 특정한 시각에 치우치지 않게 잘 운영해주리라 믿었던 모양이다. 그게 까봐야 꽝인 복권인 걸, 그때는 몰랐다. 그들이 반짝거렸던 순간은 오직 눈에 보이는 자리에서만이었다. 새터 무대에서는 있어 보이는 가수들을 섭외하려 애썼고, 중간기말 시험마다 비싸 보이는 간식을 골라서 구해 왔고, 축제 때는 호불호가 갈리는 미묘한 인기 아이돌 그룹이 등장했다.
그때는 그랬다. 와, 이번 총학은 쫌 좋네. 몇 년 전 꿘 총학은 이상한 인디밴드만 잔뜩 데려왔던데. 반짝이는 조명이 치워지고 남은 것은 쓰레기임을 그때는 잘 몰랐다. 학교 축제 무대 위에 터지는 불꽃놀이를 보며 어느 개그맨이 그랬다지? “지금 여러분의 등록금이 터지고 있습니다!”
화려한 축제 뒤에는 비리가 가득했고, 총학생회의 임기가 끝나갈 즈음이 되자, 폭로가 이어졌다. 레크리에이션 강사에게 MC로 써주는 것을 댓가로 뒷돈을 요구했다는 이야기, 행사 대행업체에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이야기, 축제 물품을 100만원어치 사고, 150만원정의 영수증을 발급해 50만원을 업체로부터 받아 챙겼다는 이야기…
총학은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학생들은 그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비싼 등록금과 귀한 대학생활을 화려한 축제 한 번으로 엿 바꿔 먹어도 되는 건 아니었기에.
부패는 축제 이후에도 있었다. 총학생회의 간부 몇몇은, 총학생회 임원에게 주어지는 공로장학금을 다른 이의 이름으로 받은 뒤 빼돌렸다는 정황이 포착돼서 경찰 조사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외유성 해외여행을 갔다는 의혹마저 받았다. 해명은 있었지만, 시원찮았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이곳저곳에 건의함을 만들었지만, 그들은 들을 만한 목소리에만 답했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할 줄은 몰랐어
그리고 정작 총학생회가 필요했을 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만 생각’하는 총학생회가 되겠다던 그들은 그저 ‘학생들 생각만’ 하고 있었지 행동은 별로 보여주지 못했다. 운동권을 비판하던 그들을 뽑아줄 때 우리는 정말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이, 아무런 운동도 안 하겠다는 뜻일 거라고는.
총학생회의 사실상 첫 일정인 등록금심의위원회. 그들을 뽑아준, 그들이 대표하는 학생들이야 당연히 등록금 인하를 바라고 있었다. 매 학기 400만원에 가까운 등록금이 비싼 건 누구나 알았고, 학생회 역시 선거 당시 등록금을 5% 인하할 것이라고 공약을 걸긴 했었으니까. 인하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인상 저지했습니다!’ 같은 최소한의 자세만 잡아라, 싶었다.
그런데 이 총학이란 사람들이 등심위에 가서는, 학교가 내세우는 논리에 고개만 끄덕이다 왔다는 것이다. “아니, 학교 얘기 들어 보니까 쓸 수 있는 돈이 별로 없더라고요.” 뭐라고? 기가 막혔다.
중동기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한반도를 강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메르스 의심환자가 학교에 나왔고, 수업 중 고열로 병원에 실려가고, 학생들은 공포에 빠져 있는데, 학교는 해당 환자가 1차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았다는 이유로 다시 등교를 시켰다. 하지만 나는 학교보다 총학생회의 대처가 더 갑갑했다. 그저 학교 측이 내놓는 공지사항을 열심히 퍼다나를 뿐, 우리가 당장 대형 강의실에 바글바글 모여 앉아 느껴야 했던 불안감은 1도 수습하려 들지 않았다.
그쯤 되니까 이 총학은 학생의 대표자가 아니라 학교의 대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의 구조조정 계획안이 발표됐을 때도, 이 친구들은 뜬금없이 교수 사회를 탓하는 입장을 내놓았다가 욕만 얻어먹었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대책위원회를 꾸리자는 말이 나왔을 때 총학생회는 참여를 거부했다. 총학이 빠진 대책위원회는 ‘학생들의 대표’가 아니라는 이유로 학교에게 무시당했다.
그렇다. 학생회는 대의기구로서는 뭐 하나 한 게 없었던 것이다. 꿘이냐 비꿘이냐, 찬성표를 줬느냐 안 줬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친구들이 학내 어둠의 대나무숲에서 그런 총학에게 ‘뻐꾸기’라는 별명을 붙여 준 지는 오래되었다. 뻐꾸기 오늘도 열심히 우네요 ㅋㅋ 듣거나 말거나 뻐꾹 뻐꾹.
그런데 어떻게 선거철엔 이렇게 설치지?
그리고 11월, 드디어 선거가 시작됐다. 이 지긋지긋한 일못들을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되는구나. 기쁜 마음에 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기호 1번. 운동권이었다. 공약도 괜찮았고, 한 해 동안 학생들의 말을 듣지 않던 학교와 제대로 싸우겠다고 이야기했다. 기호 2번은, 세상에 글쎄. 지금 총학생회에서 집행부장을 했다던 사람이 정후보다.
입에 쌍시옷이 잠깐 맴돌다 사라졌다. 그래, 혹시 뭐 자기가 직접 하면 잘 할지도 모르지.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요’ 했던 사람일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그들의 공약은 지금 학생회의 공약의 복붙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선거관리위원회가 돌연 통지를 해 왔다. 여론이 기울어 있던 1번 선본의 후보 자격을 박탈한다는 내용이었다. 구실은 다양했다. 상대 후보 비방, 사전 선거운동, 향응 제공 등의 경고 누적.
그땐 평화롭던 학교 대나무숲 페이지가 발칵 뒤집혔다. 중선관위가 1번 선본에는 엄격하게, 2번에는 관대하게 세칙을 적용했다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중선관위가 편파 논란에 휩싸인 게 한두 해의 문제는 아니었는데, 이번 총학생회가 정말 불신감을 사긴 크게 샀었구나, 싶었다.
지금껏 중선관위가 학교 마음에 드는 쪽을 편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작년만 하더라도 후보자 공청회에서 특정 후보에게 불리한 질문을 주지 않는다든가, 특정 선본의 ‘표밭’으로 알려진 구역의 투표소를 규정 시간보다 일찍 철수시킨다든가 했었다. 그런데 그게 양반 축에 드는 짓일 줄이야.
결국 선거는 단선이 되었다. 중선관위와 선본과 총학생회가 짜고 치는 고스톱. 선거가 이렇게 답정너일 줄이야. 그리고 중선관위는 선거 무산을 막기 위해, 투표율을 높인다는 핑계로 투표하러 오는 학생들에게 태블릿 PC를 경품으로 주겠다고 홍보하고 있었다. 이번 선거는 그렇게 무산된 것인데, 누군가는 그 비난을 투표하지 않은 이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나는 시험 공부를 하다 말고 스트레스를 풀 생각에 페이스북을 켰다가, 스트레스 받는 현실을 다시 기억해야 했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군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과연 투표장을 찾는 게 맞는 걸까. 그 얘기를 댓글로 적어 보고 싶었다. 이런 식의 총학생회는 대체 우리에게 왜 필요한 걸까. 학생의 대표자로서? 아무것도 못 한 채로 그냥 있었는데? 대의기구로서? 어떤 의견을 대의해 줬는데? 이렇게 무능과 부패로만 일관할 바에는, 차라리 무(無)하고 부(不)한 총학생회가 낫다는 게 학생들의 생각 아니었을까? 적어도 나는 그랬으니까.
학생들이 믿고 맡기지는 못해도, 적어도 밑지고 맡기는 총학생회는 아니어야 할 텐데. 덮어놓고 뽑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할 텐데. 총학생회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뽑아주는 게 아닌데. 화려한 축제나 유혹적인 복지에 가려져 있는 다른 이유와 역할도 있는데. 지금은 그 ‘다른 이유’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어서 우리가 누굴 뽑아주기가 싫을 뿐인 것을, 다들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잠시 살펴 본 학교 대나무숲은 내게 그나마 위안을 주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어.
그래서 굳이 댓글 하나를 더 달지 않기로 하고 페이스북을 껐다. 그냥 한번 생각해 봤다. 내년 3월, 각 학교에서 열릴 총학생회 선거, 우리 학교에서도 있겠지. 그때 선거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똑같은 결과를 원하지는 않는다. 나는 유능하고 투지 있는 총학생회를 만나고 싶다. 그래서 고민해 본다. 학생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학교가 학생들의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무시하고 있는 지금, 학생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더 나은 학생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가 원하는 학생회는, 복지 기구와 자치 기구 사이의 어디쯤에서 합의점 또는 교차점을 찾게 될까. 지금은 질문과 생각이 필요한 시기이다. 시험은 가만히 둬도 이번 주면 끝날 테고, 새 학기도 계절 따라 그냥저냥 찾아오겠지만, 다음 총학은 그렇게 마냥 내버려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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