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이름 모를 한 팬의 장엄한 실패의 기록
그녀는 아주 오래된 안방팬이다. 그러니까, 공연장이나 행사장, 방송국 등에 가지 않고(아니면 못 가고) 안방 모니터 앞 1열을 지키며 액정과 랜선을 통해 오빠를 접하는 팬이었던 것이다. 2008년 샤이니의 데뷔와 함께 그녀의 덕질이 시작되었으나, 그들을 모니터 밖에서 처음 본 것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14년 세 번째 단독 콘서트였을 정도로, 그녀는 ‘공개 방청’과는 지지리도 거리가 멀었다.
사실 안방에 있으면서도 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홈마’님들의 “대포 카메라”가 선사하는 ‘직찍’과 ‘직캠’이, 그들을 눈앞보다 더 생생한 거리감으로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아이돌을 안방 1열에서 덕질하기란 한국 속담처럼 ‘누워서 떡 먹기’에 가까웠다. “K-POP 아이돌” 팬질이 전세계적으로 성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을, 그녀는 바로 여기에서 찾는다.
그랬던 그녀에게도 ‘덕심’은 차곡차곡 적립되어 갔고, 마침내 때가 무르익어 “오프”를 뛰고 싶다는 마음이 싹텄다. “실제로 보면 그렇게 멋있다며? 공방 사녹(공개방송 사전녹화)에 가면 완전 가까이서 여러 번 볼 수 있다지?” 지방에 살던 미성년자 그녀는 이제 서울 한복판에 사는 만 19세 이상의 자취생이 되었다. 드디어 한 번쯤은 공방은 가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 그녀의 공방 시도 기록을 남긴다.
이것은 이 세계를 만만히 보았던 그녀의 치기를 내가 보고 들은 그대로 기록한 글이며,
또한 한 나약한 ”샤월”이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공방 정기출석을 포기하게 되기까지의 서글픈 과정이기도 하다.
1. 사녹 참여 방식은 아티스트마다 다릅니다.
2. 본 기사에서 소개하는 그녀가 누구인지는 기사?맨 끝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제 1장 떡볶이 집: 공홈에서 사전녹화 공지를 목격하다
그녀는 처음 시도하는 공방의 D-Week를 샤이니 컴백 주간으로 잡았다. 보통 한 아이돌이 컴백을 할 때는 그 주 ‘사전녹화’에 최대한 많은 인원을 넣어주기 때문에 공방 짬이 적은 팬들도 그나마 들어갈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보통 공개방송 스케줄은 목요일 M.net의 엠카운트다운, 금요일 KBS 뮤직뱅크, 토요일 MBC 쇼!음악중심, 일요일 SBS 인기가요로 짜여져 있다. 화요일의 SBS-MTV 더쇼, 수요일의 MBC Music 쇼챔피언 등도 있으나, 그것들은 주로 메이저 방송사에서 주최되는 컴백 무대 이후에 첫방이 잡힌다. 현생을 던질 수 없는 대학생이었던 그녀는, 엠카를 포기하는 대신 “금공강 시간표”에 위안을 얻고 뮤직뱅크를 목표로 잡았다.
뮤직뱅크의 사녹은 금요일 아침이다. 그러므로 목요일에는 ‘명단 작성 개시’가 몇 시인지 공지가 뜬다. 그 목요일, 그녀는 수업을 모두 끝내고 친구와 떡볶이를 먹다가 공지가 뜬 것을 보았다. 내일 오전 9시 30분, 300명. 이론대로라면, 이제 그녀는 다음날 아침 9시 30분에 KBS의 특정 장소로 가서 공개방청 신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오케이 접수. 음원 구매 내역 뽑고 CD 챙겨서 명단 쓰러 가면 되겠다.’
그러나 그녀는 이 순간 두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하나는 그 공지를 확인하고도 남은 떡볶이를 구태여 다 먹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의 실수는 음원 구매 내역이며 구입한 CD 등을 굳이 챙기러 집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뒤 그녀는 비로소 깨닫는다. 정말 공방다운 공방을 원했다면, 공지 뜰 것 같은 시간 전부터 방송국 근처에 죽치고 있었어야 했고, 못해도 그 떡볶이 집에서는 즉시 뛰쳐나가 바로 KBS로 가야 했던 것이었는데…!
제 2장 방송국 앞: “명단”을 쓰고 번호를 받다
그녀는 예전에 ‘유희열의 스케치북’ 방청을 하러 타 본 적이 있는 KBS로 가는 버스를 자신 만만하게 탑승하였다. 그러나 웬걸, 여의도에 진입하자 주체할 수 없이 뛰는 가슴이 오작동을 일으켰고, 그녀는 한 정거장 전에 내리게 되었다. 여긴 어디일까, 아직 늦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오직 네이버 지도의 길안내 하나만을 붙잡고 한참을 걸어 간신히 KBS 신관 앞 정문에 닿았다.
그녀는 이번에는 팬카페에 올라온 공지를 믿지 못해 헤매야 했다. 분명 그녀는 “명단이 정문 파△쿠치 카페 앞 나무에 붙어있다”라는 전언을 믿고 왔으나, 그 카페 앞에는 나무가 한두 그루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참을 헤매다가 어떤 나무 앞에서 셀카를 찍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가까이 갔다. 거기서 그녀는 정말로 만난다. 이렇게 신기할 데가 또 없는, 바로 그 ‘샤이니 공지’를…!
10/7(금) 샤이니 뮤직뱅크 사전녹화 명단
명단 보이게 눈만 보이는 얼굴 사진 + 이름 + 폰 뒷번호
※ 문자 다시 보내지X, 전화X ※
010 - **** - ****
출석체크 10/7 AM 06:30
여기서 그녀는 또 하나의 실수를 하고 만다. 잠시나마 멍하니 서서 ‘와, 셀카도 찍어서 보내야 하는구나’ 경탄을 하느라 한시빨리 문자메시지를 보내지 못한 것이었다. 심지어 누가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사진에 뽀샤시 효과도 첨가해 보낸 것이다. 잠시 후 조금 뒤에 답장이 왔다. “298.” 그녀는 순간 기뻐했다. ‘앗, 선착순 300명이랬는데!! 난 정말 대단해!! 이제 내일 아침에 일어나는 일만 남았구나!!’
그녀는 부풀 대로 부푼 기대감을 그대로 안고 일단 집으로 철수하였다. 팬클럽 서포터 자격의 사전녹화 방청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변수, ‘팬 순위’가 있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제 3장 여의도의 “출근길”: 당일 아침의 ‘중간 출석체크’를 기다리다
사전녹화가 아침 8~9시에 있을 경우 출첵 시간은 보통 6~7시 즈음이다. 그리고 그 장소는 보통 여의도, 상암, 등촌 등에 있으므로, 그곳에 6시에 도착한다는 것은 그곳까지 가는 ‘첫차’를 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먼 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아예 주변의 24시간 카페나 찜질방에서 밤을 지새지만, 그녀는 집에서 자고 아침에 나올 수 있는 거리에 살았으므로, 이것만은 운이 좋았다.
그녀는 새벽 4시 정각에서 4시 30분까지 3분 단위의 알람을 10개 맞추어 두고 첫 알람에 벌떡 일어났다. 낮 12시의 학교 수업에 나갈 때는 30분 전에 일어나 안경만 겨우 쓰고 나가기 일쑤인 그녀였으나, 그날만은 설레는 마음으로 전날 생각해 둔 코디의 옷을 입고 풀메이크업에 렌즈도 끼고 여유 있게 버스를 탔다. 밤과 같이 캄캄한 여의도의 새벽 6시, 입구를 찾다가 방송국을 빙 둘러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저것은 샤이니월드의 줄이라는 것을.
그녀는 몰랐으나, 그 기나긴 대기줄의 세상은 훨씬 복잡하였다. 거기엔 사전녹화 방청을 하려고 온 사람들, 뮤직뱅크 ‘출근길’을 좋은 자리에서 찍기 위해 오는 각종 기자들, 대포 카메라를 들고 몰려온 다른 팬들이 한가득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그저 “와, 이 시간에 입구를 통제할 정도로 샤월이 많았어?” 정도로만 생각하고는, 출석체크 장소에 가기 위해 펜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며 잠깐이나마 아이돌이 된 기분에 젖을 뿐이었다…!
1. 집에서 나올 때 풀메이크업보다 중요한 준비물: 입장 시 확인하는 물자들(CD, 음원 다운로드 내역서, 회원카드 등), 야광봉, 이어폰, 보조 배터리, 간이의자 혹은 방석, 핫팩
2. 추천 코디: 무조건 따뜻한 옷. 더운 여름에도 새벽은 쌀쌀할 수 있으니 위에 입을 셔츠 정도는 꼭 챙기자.
제 4장 신관 공개홀: 중간 출석체크를 후 선착순 번호대로 줄을 서다
KBS 뮤직뱅크의 출첵 장소는 사녹을 하는 신관 공개홀 앞이다. 6시 25분쯤 그곳에 도착한 그녀가, 7시도 안 돼서 이렇게 사람들과 많이 모이는 건 신입생 OT 출발 이후 처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정확히 30분 정각이 되었고, 딱 맞춰 누군가가 외쳤다. “명단 이 쪽에서 확인할게요!!!!!” 서포터즈(소속사측 팬 매니저)인 그녀를 둘러싼 몇백 명의 여성들은 순식간에 고요해진다. 각자의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000번 xxx씨! 000번 xxx씨! 0000(휴대폰 뒷번호) xxxx씨! 안 계시면 뺄게요!” 그걸 듣다가 자신의 번호와 이름이 불리면 한결같이 ‘네~’라고 대답하며 그분에게 간다. 그러면 그분은 왼쪽 손목에 새로운 번호를 적어준다. 출첵에 안 온 사람을 제외한 일련번호인 것이다. 그녀는 앞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결석하길 바라면서 지루하게 기다렸고, 264라는 새 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손목에 번호가 적힌 자들은 새로운 길을 가고 새로운 줄을 선다.?그녀도 그 행렬을 따라가 줄을 맞춰 앉았다. 의자나 방석은커녕 그 흔한 깔판 하나도 없이 풀메이크업으로 서 있던 그녀는, 가방 안에 있던 경영통계학 PPT를 대충 깔고 앉았다. 그녀는 도대체 뭐하러 이렇게 두꺼운가 싶던 PPT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직감했다. 이제부턴, 시간과의 싸움이다…!
대기줄이 지루할 때 할 수 있는 것들:
1.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많이 어색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트고 나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대신 옆 사람이 일행이 있거나 외국인이라면 어려움.
2. 잔다. 평소?잠 자는 시간을 생각하면 당연히 피곤할 수밖에 없다. 시간 소모에도 체력 보충에도 좋은 방법이지만, 목이 꺾이면 더 피곤해질 수 있고, 중요한 공지를 못 들을 수도 있다.
제 5장: “팬 순위”를 반영한 번호를 받고 슬픈 결말을 예감하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입장 번호 배정 시각’으로 공지된 7시 30분이 되었다. 그때 다시 서포터즈가 한 명씩 대기자들의 ‘팬 순위’를 검사한다. 공식 팬클럽 소속인지 아닌지, 앨범은 갖고 있는지, 음원을 다운로드 받았는지 등을 보는 것이다. 거기서 그녀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마주한다. 자기가 9순위 중 5순위, 사실상 맨 마지막 순위의 팬이라는 사실을…!
2009년에 뽑은 공식 팬클럽은 이후 한 번도 추가 가입을 받지 않았고(당시 고딩 지방러였던 그녀는 막연히 대학 가서 들어가면 될 줄 알았다), ‘Odd’ 팬카드를 나눠 줬던 2015년에는 다리를 다쳐 어디도 가기 힘들었으므로, 그녀는 자기의 팬 순위를 입증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5순위의 129번으로 추락한 그녀는 ‘순위별 대기줄’로 이동하며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였다. ‘ 아 샤이니 Goodbye… 그래도 오늘은 “1 of 1” 팬카드를 주는 첫 날이니 그걸 받는 걸로 만족하자.’
공개홀 입장은 사전녹화 시작 30분 전쯤부터 시작된다. 1순위부터 입장을 시작해 차례대로 줄을 지어 들어가는데, 기본적으로 입장 가능한 수는 최초 고지되는 300명이며, 추가 입장 수는 각 팬덤의 서포터즈들이 방송국 측과 얼마나 ‘딜’을 잘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그래서 ‘공방’에 팬을 몇 명이나 더 넣어 줄 수 있느냐는 그 팬클럽 서포터즈의 명성을 결정한다는 이야기, K본부는 입장 인원수에 ‘유도리’가 없다는 소문 등등. 항상 남이 말해 줘서 들어서 알고만 있던 사실들을, 그녀는 이 자리에 와서 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문이 들려왔다. “오늘 샤월 50명 정도 더 넣어준대요!” 그때 아주 잠시나마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추가로 들어갔다가, 결국 ‘커트’되고 말아 다시 공개홀 밖으로 버려진 사람들도 몇 있었다. 삐져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나오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밖에 서 있던 다른 덕후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이 순간을 슬퍼하였다. 그렇게 그녀는 오랜 기다림을 뒤로 하고 아쉬워하며 팬카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1. 당일 샤이니 팬 국적 분포도: 한국 70%, 일본 15%, 중국 5%, 기타 10% (오차범위 매우 큼)
2. 당일 샤이니 팬 성별 분포도: 1명 남성, 나머지 여성
3. 당일 그녀의 총 소요시간:?5시간 30분 (05:30 ~ 11:00)
4. 당일 그녀가 한 모든 일: 줄서기
제 6장 다른 방송국: 실패를 딛고 결국 한 번에는 성공하다
그 다음 주. 그녀는 도저히 안방 1열 탈출을 이대로 실패로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팬카드는, 모든 것을 순순히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 기다려서 받아낸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나마 경쟁률이 낮다고 소문난 화요일 이른 아침 녹화의 S본부, MTV의 더쇼(THE SHOW) 방청에 도전하였다. 전날 공지를 보자마자 바로 가서 받은 번호는 194번, 출첵에서 받은 번호는 170번, 5순위 팬으로서 이번에 받은 번호는 61번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중~후반대에 걸렸으며, 아마도 들어갈 수 있겠다는 것을 알았다.
원래 8시 30분부터 예정됐던 녹화는 왜인지 시간이 많이 밀려 9시 10분 정도부터 입장이 개시되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서도 20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그녀는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 기다림은 그녀에게 기약이 확정된 기다림이었으므로. 차례대로 들어가 풍선을 받고, 샤이니가 리허설을 시작했다. 그녀는 은혜를 경험했다. ‘내가 이 장면을 보려고 지난 며칠을 개고생했구나’ 하는 뿌듯함이 그녀의 가슴에 차올랐다.
샤이니 다섯 명을 모두 눈에 담기에도 버거운 그녀는 결국 난이도 높은 응원법까지 소화해야 했다. 응원법을 제대로 못 외우거나 작게 하면 앞에 세워서 혼자 시킨다는 무서운 서포터가 바로 그녀의 옆 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줄을 서면서 계속 혼자 연습했던 것은 빛을 발했다. 리허설 촬영과 그 모니터링, 본방송 촬영과 그 모니터링, 보충 촬영과 그 모니터링으로 구성되는 사전 녹화가 시작됐다. 중간에 NG가 나면 덕후는 이득이다. 잠시라도 더 오래 볼 수 있으므로.
하지만 PROFESSIONAL ARTIST인 샤이니는 무대를 넘나 잘했고… 모든 것은 30분 정도 만에 끝났다. 줄 설 때는 30분이 그렇게 길더니, 녹화 30분은 왜 이렇게 짧은지. 그리고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방송국을 나오면서 깨닫는다. 바로 출발하면 출석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날 첫 수업에, 도저히 맞춰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역자 후기
이후에 사녹에 더 갔나요?
아뇨, 춥고 졸리고 힘들어요…
도전하고 싶어하는 안방 팬들에게 한 마디?
여러분,?최상석은 항상 안방 1열 이불 속입니다. (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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