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는 광기 속에서 태어난다

물어보자. 너네도 이렇게 빡세게 컸니?

2007년이었던가, 방배동에서 잠시 과외를 했던 적이 있다. 외숙모 친구분의 아들네미였는데, 중2인가 중3인가 그랬다. 집안에 돈은 많지만 아들네미는 공부랑 담을 쌓은 상태인지라, 어떻게 되었든 일단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보게만 해 달라는 것이 내가 받은 주문이었다.

이 과외둥이는 공부 자체를 지겨워했다. 틈만 나면 수업 도중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어했고, 조금이라도 수업이 길어질라치면 몸을 배배 꼬면서 괴로움을 표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너는 뭐 그렇게 싫어서 매번 이 난리냐, 라고 물어봤더니, 선생님이 하루 왼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어 봐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지겨움에 대한 단순한 레토릭인가 싶어서 무심히 넘겼는데, 그 뒤 우연히 알게 된 과외둥이의 하루 스케줄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과외둥이에게는 단 1시간의 휴식도 허락되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그 순간부터 밤 11시까지, 온갖 종류의 과외와 학원 따위로 일정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주말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교회를 가는 일요일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물샐 틈 없는 스케줄로 옴싹달싹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녀석의 스케줄표를 보는 순간 문득 생각했다, 야 이거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겠다.

어느 초등학생의 일정표

어느 초등학생의 일과표

바로 과외둥이 어머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냥 고용주가 아니라 숙모님 친구분이라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렇게 물샐 틈 없이 공부하라고 몰아넣으면 외려 할 줄 아는 공부마저도 못하게 된다, 사람이 집중력에 한계라는 게 있는데, 더군다나 중학생이면 학교 제외하면 하루에 2~3시간 정도가 한계다, 그것도 매일 이런 식으로 하면 성적 이전에 사람 병 나기 딱 좋다.

그랬더니 돌아왔던 대답은, 그건 선생님이 아직 자식을 두어보지 못해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라는 온화한 표정의 단호한 부정이었다. 자식 둔 부모 마음이라는데 내가 어쩌랴, 그냥 조용히 물러났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과외둥이는 도피성 유학을 가게 되었고, 나 역시 과외를 그만두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한 시집에 실렸다는 '잔혹동시'가 한참 화두에 올라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시'라는 관점에서는 모르겠지만 '동시'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든다. 사람들이 동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고려해서라도, 이런 작품은 중고등학생이나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시'로 취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동시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점을 빼고 본다면, 저자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수사나 비유 따위로 교과서 흉내나 내는 백일장용 시에 비한다면 시로서의 생명력은 차라리 한 수 위다.

하지만 내가 이 시를 둘러싼 논란이 불만스러운 것은 다른 부분에 있다. 학원에 가기 싫다는 감정을 자신의 육친에 대한 살해라는 형태의 극단적 욕망으로 표출하게 된 계기가 과연 저자 자신의 잘못된 인성이나 편집-출판자의 부주의에 책임을 물을 일이겠는가 하는 점이다. 나 역시 한동안 사교육 시장에 몸담았던 입장에서, 한국의 '학부모'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광기'로 자신의 자녀들을 몰아부치는지를 수도 없이 지켜봐왔다. 그리고 그 광기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라느니,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포장되고 미화되는 과정까지도 말이다.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

그러나 그와 같은 포장과 미화의 사각지대 속에서 학생들은 곧잘 병들어가곤 했다. 내가 가르쳤던 과외둥이도 다르지 않았다. 기억을 돌이켜보건대, 이 녀석에게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었다. 그 분노는 때로는 자신의 동생을 향해, 때로는 담임교사를 향해, 때로는 눈앞의 엄마를 향해 표출되기도 했다. 내 소개로 다른 과목을 맡았던 선생 하나는 녀석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몇 달 못가 그만두기조차 했었다. 그래도 이 녀석은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을지 모른다. 한 해에 한국에서 자살을 택하는 청소년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곰곰이 헤아려본다면 말이다.

 

광기는 광기를 낳는다. 나는 이 나라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미쳐버린 자신의 부모를 바라보면서, 특히 그 광기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향해 날아들 때, 이를 받아들이는 자녀 입장에서는 무슨 선택이 가능하겠으며, 무슨 태도를 고를 수 있겠는가. 성인인 부모조차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를, 이제 고작 10대에 불과한 자녀들이 우아하게 받아넘기면서, 단 10분조차 마음대로 숨쉬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조차도 '착한 아들 딸' 노릇을 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강제수용소에 갇힌 유태인에게 학업과 노동에 매진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라고 요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원인은 '스마트폰' 때문이라고 합니다. 네네, 아련하실까요.

원인은 '스마트폰' 때문이라고 합니다. 네네, 아련하실까요.

문득 2007년에 겪었던 다른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과외하던 날이었다. 도착해보니 과외둥이네 집은 잠겨있었다. 전화해보니 아직 헬스장이란다. 아파트 앞 작은 놀이터에서 오가며 기다리고 있노라니, 10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꼬맹이 하나가 혼자 그네를 타다가 내게 다가왔다. 아저씨 지금 뭐 하세요? 당시 나는 혼자 카메라를 들고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는 너는 왜 혼자서 놀고 있어? 그러자 이 꼬맹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친구들은 다 학원 가고 없어요."

그때 그 꼬맹이의 발 밑에는 영어학습법을 광고하는 전단 하나가 팔락거리고 있었다. 무심코 셔터를 눌렀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과연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를 반문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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