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메시지는 “정당하게” 찢어졌는가

세상엔 ‘뜯어져도 싼’ 메시지가 따로 있는 걸까?

“기본적으로 ~려면 ~를 받아야 한다”

지난 2월 29일 밤 10시경, 어떤 교수가 학생들의 학내 현수막을 칼로 찢었다. 그 현수막에는 “성소수자, 비성소수자 학우들의 새 학기, 새로운 출발을 응원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현수막을 게시한 성소수자 동아리는 즉시 공개사과를 요구했고, 그 교수는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래 지저분한 걸 잘 떼는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현수막을 붙이려면 학생문화처 허가를 받게 돼 있다. 그날 가는 길목에 무단으로 현수막이 게시돼 있기에 사진도 찍은 다음 뗐다.

내용 자체도 반감이 있다. 이 세상에 환영할 사람이 많은데 왜 그 사람만 환영하나? 여러 사람들을 환영해야 하는데 환영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기들의 홍보라고 생각한다. 철거 행위를 문제 삼은 것은 그쪽의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과할 일이 없다. 공개서한에 답변할 이유도 없다.

요컨대, 현수막을 철거한 이유는 그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상황이 그가 말한 대로일 뿐이라면, 그 행위가 정당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디까지나 그는 절차상의 적합성을 주장한 것이니까.

춤추는Q 학내 현수막 훼손 현장

그런데 그 적합성 뒤에 뒤에 있던 의도가 무엇인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이건 기본적으로 타인에 적용되는 정당함의 기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든 ~는 마땅히 ~에서 ~해 버려야만 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중 가장 참혹한 일들은 대개 ‘정당함’에 근거해 이루어진다. 성전을 표방한 십자군 원정이 과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해 신의 뜻을 따르고자 한 순수한 의도에서 일어났는가. “신의 뜻을 따르는” 군대는 200년 동안 무자비한 살육을 반복했을 뿐이다.

ⓒ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나치도 표면적으로는 게르만족 지배의 정당성을 이유로 일어났다. 대다수가 의심 없이 그 정당함을 믿고 나치에 따랐으며, 600만명의 유대인은 그 정당함 아래 학살당했다. 이 모든 일들은 단순히 그들이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같은 악인이어서 일어난 게 아니다.

정당함은, 꽤나 자주, 누군가의 어긋남을 도금하는 데 쓰인다.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는 공명정대한 근거가 아니라, 눈엣가시 같은 약자와 소수를 혐오하기 위해, 강자 혹은 다수가 만들어내는 정당함이 있는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가 하면 관용 혹은 아량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다른 누군가가 하면 절차와 과정의 문제가 따라붙고, 끝내 그 집단은 애초에 틀려먹은 것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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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동아리가 환영받지 못할 사람들이 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현수막은 학생 문화처 허가도 받지 않은 (듯했지만 사실은 아닌) 것이었고, 그렇다면 칼로 잘라서 떼어내도 되는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정당함’은 대개, 권력, 부, 나이, 위계를 등에 업은 자가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껍데기일 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원래 지저분한 걸 떼는 걸 좋아한다’라는 그의 말을 누가 믿는가.

 

“진정한 ~를 위해 ~는 이제 그만하자”

그러나 정당함을 위시하는 자들이 항상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들이 혐오하는 자들이 막상 그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오히려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는 그들이 대개 본인의 정상성에 흡집이 나 있기 마련이다. 알량한 금박지에 가려져 그 흠집이 쉽게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자신과 다른 것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다른 근거를 끌어오는 이들은, 겉으로, 명목상으로 어떻게 보이든, 그와 상관 없이 추악하다. 정당함은 만인이 요구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타당한 것일 때, 그 뒤에 가려진 실세나 진의가 없을 때에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최근 보이는 ‘사회 구조의 문제일 뿐’, ‘남녀갈등 조장하지 말라’ 같은 ‘정당성 있는’ 구호들 역시 그래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 정당성이 등에 업고 있는 것이, 그 정당함이 은근히 혐오하고 있는 것이 과연 조금도 없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강자 혹은 다수가 약자 혹 소수를 혐오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당함은 아닌가?

10일까지 사과를 요구했음에도 답이 없자, 학생들은 결국 교수를 경찰서에 고소했고, 교수 측에서 14일에 총학생회로 사과문을 전달함으로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정당함의 기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나와 너가 다르다’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로 옮겨갈 수는 없는 법인데,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확인만이 반복될 뿐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이토록 평범한 생각을 정당하다고 인정하면서 사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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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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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잡생각 많은 경영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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