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pics #1 바로 그 내후성 강판

어디서 굴러 들어온 쇳덩어리 한 장이 모두의 동선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뭐야?”

1981년 뉴욕의 어느 날, 맨해튼의 ‘페데랄 플라자’를 거닐던 시민들은 날벼락 같은 변화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광장에, 웬 거대한 철판이,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서, 떡하니 세워져 있었던 것.

맞은편에서 오는 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아이가 뛰어놀아야 하는데, 광장을 가로질러 출근을 해야 하는데. 어디서 굴러 들어온 쇳덩어리 한 장이 모두의 동선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머리 위에 거대한 물음표를 띄운다.?“도대체 이게 뭐야?”

이것, 아니 이 작품은 <기울어진 호 Tilted Arc>라고 한다. 높이는 3.5m, 두께는 6.3cm에 길이는 무려 36미터나 되는데, 약간 휘어진 덕분에 별다른 장치 없이 벽처럼 세울 수 있는 단 한 장의 ‘내후성 강판’이다.

이 강판(=철판)이 광장에 세워진 바로 그 날부터, 뉴욕 시민들은 이 작품을 두고 입씨름을 시작했다. 텅 빈 공간에 하나의 굵고 강렬한 선이 그어진 광경은 분명 스펙터클한 감동을 주지만, 그보다는 불편함과 위화감이 더 컸던 것이다. 뉴욕 시민들의 두 번째 궁금증은 이것이었다. “대체 이걸 여기 갖다놓은 건 어디 사는 누구야?”

 

“누가 왜 이런 거야?”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9~)는 당시 40대의 전도유망한 미니멀리즘 조형미술가였다. 그는 이미 70년대부터 철강을 이용한 거대 설치 미술 작품을 여럿 소개하며 ‘장소특정적 미술’에 관심을 가진 바 있다. 장소특정적 미술이란, “그 물건이 하필 그곳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아름다움이 생기는 예술.

미국 연방총무청은 페데랄 플라자에 공공미술 작품을 하나 설치할 계획이 있었다. 어떤 작가가 적절할지 몰라 국립예술기금 측에 문의했더니 리처드 세라가 추천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일을 맡겼고, 리처드는 기획을 했고, 연방총무청은 승인을 했다. 그렇게 <기울어진 호>는 광장을 가로지르게 된다.

 

“길막이 무슨 예술이냐? 치우라고 해!”

리처드 세라는 처음부터 이 철판이 ‘길막’으로 작동하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이 광장은 출퇴근하는 시민들이 바삐 지나다니는 곳이다. 이 조형물은 관람자가 움직일 때 변화하며 모순과 확장을 낳는다. 이 조형물은 주변 환경 전체에 대한 인식까지도 서서히 바꿀 것이다.”

시민들이 철판을 빙 돌아 지나다닐 때 생겨나게 될 “모순과 확장”, “주변 환경 전체에 대한 인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리처드는 광장을 걸어가는 방식의 상투성이라든가 텅 빈 공간에 대해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낀다는 사실 등등에 대해 느끼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뉴욕 시민들은 현실적인 심경 변화를 겪고 있었다. 당장 불편하다는 점에서 나오는 불평, 그 불편을 감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부의 불만, 그 두 의견이 부딪치는 지면상의 논쟁, 마침내 법정 다툼까지.

행정소송 끝에 <기울어진 호>는 세 조각으로 잘린 후 철거된다. 설치 후 8년 만의 일이었다. 그 사이 <기울어진 호>는 시민들의 분노가 담긴 낙서로 처음보다 훨씬 더 더러워져 있었고, 풍파에 시달려 더욱 녹슬어 있었다.

 

세상에 다시 없을 단 한 장의 철판

내후성 강판(Weathered Steel)이란 일부러 겉을 녹슬게 해 놓아서 날씨를 견디도록 처리한 철판이다. 선박이나 빌딩 등 외부 노출 표면에 주로 사용한다. 리처드 세라는 소싯적에 철제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그가 이후의 작업에서 철강 재료, 특히 내후성 강판에 애착을 보인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녹이 끼어서 강하고 단단한데 추가로 습기를 먹으며 한번 더 녹슬어 가는 이 붉은 강재(鋼材)는, 리처드 등의 많은 조형미술가들이 자주 애용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 용도였던 석탄 운반 열차에서부터 굴뚝, 항만, 교각의 건설 등에도 아주 많이, 흔하게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리처드가 그 강재를 36m 길이로 잘라 맨해튼의 광장에 갖다 놓은 바로 그 날부터, 그것은 세상에 다시 없을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논쟁적인 단 한 장의 철판이 되었다. 이후 오늘까지도 그 철판은 여전히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장소특정적 미술 작품으로 거론된다.

 

―더 이상 뉴욕의 페데랄 플라자에서 녹슬지 않고, 모두의 기억 속에 오래토록 남아 있을 바로 그 내후성 강판, <기울어진 호 Tilted Arc>

EFI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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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진

김어진

Twenties Timeline 피처 디렉터. 상식이 모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