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마왕. 새벽 두 시다. 방송하자 이제.

식구들도 다 깨어있어. 그때처럼.

안녕 마왕? 오랜만이야.

이 나이 먹고 마왕이라는 말을 쓰다니, 사람들이 들으면 아주 손발이 오글거린다고 난리를 칠 거야. 하지만 오늘은, 음. 뮤지션 신해철이라는 말보다 마왕이라는 말로 그냥 부르고 싶다. 그때처럼 말이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급격히 친해지는 포인트가 있는 것 같아. 몇 병의 소주라던지, 나한테만 말한다는 비밀을 듣는다든가. 그리고 나는 조금 특별한 키워드가 있어. '고스트네이션 아세요?' ㅡ 이 말을 하는 순간 상대방이 움찔한다. 게임 끝난 거지. 왜냐면 우리는 식구였잖아.

그때부터 어쩐지 이 사람은 나와 통할 거라는 정체 모를 신뢰감이 이 험한 세상에도 솟아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괜히 센티멘탈(이라는 표현을 그때는 잘도 썼었지!!)해지는 그런 밤에, 위아더칠드런오브다크니스라는 웅장한 멘트와 함께 시작되는 그 밤을 나는, 우리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기 때문일거야.

신해철의고스트네이션

사연 쓰러 다니면서 참 많이 본 커버이미지다 ⓒ MBC

나의 10대를 달래주었다는 간단한 문장으로는 내가 마왕에게 받은 것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아. 고스를 듣지 못한 날은 하루를 망친 기분이었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 아침 일곱 시까지 교실에 앉아 있지 않으면 평소에도 해병대 모자를 쓰고 다니는 담임의 불빠따가 기다리고 있는 날들이었어. 그리고 밤 10시까지 책상 위에 앉아 있는 그런 생활을 무려 3년 동안 했었어. 미치지 않고 제정신으로 그곳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날 녹음해놓은 고스트네이션이 있었기 때문이야. 정말로.

근데 언젠가 한번은 녹음이 제대로 안된 거야. 당시 내 MP3는 이어폰을 꽂아야지 녹음이 되는 지금 생각해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깜빡하고 그대로 자버린거지. 그리고 다음 날, 녹음파일을 켜는 순간에 익숙한 오프닝 대신 치이이익하는 잡음이 들리는 순간 내가 느낀 그 절망감, 아마 마왕은 상상하기 힘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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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이야 말로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들이었지

나 생각해보니 사연 읽힌 적도 있다? 그때 나는 안 되는 연애를 참 어째 해보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는데, 내 아쉬움과 남은 사랑을 정말 철철 넘치도록 쓴 것 같아. 사실 내 어리석음에 대한 분풀이에 가까웠을 거야. 그러던 어느 날, 방송 도중에 익숙한 문장이 나오는 거야. 그럴 수밖에. 그렇게 힘주어 쓴 문장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내 단어들을 그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다 읽은 마왕은 잠시 말이 없다가 참으로 쉽게도 말했지. 포기하라고.

관계는 꽃꽂이와 같아서, 처음부터 공들여서 매만지지 않으면 아무리 손을 써도 돌이킬 수 없다고. 정말 그 사람을 좋아했다면 애초에 그렇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꽃이 시들고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나아가야 했다는 말을 했었지. 포기하라는 단호한 말에 억울한 마음도 잠시, 잘 이해는 못 하겠지만 뭔가 멋진 말을 들었다는 기쁨에 괜히 글썽거리기도 했던 것 같아. 정작 그 말의 의미는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다음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병맛이라는 게 한참 유행했었잖아. 생각해보면 병맛의 창시자는 마왕이 아닌가 싶어. 삼태기 메들리송 기억나? 나는 지금 생각해도 진짜 이해가 안 된다. 어째 사람이 방송 내내 노래 하나만 틀고 도망갈 수가 있냐. 그것도 몇 번이나. 요즘에야 재기 발랄한 예능이 많아지고 그러다보니 이런 말을 들어도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그때는 아직 강호동과 유재석이 엑스맨에서 춤출 때라고. 그런데 그게 참 좋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나에게는 서울에서도 가장 크다고 소문난 엠비씨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그런 것을 할 수 있었던 용기가 부러워서 더 좋았던 것 같아.

그래서 여기서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사실 참 많이 기대했었어 ⓒ JTBC

그래서 여기서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사실 참 많이 기대했었어 ⓒ JTBC

배운 것도 참 많다. 며칠에 걸쳐 했던 밴드 나눠듣기 기억나? 나는 진짜 그게 너무 충격이었다? 그냥 기타가 지가지가징 하다가 드림이 투다다다하면 보컬이 나와서 노래 부르는 게 밴드 음악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파트별로 나눠들을 수 있다니. 마왕의 말처럼 처음에는 드럼 소리를 따라가다가도 어느새 보컬의 목소리에 혼이 팔릴 때면 귀신같이 알고 멘트를 뱉었지. 집중하세요. 드럼을 쭉 따라가야 해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기만 하다.

주말마다 하는 인디차트도 빼놓을 수 없지. 피터팬 콤플렉스, 아일랜드 씨티, 3호선 버터플라이, 언니네이발관, 푸른새벽, 몽구스- 그때의 MP3 리스트는 거의 마왕이 결정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도 좋아. 가끔 마왕이 저 먼 나라의 음악을 틀어줄 때도 많았지. 근데, 그게 분명히 멜로디는 좋은데 소리바다에 없을 때가 있다 말이지. 그때는 모자란 컴퓨터 실력으로 녹음파일을 꺼낸 다음 그 음악부분만큼 초단위로 자르고, 그러다 마왕이 음악이 취해서 추임새라도 넣으면 씨발 망했다 망했어 이러면서 짜증낸 거 알려나 몰라. 드림시어터는 또 어떻고. 명곡이라면서 일 년에 몇 번씩 틀어주는데, 아 좋다니깐 뭔가 좋은걸 알고 싶은데 내 귀에는 엠시스퀘어랑 거의 비슷한 수준의 몽환적임만 느껴질 뿐이고. 적으면 적을수록 기억나는 것 투성이다 정말.

있잖아 마왕.

세상은 참 많이 변하고 있어.

바뀐 것을 내가 모를 만큼 말이야. 그래도 나는 당신을 뭐랄까, 일종의 기준처럼 담아두고 살아온 것 같아.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없다면 내 속도를 가늠할 수 없지만, 저 멀리 서있는 기둥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팽팽 돌아가고 있는지 그래도 알 수 있잖아. 이제 고스트네이션으로 만날 수 없고, 살도 좀 많이 쪘고, 가끔 구설수에도 올라도 괜찮았어. 그래도 당신이 있어서 기뻤어.

그래서 더욱 무서워. 이렇게 내가 기준삼은 것들이 이렇게 하나씩 사라지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컴컴함이 나를 포위하면, 그렇게 되면 나는 남은 시간을 어떤 속도로 살아가야 좋을까. 무엇으로 이겨나가야 할까.

타임라인이 참 분주하다. 마왕 노래도 참 많이 올라오네. 어쩌면 오랜만에 고스 게시판도 붐빌지 몰라. 그런데, 나는 그냥 괜히 노래 같은걸로 마무리 안할래. 마왕은 그런 거 싫어할 것 같아. 내가 아는 마왕은 그래.

멘토라는 말도 없던 그런 시절에 그 어떤 멘토보다 깊고 진한 단어들로 내 좁은 시야를 구하고, 살아갈 방향을 인도한 당신.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로맨티스트.

일어나 마왕. 새벽 두 시다. 방송하자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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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김도현

Twenties Timeline 편집장. 늙고 살이 쪄서 고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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