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청년을 만주(滿洲)로 보내지 마오

민(民)의 유출을 정책자들이 쉽겨 여기는 일이 두렵소

조선 청년을 만주로 보내지 마오

이십대시간선(二十代時間選) 논평(論評)
1921년 6월 13일

조선 청년을 만주(滿洲)로 이주(移住)케 하는 것을 주문하는 것은 실언(失言)의 정점에 닿은 천부당만부당한 발언이외다.

청년 일자리 해소(解消)가 얼마나 화급한 일인것은 모든 민중이 알고 있으나.?대대로 국가경영에 재벌기업이나 수출사업과 같은, 기타의 대(大)공업이 역할을 했지만서도 이런 대사업보다 소자본으로 능히 경영할 만한 소(小)사업을 조사하야 조선 청년으로 하야금 경영함에 적당한 것을 교도(敎導)하는 것이 급무라고 사유함니다. ?허나 당국이 행한 정책을 보면 선후가 바뀐듯한 감이 없지않아 있는 것이 걱정이외다.

국민대통합위원회(國民大統合委員會)를 설립하고 통합정책을 행한 것이든지 방송위원회(放送委員會)가 개조되야 방통위로 된 후에 행하는 것과 비정규직(非正規職), 창조(創造) 경제(經濟), 시간제(時間制) 근로, 게임(揭任)에 관한 것 등 기타 제반 사업이 조선 청년을 희생으로 하면서도, 조선 청년의 사업으로는 가히 볼 만한 것이 ?없는 것이 작금의 사실임이 틀림 없사외다.

국(國)의 부유함은 민(民)의 부유함에서 비롯되듯, 청년을 수출(輸出)하여 눈막음 할 것이 아니라 “창조경제(創造經濟)”나 ?독거세(獨居稅) 납부 “온라인(穩邏人)게임 규제” 와 같은 민(民)의 부유함에 정면으로 반하는 정책을 거두고, 일천칠백만 민중(民衆)인 조선 청년의 일자리를 본위로 하야 당국의 산업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효과가 지대할 것이라고 생각하외다.

하여, 조선 청년을 만주로 보내지 않음이 온당하오. 단순히 하나의 정책에 반(反)하는 것이 아닌, 한번 민(民)이 유출되면 정책자들이 그것을 쉽겨 여기는 일이 다만 두려울뿐이외다.

어찌 알겠소. 이러다 언젠가 저 먼 독일(獨逸)이나 월남(越南)은 물론,?중동(中東)으로 청년들을 내몰지.

 

그림1

 


 

중국은 러시아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봉금령을 해제하고 두만강 이북 길이 350 km, 너비 25km의 화룡욕 지구를 한인 개간구역으로 지정하여 한(韓)인의 이주 및 황무지의 개간을 장려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한(韓)인이 북간도, 즉 현 재의 연변(延邊)으로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이 때부터 한(韓)인들은 만주에서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시작하였으며, 특히 연길현 청평 일대와 해란강 세전벌을 중심으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인 또는 만주족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한 (韓)인들은 아무리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과 밭을 만들어도 개간한 땅을 이 들에게 빼앗기고 3∼4할의 소작료를 지불하는 이외에 지주의 집에 가서 나무를 하고, 집 수리하는 일이며 짚을 썰어주는 일 등 머슴과 같은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관청에 민회세, 수리세, 소세, 소금세, 문턱세, 굴뚝 세 등 각종 세금을 감당해야했으며, 심지어 청국식 머리를 하고 청국식 옷 을 입으라고 강요당했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주의 역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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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진

김어진

Twenties Timeline 피처 디렉터. 상식이 모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