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낯선, 가족이라는 그 이름

몇십 년을 같이 살면서도 몰랐었던 가족의 낯선 모습들

그때야 알았네, 아빠도 누군가의 아들인것을.

아빠가 울었다. 시골에 혼자 계시던 할머니가 큰집으로 올라오신 지 6개 월만의 일이었다. 구순을 훌쩍 넘긴 노인에게 치매 증세가 찾아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며느리의 얼굴을 잊으시더니 나중에는 본인이 업어 키운 손주들의 얼굴을 기억에서 지우셨다.

그 6개월간 나날이 증세가 심해지는 할머니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어느 날은 쥐를 잡겠다며 온종일 바닥을 치고 다니고, 어떤 날은 식탁에 있는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고선 배가 아파서 앓아누우셨다고 했다. 별다를 것 없는 치매 증상이었다. 아빠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아빠는 매주 할머니를 보러 큰집에 갔다. 갈 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이번이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는 걸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할머니의 손을 부여잡고 '어머니 딱 한 번만 더 봅시다! 다음 주에도 봅시다.' 했다. 어느 순간 고향도 잊어버렸던 할머니는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잊지 않은 아들을 보며 '오냐, 오냐' 하곤했다.

그러다 할머니가 더이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어느 금요일, 우리는 큰집으로 향했다. 아빠는 슬퍼할 시간도 없이 장례절차를 준비했다. 오래 살다 가셨으니 호상이라며, 이렇게 많은 화환이 온 걸 보면 자식을 잘 키우셨다며 덕담을 주고받는 장례식이었다. 아빠는 손님을 맞이하고 끊임없이 절을 했다. 역시 어른이구나- 싶었다.

삼 일이 지니고 마지막으로 할머니 얼굴을 보는 순간 아빠가 울었다. 꺼이꺼이 운다는 표현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아빠는 아들이었다. 어미를 잃고 이제 어떻게 사냐며 우는 아이였다. 그리고 다시 6개월이 지났다. 늙은 아들은 다시 나의 아빠가 되어 일상을 산다. 가끔은 할머니가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며 투정 부리며, 덤덤하게 어른의 삶을 살아낸다.

/ 정우미 에디터

가장 가깝지만 가장 멀리 있었던 나의 언니

5년.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세월이다. 그리고 이건 언니와 나와의 나이차이로 깊고 긴 우리의 간극이기도 하다. 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하였을 때 언니는 벌써 6학년 졸업반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언니는 교복을 갖춰 입었고, 그런 언니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랑 같은 방을 쓰는데도 언니한테서는 어딘가 서울깍쟁이 같은 느낌이 났다. 겨우 중학교에 들어와 교복을 입게 되었을 때 언니는 교복을 벗고 또 다시 훌쩍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결코 언니와 나란히 서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언니는,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먼 어른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자매지간이 부러웠다. 싸우는 것도 결국은 서로 관심이 있기때문 아니겠는가?

대학생이 되어도 우리 사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줄 알았다. 늘 그래왔듯이 내가 대학에 입학하자 언니는 졸업반이 되었으니 비록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같아도 처해있는 상황은 1학년과 4학년의 차이. 따라 잡는 순간 또 멀어졌구나. 생각한 순간 언니가 말을 걸어왔다.

“나 이거 살건데 너도 같이 살래?”

1+1행사 진행 중인 화장품을 같이 사자고. 너무도 사소한 이 공동구매를 계기로 우리는 조금씩 취향을 공유하게 되었고 스며들 듯이 친해졌다. 티비 프로그램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필요한 게 있으면 같이 사고 옷도 나눠 사 입게 되었다. 자매는 평생의 친구라는 명제가 드디어 공감가기 시작했다. 20년 동안 말 한마디 안하던 우리는 근 5년 사이에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렇다. 5년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시간이다.

/ 박진우 에디터

당신의 딸이 당신처럼 살기를 원치 않았던 당신

한 아이가 있다. 아버지는 엄하고 냉철했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큰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은 언제나 기에 눌려 살았다. 그런 집안에서 아이는 가족들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 자신이 모든 일을 무마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아이가 딱 한번, 하고 싶은 걸 얘기해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그럴 거면 당장 공부를 때려 치고 일을 배우라고 했다. 제 딴에는 그게 술기운을 빌려 태어나 처음으로 징징거려본 건데, 너무 현실적이고 단호한 아버지의 말에 아이는 큰 서운함을 느꼈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서러움을 추스르기도 전에 자기 때문에 얼어붙은 가족들을 보며 바로 체념했다. 다시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야지. 그래서 그 아이는 단 한 번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본인 감정이 어떤지 가족들에게 얘기해보지 못했다.

대신 아이는 자식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매일 상상했다.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걸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결혼이 두려웠던 그였지만 좋은 인연을 만나 딸을 하나 낳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나 뿐인 딸은 어린 자기 자신과 비슷한 꿈을 가졌다.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딸래미. 부모님과의 상의는 그냥 형식일 뿐 제 뜻대로 하고 말아야 직성이 풀린다. 대학원서 접수 같은 중요한 일을 제 맘대로 결정해도, ‘선행동 후보고’ 식으로 나와도 일단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어준다.

되고 싶은 건 어찌나 많은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할 거라고 했다가, 수능 앞두곤 공연 연출 배운다고 했다가, 이젠 드라마 PD 될 거라고 난리다. 그런 딸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일이고 윤리적으로 잘못된 게 아니라면 무엇이든 해보라고 이야기해준다.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막지 않고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아빠 덕에 딸은 꿈을 품고, 그걸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아직 그런 아빠에게 감사하다 하는 것이 어색한 딸. 아빠를 의연하게 안아드릴 수 있는 어른이 되기엔 멀었지만, 자신의 상처를 당신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던 어린 아빠를, 딸은 닮고 싶어 한다.

/ 박헌주 에디터

서른, 엄마는 비로소 친구가 되었다

올해 스물아홉이다. 얼마 안 있으면 서른이다. 그간 엄마는 나를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근데 20대 후반이 된 지금, 내게 엄마는 친구 같다는 느낌이 든다.

20대 초중반, 엄마는 내 자취방에 내 남친이 드나들까 봐 노심초사하셨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저녁 8시면 내게 전화를 거시고는 “나쁜놈들 많으니까 빨리 집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어머님, 어머님이 생각하는 나쁜 일은 낮에도 할 수 있어요”라는 신동엽의 우스갯소리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쩌다 내가 남친과 여행다녀온 걸 아셨을 땐 “처녀가 못 하는 짓이 없어!”라며 역정을 내시곤 했다. 문득 엄마의 젊은 시절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묻지 않았다. 딸을 아직 아가처럼 여기는 엄마에게는 나이만 성인이 된 내게 인생이 뭔지 끊임없이 알려주려는 욕심이 있었다. 그런 엄마의 ‘어른으로서의 자존심’을 꺾는 건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에게 나는 늘 통제의 대상이었다. 시집 가기전까지 순결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내 순결을 지키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학창시절, 아빠와의 이혼 문제로 인생의 큰 고비를 겪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성인이 된 내가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 혹시 몸 주고 마음 주고 다 주는 건 아닐지, 끊임없이 궁금해 하셨다. “아빠같은 사람은 만나지 마라”는 잠언도 잊지 않으셨다. “시집 안 가고 혼자 사는 것도 괜찮다”고 조언하기도 하셨다. 물론 나는 살고픈 대로 살았다. 엄마는 모르겠지만. (자매들이여, 부모랑 떨어져 살자. 그리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니.)

엄마와 친구가 됐다고 느낀 건 20대 후반에 와서다. 사실 그 전부터 엄마는 점점 내 생활을 통제하지 않았다. 나도 그전처럼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미주알고주알 설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서로 알았던 것 같다. 이제 우리는 개별적으로 독립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각자의 인생에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되, 지나친 간섭은 서로에게 해롭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어른이 돼 갔고, 엄마는 어른인 나를 조금씩 인정하는 듯했다. 반대로 말하면, 본인이 내 삶에 해 줄 수 있는 게 이제 많이 없다는 것을 아신 걸지도 모른다.

20대 후반의 어느 날, 엄마와 차를 타고 어딘가에 가고 있었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다가 아빠 얘기가 나왔다. 엄마에겐 좀 아킬레스건 같은 얘기였다. 엄마차 안에 약간 어색한 기운이 돌려는 찰나, 엄마는 말했다.

“요즘 니네 아빠랑 잘 지내. 친구 같기도 하고. 가끔 잠도 자.”

엄마랑 성적인 얘기를 한 건 처음이었다. 엄마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두 사람의 잠자리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는데, 엄마는 평온하고 태연하게 운전대를 돌리며 말했다. 그 평온한 말을 듣고 생각했다.

아, 10년이 넘었던 두 사람의 갈등이 어느 정도 잠잠해졌구나. 아니, 긴 세월이 그냥 덮어준 건가. 여튼 내가 느끼기에 두 사람은 천형같은 부부로서의 인연 반, 친구로서의 인연 반을 이어가고 있는 듯했다. 가끔 잠자리도 함께 하는 섹스파트너로서의 인연까지.

이제 나는 독립된 성인으로서 엄마의 친구가 된 것 같다. 그렇다고 속에 있는 얘기를 엄마와 모두 나눌 순 없겠지만, 적어도 인생의 크고 어려운 순간들을 서로 숨기지 않고 무심한 말로 나마 툭툭 내뱉을 수 있는 사이는 된 것 같다. 그동안은 가족이라 아픈 모습은 숨겨야 했다. 엄마는 자신이 무너지면 나까지 무너질까 걱정했던 걸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랬다. 타지에 딸 자식 보내놓고 걱정하실까 봐 힘든 일이 있어도 대체로 말하지 않았다. “괜찮아”는 우리 사이에 쌓인 모든 속마음을 대변하는, 마법같으면서도 야속한 단어였다.

엄마와 친구가 됐다고 느낀 후, 휴대전화에 엄마 번호를 ‘엄마’가 아니라 엄마의 이름으로 저장했다.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이기에 소중함을 잊고 함부로 대하려고 할 때마다, 엄마도 나처럼 독립된 개인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고 그렇게 했다.

사랑하는 정민 씨, 나 29년 키우느라, 나랑 징글징글하게 싸우느라 고생했어. 이렇게 엄마가 친구가 되기까지, 나 혼자 저절로 컸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 키워줘서 고마워. 우리 둘 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무심한 말들로 작은 위로를 건네는 사이가 됐으면.

/ 하민지 에디터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준 여동생이라는 이름

“동생이 있다고요? 완전 누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사람들과 가족 이야기를 할 때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편견이라고 불평해보지만 어쨌든 나는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장남의 성향과 거리가 멀다. 과묵하지도, 주변을 잘 챙기지도 않고, 듬직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내게는 여동생이 있다. 부모님 속을 덜 썩이고, 보다 현실적이며,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런 ‘첫째’같은 동생이 있다.

형제자매는 끊임없이 교류하며 성장한다. 외국에서 자라 공감할 친구가 적었던 나와 동생은 더욱 그러했다. 우리는 정말 모든 면에서 다르다. 성격이나 문-이과의 학업분야는 물론이고, 식습관이나 음악취향 등의 사소한 부분까지.

어쩌면 이러한 ‘다름’은 남매 나름의 생존 방식일지도 모른다. 애매하게 비슷하면 동일한 척도로 비교당하게 되고, 최악의 경우 ‘대체 가능한’ 자식이 되어버린다. 그런 비교를 피하기 위함일까, 우리는 한명은 계란의 흰자만, 또 한 명은 노른자만 먹는 남매가 되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사실 동생이 못마땅할 때도 있었다. 세상보다는 자신의 눈앞만을 바라보고,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동생이 근시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달랐기에, 그게 틀림이라고 느꼈었다.

허나 자신만큼이나 무거운 가방을 매고, 화장실을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수분 섭취까지 줄여가며 노력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 아마 나는 평생 동생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오히려 이해할 수 없기에 동생을 존경할 수 있었다.

우리의 다름은 서로를 피해가며 성장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생의 대부분을 공유한 사람들이 이렇게 다르다는 사실은 성인이 된 지금은 축복에 가깝다. 나는 나태와 안주가 찾아올 때 곱절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곱절의 노력을 하는 이를 보곤 의지를 다질 수 있다.

너는 마음과 생각이 목에 막혀 있을 때 함께 그 마음들을 꺼내볼 수 있다. 결국, 남매는 둘로써 온전한 하나다. 어쩌면 부모님보다도 지금의 나의 모습에 기여한 사람은 동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동생에게 내가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했다면, 그것 역시 굉장히 멋진 일일테다.

/ 전범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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