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위한 추석은 없다?
하반기 공채는 왜 하필 9월에 다 마감인 건지. 언제나 그렇듯 준비는 부족하고 마감일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추석엔 내려가지 못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을 해야 하나 일주일을 망설이다 지원서 마감 일주일을 남기고 마음이 급해져, 이번 추석은 고향에 내려가길 포기했다. 물론 이제 졸업반인 내게 끊이지 않을 친척들의 관심과, 질문들을 웃으며 마주할 자신이 없기도 했다. 거기까지 말하지 않아도 ‘취업 준비 시즌’이라는 내 말에 부모님도 웬만큼 내 사정을 이해하는 눈치셨다.
‘명절’이란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어 즐기거나 기념하는 때’이건만 청춘, 특히 ‘대학 졸업반’ 이상에게 명절은 즐겁기 보단 괴로운 날이다. 취준생들은 자소서를 쓰기 위한 ‘명절대피소’로 카페를 찾고, 노량진 학원가는 ‘추석 특강’으로 발디딜 틈이 없다. “공부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아직 뭐 보여드릴 게 없어서 미안하고 창피하죠. 요즘은 명절이나 휴일, 주말이 따로 없는 것 같아요”
명절은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죄책감을 느끼는, 눈치 보거나, 피하고 싶은 날’이 되어 버렸다. 한때 우리도 생각 없이 엄마가 사온 새옷 입고, 큰집에 가서 전을 먹고 사촌들이랑 헤헤거리며 장난치던 때가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게 ‘가족과 함께하는 명절이 버거워진다는 뜻’인 줄은 상상도 못한 채로.
‘추석인데 그래도 뭐라도 챙겨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선 길. 명절 연휴 첫날인 토요일 아침, 아직 모두가 시골에 내려간 건 아닐 텐데 동네는 눈에 띄게 한산하다. 스무 살 때 올라와 6년 넘게 정을 붙인 곳이건만, 텅빈 혼자 걷자니 이 도시가 다시 생판 남처럼 느껴져 서운하다.
자주 가던 가게들은 다 문을 닫아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다 페이스북에서 언뜻 본 포스터 하나가 떠올랐다. ‘추석 연휴에 서울에 머무는 청년’들을 위한 모임을 한다는 <무중력지대 대방동>의 포스팅.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랑 어색하지 않을까’ 고민도 잠시, 그래도 집에서 혼자 라면 먹는 것보단 낫겠지 싶어 길을 나섰다.
무중력 지대, 청춘이 만드는 추석
<무중력 지대 대방동>의 ‘청년연대은행 토닥’ 조합원들이 서울에 남은 청년들을 위해 준비한 ‘큰 추석 잔치’.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벌써 대여섯 명이 모여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내 인사를 밝게 받아주는 사람들.
멀뚱멀뚱 앉아 있다 나도 뭐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버섯 전을 부친다며 버섯을 산처럼 쌓아둔 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그렇게 처음 이야기를 나누게 된 그녀. 마치 원래 함께 전을 부치기로 한 사람처럼 우리는 어느새 함께 공터에 앞뒤로 앉아 함께 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공터에서 바람을 맞으며 전을 부치고 있자니 엄마 생각이 들었다. 이 모습을 엄마가 본다면 '집에서도 그렇게 해보라'며 면박을 주겠지. 대충 전 물을 맞춰보고 버섯을 대강 잘라 넣고, 두 번의 불 조절 실패를 경험한 후 세 번째 쯤에야 그럴듯한 전 모양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은 기다림의 요리구나’ 생각하며 부침이 바삭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몇 사람이 옆에 와서 전을 먹고는 ‘맛있다’는 칭찬을 해주자 내심 뿌듯해진다. 혼자 보내려고 서울에 남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을 요리를 만들고 있자니 서울에서도 명절 기분이 난다.
찜닭, 파전, 버섯전, 볶음밥, 메쉬포테이토, 리코타치즈, 곶감에 과일까지. 빈손으로 와서 이렇게 먹어도 되나 싶을 만큼 한 상 차려진 잔치 음식들. 한 것도 많지 않은데 “같이 음식 준비를 해주셔서 고맙다” 인사를 받고,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스무 명이 넘는 청년들이 함께 준비한 추석 음식을 나눠 먹는다. 그 중엔 서로 얼굴을 아는 ‘토닥’ 조합원도, 나처럼 행사 공지를 보고 이곳에 처음 온 사람도 있지만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인사를 나누고, 서로 음식을 챙기며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보내는 ‘가족 같은 시간’. 어느새 나도 그 틈에 어울려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함께 식사를 한 후엔 윷놀이나 체스를 자유롭게 가지고 놀다가, 야외에서 함께 연극 ‘청혼’을 보고, 마지막으로 집에서 하나씩 가지고 온 선물을 릴레이로 주고받았다.
청춘, 생긴 대로 살아도 괜찮아
덕분에 짧게나마 생각보다 즐거운 추석을 지내고, “어떻게 이런 행사를 열게 됐냐”고 행사를 기획한 토닥 조합원 ‘수빈’에게 물었다.
원래 매월 마지막 주에 청년연대은행 토닥에서 조합원의 날을 열고 있었어요. 연휴엔 넘어갈까 하다가, 오히려 연휴라 혼자 있는 조합원들도 있을 것 같아 행사를 기획했어요. 우리 조합원뿐 아니라 다른 청년들도 마음 편히 시간을 나누는 자리가 필요할 것 같아 규모를 확대했고요.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특히 이럴 때 외롭다고 느낄 텐데 잠시나마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명절 기분도 느끼고 맘껏 웃을 수 있길 바랐어요.
그녀의 바람처럼 덕분에 내 추석은 생각보다 더 행복했다. 함께 준비한 음식과 즐거운 대화, 예상치 못한 선물까지. 혼자 맞는 명절은 외로웠지만, 다른 청춘과 함께한 추석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추석만큼 즐거운 시간이 됐다. 끝으로 수빈에게 ‘당신의 청춘은 어떠냐’고 물었다.
제게 청춘은 제가 '생겨먹은 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방식을 찾는 과정인 것 같아요.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과 잘 어울리는가, 어떤 지향점을 가진 공동체에 잘 적응하는가, 어떤 구조, 혹은 방식의 일을 더 잘 처리하는가를 성찰하며 '저 자신에게 최적화된 삶'을 찾고 '제가 즐겁게 감당할 수 있는 고유의 생활양식'을 만들어나가는 시간이에요.
명절이란 ‘스트레스’거나 ‘취업을 위해 포기하는 외로운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또 한곳에서 다른 청춘들은 명절을 자신의 색깔로 각자 즐겁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세상에 청춘에게 붙여준 ‘5포세대’나 ‘달관세대’라는 이름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취준생이라고 해서 명절을 포기해야 할 필요도, 세상이 청춘이라 만들어 놓은 이미지 속에서 살아갈 필요도 없음을, 혼자보단 함께하는 청춘이 더 행복함을, <무중력 지대>에서 추석을 맞으며 깨달았다.
추석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아직 쓰지 못한 자소서가 떠올랐지만, 서울에서 홀로 보내는 스물다섯의 추석이 더 이상 그렇게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다. '언제든 서울에 내 등 비빌 곳 있겠구나'하는 생각과,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만드는 ‘생겨먹은 대로 살아가는 청춘’들을 만나 오랜만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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