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세대의 목소리란 무엇인가, 청년을 위한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 언급하기 즐기는 화두다.
세대간의 인식 격차, 경제력 격차, 정치적 갈등 모두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는 지적은 많다. 그리고 과연 청년 담론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역시 수많은 논의가 있었다. 청년 세대의 일각은 스스로 매체를 만들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청년들이 모인 대안적인 공동체도 있다. 그러나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다만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청년이라는 화두에 대한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청년을 위한 정치란, 청년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얼핏 보면 자극적인 결론을 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하나는 '청년 문제'는 그 이전 세대의 문제와 연관이 깊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청년이란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구성원이 바뀌는 하나의 상태고 이정표라는 점이다.
그 두 부분은 대부분의 청년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부분과 관계가 있다. 청년은 별도의 '인종'이 아니다. 그 사실은 앞으로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청년 세대는 인종, 출생지, 국적과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청년 세대의 문제라고 언급되는 어떠한 것도 과거로부터 단절된 문제도 아니고, 지금의 청년은 영원히 청년일 수 없다.
문제의 시작
만주에서 돌아온 차량 운전사의 장남으로, 호남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작게나마 자수성가를 이룬 부친이 계신다. 빈농의 딸로 상고를 졸업하고 자녀 때문에 은행을 나와 비정규직으로 수십년을 지낸 모친이 계시다. 두 분 모두 사실상 가난한 집의 자녀들이었다. 아버지는 상고를 졸업하고 독립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셨다. 어머니는 지금의 강남 외곽에서 태어나 자라셨다. 두 분은 만나셨고, 결혼을 하셨다. 그분들이 살아오신 인생은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지금의 내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외가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숙모님이 계셨다. 숙모님과 우리 어머니, 셋째 이모는 대학을 가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상고를 나와 은행에 입사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난 80년대 최후반, 한국에서 여성의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시쳇말로 종북이나 할 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퇴직을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얼마간은 은행의 텔러로 일하셨다. 공교롭게도 어머니를 둘러싼 상황은 갈수록 나빠져 갔다. 내가 자라면서 같이 어머니도 연세가 늘어가셨기에, 은행 계약직 텔러도 더 하실 수 없었다. 어머니는 파견업체 소속으로 간호사들의 보조원을 거의 십 년, 어쩌면 내 기억보다도 더 오래 하고 계시다. 임금은 언제나 최저임금에 한없이 근접했다. 어머니는 노동법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우리 가족의 소득이란 거의 언제나 아버지의 몫과 그 3분의 1, 또는 그것조차 안 되던 어머니의 몫을 합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쓸 곳은 너무 많았다. 교육 환경의 격차, 즉 소위 말하는 '학군'의 문제는 너무나 컸다. 거기까진 좋았다. 서울 부도심에 가족이 살 수 있는 아파트 정도는 대출 끼면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의 턱없이 낮은 소득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건 가외 소득이었다. 거기까지는 마치 조부모님 세대의 상황을 부모님이 '극복한' 것처럼 보였을 지도 모른다. 아니, 일정 부분 확실히 극복했다.
터닝 포인트
평생 고생만 하셨다는 조부님은 어느 날, 치매를 앓게 되셨다. 조부님을 집에다 모시는 건 무리였으니 요양병원을 알아봐야 했다. 월 수십만원의 지출이 새로 생겼다. 조모님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아버지는 장남이셨다. 돈을 보태서 뭘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모셔야' 하는 것이다. 이때, 나와 동생 역시 각각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되었다. 양친은 위로는 조부모님, 아래로는 우리에 의해 이중으로 짓눌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노동조건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고,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파국을 맞지 않으려면 결단을 내려야 했다.
거의 완전히 자녀들에게 노후를 의지해야 하는 지금의 노인들이 가진 빈곤 문제. 치솟던 서울 부동산 가격. 돈먹는 귀신이나 다름없던 사교육 경쟁, 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정년까지 가면 도둑놈'이 되어버린 해고의 일상화, 한국에 언제나 존재했고 거의 해소된 것이 없는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 그 모든 문제들은 우리 가족에게 선택을 하게 했다. 양친은 갖고 있던 서울 동북부의 집을 얻은 지 딱 2년만에 정리하셨다.
그나마 우리 가족은 대단히 많은 수혜를 받은 편이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부러움을 사는 사내복지가 두 사립대생 남매의 학비를 책임졌다. 그 덕분에 양친은 우리에게 모든 돈을 쏟지 않고 당신의 노후를 준비하셨다. 우리 남매가 대학에 다니는 동안 우리 집은 경제적인 문제를 단 한번도 겪지 않았다. 우리 남매에게 필요한 건 잘해야 용돈과 내 기숙사 임대료 정도였다.
그러나 한 가지의 문제는 극복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서울에서 사는 걸 포기한 정도가 아니라, 서울로 통근이 가능한 거의 한계선까지 밀려났다. 경기남부, 개중에서도 외곽. 우리는 다양한 것들 중 거리를 가장 먼저 포기했다. 그러자 광역교통망이라는 도시계획과 지역 개발에 관한 이슈가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난 부모님의 결정이 옳았으며, 부모님은 더 노력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오히려 내가 너무나 평탄한 길을 걸었음을 확신한다.
청년의 연속성
그러나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과 별개로, 내가 그 거리의 연장과 시간의 결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좋은 일자리는 내가 사는 동네엔 존재하지 않았다.
취업을 앞둔 내게 통근에 대한 선택지는 한정되어 있었다. 1시간 30분을 초만원 지하철이나 광역버스에서 압사 직전에 몰리면서 다니거나. 아니면 갑작스럽게 목돈을 만들어 보증금을 소화하고 앞으로도 월세로만 최소 매월 40만원을 쓰며 자취를 하는 방법이다. 물론 생활비는 덤으로 나가는 것이고.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제일 좋은가는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동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일 학교에 가기 위해 왕복 4시간을 소비했다.
그 상황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 또는 무언가를 '청년 정치'의 일환으로서 해줘야 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강조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청년을 둘러싼 환경의 연속성이다.
양친은 조부모님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조부모님이 가난했기에 대학을 가지 못하고 빨리 사회에 뛰어들었다. 조부모님은 여전히 가난했고, 연세에 따라 건강을 잃었다. 그런 윗 세대의 상황은 소위 말하는 천륜을 저버린 미친 사람이 아닌 양친께 어떤 것들을 포기하게 했다. 그리고 양친의 선택은 다시 나와 동생에게 또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을 낳았다.
"집은 왜 이렇게 비싼 것일까."
"일자리는 왜 이렇게 없지?"
"정규직은 될 수가 없고, 비정규직은 되면 살 수가 없네.."
나와 내 주변 동년배들에게는 이런 다양하면서 유사한 문제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 외에도 내 경우는 아니지만 내 주변 친구들은 자기 손으로 돈을 벌기도 전에 학자금 대출로 빚을 지고 있다.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많은 문제들이 존재한다. 그런 아주 흔하고 일상적이며 거진 유사한 문제들을 두고 '청년 이슈'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문제들에 대한 유사한 '입장'을 갖고 있는 이들을 두고 청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단지 우리들이 겪는 문제들이 대체로 어느 정도 비슷비슷하고, 우리들이 내보일 수 있는 입장이 대체로 어슷비슷하기에 그런 '우리들'을 가상의 인간 하나를 만들어서 호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청년이란 인종이나 성별, 출신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갖게 되는 상태고, 그 상태를 가진 어떤 '사람들'의 평균과 가장 유사한 어떤 개념이다. 그게 '청년 세대'라는 말이 갖는 의미다. 분명히 서로 다른 여러 사람들 사이를 적당히 뭉뚱그려 정치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그런, 용어.
그리고 나와 내 주변이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나는 청년 이슈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서민' 내지는 '워킹 푸어'의 문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나와 내 주변이 '청년 문제'라고 안고 있는 것 중 단 하나도 내가 청년이라는 '인종'이라서 갖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과거를 살아간 사람들이 내게 남겨준 유무형의 유산과 환경이 내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가 겪게 되는 것들은 내 이후의 사람, 그러니까 나의 2세에게도 다시 이어지게 된다.
청년의 기반과 청년 문제
만약 조부모님이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억대의 빚이라도 지고 있으셨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집에서 통근할까, 신림이나 군자로 갈까 하는 고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이 만약 중환자셨다면, 대학 따윈 애저녁에 그만두고 돈부터 벌자고 몇 년은 더 빨리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을 지 누가 아는가.
어떤 청년이 미래에 희망이 있네 없네 하는 문제를 얘기하는 것은 그(녀)가 밟아온 과거가 어떤 모습이었는지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결국 '청년 문제', '청년 세대의 목소리', '청년 세대의 의사'와 같은 많은 것들을 다루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지금의 청년담론을 해체해할 필요가 있다.
청년이라는 말은 인종과 같이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그보다는 마치 흘러가는 물을 '물결'이라고 정의하는 듯한 용어에 가깝다. 청년이 살아온 모습은 과거의 청년이 넘겨준 것이고, 청년의 생각은 과거의 사람들로부터 절반 이상이 이어진 것이다. 아무리 급격한 분절이 있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청년 세대를 이루는 개인들은 각자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물려받은 유무형의 유산, 만들어져 있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지방의 청년이라면 지역간 경제력의 격차와 거리 문제가 내 발목을 잡는다. 내가 빈곤층의 청년이라면 대학을 가기 너무 힘들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성차별적인 관행 때문에 '취업만 되면 결혼 따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갈며 머리를 싸맨 채 인적성 준비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청년이 아닌 '내' 여러 정체성과 그에 따르는 문제들의 최소공배수가 청년 문제의 진정한 모습이다.
결국 청년 개개인이 물적인 토대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무엇을 하며 살게 될 것인가 하는 이른바 '청년 문제'란 그 이전의 세대의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 그 문제는 청년 개개인이 실제 상황에서 마주하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았고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부딪히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에 달린 것이다.
청년의 정치
청년 문제란 주거 불안, 소득 양극화, 고용불안정 등 수많은 문제들의 합이다. 그러므로 청년 문제의 해결이란 결국 주거가 '어떻게 불안한가', 내 임금은 어떤가, 내 직종과 신분은 어떤가, 내 성별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사는가, 그와 같은 청년으로서의 내가 아닌 '나라는 청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문제는 청년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이라고 불리는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빈번하게 겪는 문제다. 그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청년 말고도 수도 없이 많다.그렇기에 정치의 영역에서, 청년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갖고 있으며 마주하게 되는 여러 정체성에 의해 힘을 합치고, 연대하여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선택은 '내가 청년이라서' 생기는 입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청년 각자가 가진 '입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국어 하나는 네이티브요 다른 하나도 만만치 않은 3개국어 해외파 금수저를 볼 때의 박탈감과 분노는 당신이 그를 '청년 세대'로 부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애 낳으면 회사 그만둘지도 모르는데' 라는 말을 면접관에게 듣을 때의 모멸감은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사실을 당신에게 다시 알려줄 것이다. 지인과 친척 앞에서 끝까지 학교 이름을 제대로 대고 소소하게 뻐기지 못하는 미묘한 두려움은 명문대와 해외파를 당신과 다른 인종으로 보게 할 것이다.
다른 경우로, 6시 반에 일어나 9시 수업을 들어온 나와 달리 8시 40분에 일어나 떡진 머리와 슬리퍼 차림으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으며 앉아있는 동기에 대한 미묘한 감정은 그 동기에 대해 자그마한 벽을 쌓게 할 것이다. 그저 못생긴 임시완에 불과한 당신과 대비되는 대기업 다니는 친구가 주는 자괴감은 당신에게 세상의 인간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억지로 주입시킬 것이다.
흐름 속을 살아가는 '청년'
이러한 사실 속에서 당신이라는 청년 A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청년이란 글자에 담긴, 단순한 출생연도보다도 훨씬 앞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계층을 말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나의 탄생 이전에 만들어지고,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만들고 있기도 하다. 청년 A가 가진 그런 부(-)의 감정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그것이 단순한 출생연도의 문제도 아니고 모두가 공유하는 문제도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떤 연령이라서 곤란한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라왔기에, 어떤 상황에서 어떤 입장들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청년의 '연령'이 된 나에게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누리는 당신보다 우월한 위치를 이미 봤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어떤 부분에서, 당신보다 훨씬 곤란한 위치에 서있는 것도 이미 봤다. 그 우월함과 열등함이 다양한 곳에서 수많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당신은 자신이 '참을 수 있는' 어떤 특정 연배의, 특정한 모습의 사람들을, 청년이라는 이름의 아주 가벼운 동지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당신은 얼마든지 실제 문제에선 다른 '청년'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지 않는가. 당신은 금수저가 아니라서, 또는 어떤 '입장'이 아니라서 청년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당신이 청년이라서 금수저가 아닌 게 아니라.
즉 한 청년을 대변하고, 그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란 청년의 정치가 아니라 비정규직의 정치, 빈곤한 사람들의 정치, 세입자들의 정치, 지방민들의 정치, 그런 수많은 정치들 중 당신의 필요에 맞춰 참여하고, 힘을 모으고, 성과를 얻는 입장과 정체성의 정치고, 그것들이 모인 '패키지 상품이어야 한다'
그런 당신이라는 청년 A를 포함한 많은 청년들 사이의 타협과 조정, 그 청년들을 포함한 많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타협과 조정이 바로 청년의 정치이며 청년을 위한 정치다. 그래서 어떤 청년 A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그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야만 하고, 그럴 수 있는 정체성의 정치를 위한 기틀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정치들에서 의사가 모여 조직이 되고, 그 조직이 정당과 정치적인 결사의 한 기둥으로 자리잡을 때 비로소 '청년 A를 위한 정치'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청년을 위한 정치의 재구성
청년이 정치에 접속하는 흐름과 반대로 정치가 청년에 접속하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청년은 편의를 위해 만든 가상의 범주다. 실제 정책과 제도란 그런 것에 의지해 만들어지지 못한다.
청년이 서울에서 주거 불안정에 시달리는 것은 청년의 문제인가, 아니면 서울에 집이 없는 부모들의 소득과 자산에 관한 문제인가, 아니면 광역교통망이라는 도시계획의 문제인가? 평범한 대학의 평범한 문과 출신이 시달리는 취업 문제는 청년의 문제인가, 교육의 문제인가, 노동의 문제인가? 청년 문제는 결국 넓게 보면 모든 것의 문제고, 모든 문제는 청년 문제와 연결되기도 한다.
'빈곤층'은 청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청년이 받는 차별을 해소하려면 다른 청년들이 받았던 반사이익을 내놔야 한다. 청년세대의 목소리란 어떤 한 인종의 목소리도 아니고, 청년세대를 위한 정책이란 인위적으로 '어떤 청년'을 위해 그려놓는 일이다. 그 사이의 타협과 조정, 개혁은 곧 모든 이들의 일이고, 모든 이들에 의해 청년의 삶과 의사를 정의하는 일이다.
사회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청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란 청년을 돌봐주거나 청년의 화두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세대를 따라 계속 이어지고 계승되는, 체제와 시스템에 관한 추세를 반전시키고 갈등의 소지를 개선하는 일이다. 물론 인터넷에서 떠도는 "꼰대질을 멈추라" 류의 청년 세대의 대변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의 외침, 그리고 그런 청년들에게 관심이 있는 장년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같은 정신적인 자해에 가까운 언사를 하는 것도 넓게 보면 각자의 이해와 존중을 도모하기 위해 필요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일 뿐, 실제로 청년이 됐건 장년이 됐건 그 대답은 언제나 현실에서 사는 계층과 개인을 위한 정책과 제도로 넘어올 수밖에 없다. 부모님을 위해 노령연금을 찬성하든지,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들어갈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든지. 그런 걸 '하기 위해서' 이해나 존중같은 대화의 수사가 선행되는 것뿐이다. 청년을 포함한 세대라는 개념을 쪼개지 않은 정치란 김광진, 장하나 등의 정치'인'이 갖는 정치적 상징성에서 영원히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 것은 청년 세대를 위한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의 상징적인 기반에 불과하다.
다시, '청년'을 말하다
청년은 정치적 자원을 동원하기에 좋은 화두일 뿐, 실존적인 화두와는 거리가 멀다. 상당히 불만스럽다. 청년을 이해한다는 장년이 언제나 '미안해하고', 청년이 그런 장년에게 역으로 피해자의 입장에 따라 만만한 사람을 상대로 윽박지르는 행태는. 멘토 장사가 싫은 건 싫은 거고, 꼰대질이 싫은 것도 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들이 장년 세대로서 권력을 쥐고 있어서가 아니어야 한다. 그들의 주장이 틀려서, 그들이 폭력으로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걸 당연히 여겨서라는 이유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되지는 않는다.
사회는 모두에게 분리된 곳이 아니다. 그리고 청년이란 하나의 상태다. '세대를 동원하는' 정치가 성공한 적은 없다. 사회에 필요한 건 세대 문제에 대한 인식일 뿐, 세대적 목소리가 아니며 세대적 정치가 될 수 없다. 청년 문제는 사회의 모든 것과 관계가 있지만, 그 반대도 성립한다. 그렇기에 청년이라는 화두는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강자와 약자, 갑과 을, 부유층과 빈곤층, 도시와 지방, 남자와 여자 등 실제로 존재하는 정체성의 조직과 연대, 그를 통한 정치로 타협하고 조정되어야 한다.
정체성의 정치는 세대 이해의 돌파구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60대 빈곤층과 20대 빈곤층 중 누가 더 구제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지 않다. 사회는 그렇게 나뉘어져 있지 않으며 그저 사람들의 인식이 나뉘어져 있을 뿐이다. 빈곤한 60대는 빈곤한 20대를 만들고, 빈곤한 20대는 빈곤한 60대로 이어진다.
그래서 섣불리 청년 세대의 목소리와 청년 정책을 외치며 기성 세대 앞에 투쟁을 선언하지도, 우리 청년들을 보라고 애원하지도 않는다. 실제 문제는 더 크고 연속적이며, 해답 역시 그래야 할 것이므로. 이런 내 믿음은, 내가 청년 세대를 대변하거나 그들을 위로하려는 시도들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가장 원론적인 이유다.
김진우
김진우의 이름으로 나온 최근 기사 (모두 보기)
- ‘소외된 청년’을 말하는 것이 불편한 이유 - 2016년 1월 19일
- 청년을 위한 정치의 재구성 - 2015년 5월 18일
- ‘모두’가 행복한 공유경제? - 2015년 5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