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고향이라고 부를 법한 곳이 없다. 방배동 언저리에서 태어났다고 말만 들었다. 초등학교 이전엔 안양, 전라도 광주, 개봉동을 거쳤다. 초등학교는 강남 개포동의 주공 1단지에서 다녔고, 중학교는 간송미술관 근처 성북동. 거기서 1년을 보내고, 다시 개포동에서 잠시. ?그리고 의정부 외곽에서 1년. 마지막으로 노원구에서 1년을 다녔다. 대략 세어보니 산 곳은 열 곳, 다닌 학교는 여덟 곳 정도 되는 것 같다.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는 '맹부삼천지교'에 가까운 교육열을 갖고 계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결과로 화답하기에는 언제나 애매한 성적을 받았다. 그래서 10대 시절 우리 가족은 나로 인해 매우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떤 기억 - 개포동
개포동에 대한 첫번째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다. 그 때 짝은 여자아이였다. 하루는 그 아이가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다.
"아.. 나 미국 다녀올까?"
그 아이의 말투는 내가 생각하는 유학이란 개념은 아니었다. 마치 여행을 나가는 듯한 말투였다. 가고 싶다는 희망이 아니라 '갔다 올까'라는 말이 또렷이 기억이 난다. 많은 것이 기억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그 기억만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어렸지만 미국은 먼 곳이고 유학은 커다란 결정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돈이 있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내게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응. 그럼 없어?"
내 상식과 내가 사는 모습은 그 아이에겐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듯 했다. 그 아이의 모습과 그 대화는 15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난다.
개포동에 대한 두번째 기억은 중학교 1학년 무렵이다. 아버지의 손에 끌려 개포주공 1단지 11평에서 아버지와 둘이 살게 되었다. 여전히 내 의지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4개월을 보냈다. 그 2002년 겨울, 부자父子 둘이 살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떤 건물에 사람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타워팰리스다.
어느날, 산책을 다녀오신 아버지의 손에는 타워팰리스 상가의 '스타 슈퍼'라는 고급 슈퍼에서 파는 고급 샐러드 드레싱이 들려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국산도 아니었다.?그 가격이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격을 듣고 놀랐던 기억은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드레싱이라는 상품의 합리적인 가격은 아니었다.
며칠 뒤 양재천에 나가 그 고층 건물을 봤다. 그 때 처음으로 사람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눈에 주상복합이라는 그 건물은 사람이 사는 터전이 아니라 성채에 더 가까웠다. 그 성채에는 양재천이라는 멋진 해자도 있었다. 거기에 살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부자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가족이 나를 위해 희생했음을 완전히 깨닫는 것은 5년 뒤의 일이었다.
어떤 기억 - 개포동 밖에서
짧은 개포동 생활 이후, 우리 가족은 의정부 경기도 2청사 앞에 지어진 신축 아파트에 다시 모였다. 몇 개월 뒤,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영구 임대 아파트에 살던 급우 H의 부친이 돌아가셨다. H는 내게 짗궃은 급우였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데 꼭 장례식 가야 하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끌려갔다.
같은 반 아이들끼리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아이의 조모님은 운신을 못 하셨다고 했다. 모친께서는 식당 아주머니로 일하고 계셨다. 소위 말하는 비정규직의 스테레오타입인 셈이다. 돌아가신 부친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산재로 장애 판정을 받고 평소에도 많이 마시는 편이었던 술을 한동안 더 마셨다고 했다. 사인은 만성 간경화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그 아이는 내게 말했다.
"너는 공부도 꽤 잘하고 좋은 데 살잖아. 살만 좀 빼면 쩔겠는데? 부럽다 너."
H의 바람과 다르게 아쉽게도 그렇게는 못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잘 몰랐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시절 내 꿈은 의사였지만, H의 꿈은 의사는 커녕 빨리 돈을 벌어 어떻게든 집에 민폐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개포동의 여자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와 여자아이의 관계는 H와 나의 관계였던 것이다.
당시를 생각해보면?주변에서 누구네는 편모 가정이더라, 누구네 형은 집을 나갔다더라. 누가 학교를 그만뒀다 하는 것은 그렇게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당연해 보이던 일상이 무너진 자리에서 꿈도 무사할 수 없었다.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우리는 같지 않았다.
다시 이사를 했다. 이번엔 서울 동북부다. 아버지가 원했던 S고교는 가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고등학교에 갔다. 그곳에는 타워팰리스는 없었다. 그러나 영구 임대 아파트에 사는, 시쳇말로 '노는 아이'도 내 기억엔 거의 없었다. 그 대신에 부동산 버블에 힘입어 집값이 올라 기뻐한 학생은 좀 있었다.
모두가 사교육 쯤은 끼고 다녔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SAT라도 쳐서 미국으로 뜨겠다는 학생도 없었다. 모두 다 비슷했다. 3년 뒤 주변이 원하는 수준의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미리 분양받은 신도시로 이주했고 그와 함께 서울 생활도 끝이 났다.
우리는 정말 '우리'일까?
그렇게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른 공간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더욱 알게 되며 자라왔다. 그리다보니 모종의 위화감을 마음 속에 품게 되었다.
"너희 20대는 왜 배부른 줄 모르느냐?"
구태여 어르신들의 흔한 세상살이 충고와 훈계만이 아니다.
"우리 20대는 착취당하고 있다!"
우리. 20대의 누군가가 '우리 20대'로서 그 여자아이와 나라는 사람과 H를 같이 묶을 수 있다는 것에 처음엔 놀랐다. 누군가에게 당연하게 전제되는 것은 다른 이에게 당연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우스워지기 시작했다. 누가 감히 우리를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는가.
"왜 우리 20대가 스스로 일어나지 않습니까" 하고 소리를 드높이려는 순간, 꿈을 버리고 가족을 책임지러 간 H의 모습이 환영처럼 발목을 잡았다. 다른 학생들이 등록금과 싸우고 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H는 아버지가 없어졌다는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반대로 "너희 20대는 왜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느냐"는 비난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희 20대는 이렇게 때문입니다" 하고 답변하려는 순간 나와는 전혀 다른 비전과 꿈을 갖고 있던 그 여자아이의 모습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나의 현실과 그 아이의 현실을 같다고 말해도 정말, 괜찮은걸까.
이런 이야기들은 언론사들은 경쟁적으로 게시하는 세대전쟁이란 언론의 헤드라인에 존재하지 않았다. 매한가지로, 그 헤드라인을 벗기고 싶어하는 같은 20대의 주장에도 없었다.
20대의 누군가인, 나의 결심
내 주변의 것들을 다른 사람이 당연히 갖고 있을 것이며, 그러니 같은 문제를 느끼고 같은 것을 꿈꾸리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듯한 글을 보면 어느 순간 불쾌한 기분을 느끼면서 다시금 나를 돌이켜 본다.?내게 미국 유학을 말하던 아이가 개포동 세입자에 불과했던 우리 가족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중학교 2학년이었던 H가 스스로 가정을 짊어지려 들어간 것을 기억하니까. 그 외에도 수많은 곳에서 다른 현실을 마주하고 살아갈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20대인 우리는 같았지만, 또한 달랐다. 그 사실을 이해하고 세상을 얘기해야 다른 사람에게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다. 같은 지향을 갖고 공감을 바랄 수 있다. 그것은 내 신념이며 또한 다른 사람이 그리 해주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이것을 잊지 않으려?노력하며 글을 쓴다. ?앞으로도 잊지 않고 쓰고 싶다.
김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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