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가 봐야 뻔하지 뭐 수산시장 있겠고 고시생 있겠고”
혹시나 하면서 친구들에게 지나가듯 물어보곤 한다. “야 내가 노량진과 청년을 소재로 해서 무중력지대에 기사를 송고하고 있거든? 어떤 거 쓰면 좋을까?” 그러면 돌아오는 답이 대부분 비슷하다. “노량진에 청년? 글쎄 청년은 잘 모르겠는데 노량진만 생각해 보자면 뭐, 수산시장, 고시학원, 아 또 뭐 있지? 육교? 거기 육교 있잖아.”
육교가 없어졌다는 답을 해 주면 마치 서로 짠 것처럼 똑같은 반응이 돌아온다. “아 진짜? 글쎄 그럼 뭐 더 없는 거 같은데? 노량진이 솔직히 뻔하지 뭐. 컵밥 맛있다던데? 그거나 한번 써봐라.” 노량진 컵밥 리뷰는 네O버 블로그를 찾으면 산더미같이 나온다고 무정하게 대꾸해 줄까 하다가, 픽 웃으면서 ‘그래야겠군 ㅇㅇ 알았다’ 정도로 퉁치고 그 주제를 끝내는 게 보통이다.
이런 일이 다섯 번쯤인가 반복이 되니, 이젠 내가 궁금해졌다. 정말인가? 정말 노량진은 그게 전부일까? 예전부터,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노량진은 그저 ‘수산시장 재미있고 고시생 힘들어 보이고 여의도 옆인데도 왠지 구석진’, 그런 뻔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을 것인가? 마치 “청년”이 ‘열정, 패기, 노력, 도전’ 따위의 몇 가지 상투어에 박제되어 있는 것처럼, 노량진도 ‘수산시장, 고시생, 컵밥’ 따위로 고정되어 버릴 것인가?
노량진에 와 보시라.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컵밥 #특화거리 #이제는_사육신공원
“노량진”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컵밥’으로 대표되는 길거리 음식들이다. 그 흔한 양념 닭꼬치부터 베트남 쌀국수까지 우리가 어딘가에서 본 길거리 음식은 종류별로 다 있고, 노량진에만 있는 ‘끼니급’ 분식들도 있어서, 노량진을 명소로 만든 대표적인 명물 중 하나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박제된 사실이다. 바뀐 건 뭐냐고? 그것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던 육교 아래 자리에는 더 이상 컵밥거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컵밥거리는 이제 사육신공원 앞에 있다. 지난 10월 23일에 준공식을 치르고 영업을 시작한 ‘거리가게’ 상인들은, 이제 보건증도 발급받고, 동작구가 마련한 판매 부스에서 음식을 제공한다. 가서 보면, ‘진작 여기로 이전했었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 보면 원래 컵밥거리 자리는 노량진 육교와 왕복 6차선의 도로 때문에 워낙 붐비고 매캐하고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노량진 컵밥을 생각했을 때, 몇몇 정치인들이 선거철 유난히 추운 날을 골라서 때늦게 점심 먹는다고 굳이 허름(?)한 포장마차식 매대로 들어가는 광경을 떠올리는가(‘청년의 생활고와 취업난을 이해합니다’ 운운하며)? 축하한다. 이제 적어도 새로 지어진 컵밥거리에서는 그런 뻔한 그림이 나오지 않을 예정이다.
#고시생 #사법고시 #일단은_존치하지만
“노량진”을 명물로 만드는 다른 한 가지는 학원가다. 특히 ‘고시학원’들이 매일 문전성시를 이룬다. 9급 공무원부터 청소년상담사 까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국가고시를 노량진에서 찾아 배울 수 있다. 역시 이번에도 우리는 노량진의 이것까지만 기억하고 관념에 고정시켜 둔 채 살아간다. 자, 이제 생각을 업데이트할 차례다. 5년 안에, 노량진에서 ‘사법고시’에 관한 것은 찾지 못하게 될 수 있다. 학생도 강사도 학원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법고시 자체의 존폐가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스쿨’ 제도의 도입 이래 우리나라에서 가장(사실 유일하게)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국가고시인 사법고시는, 한쪽에서는 ‘경제적 격차 없는 희망의 사다리’로서 존치의 대상으로 방어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법조계 갈등 일으키는 이원화 혁파’로서 폐지해야 할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원래 정한 법적 기한은 2017년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인 만큼 결단이 내려지지 않는 상황이다.
국가고시에는 ‘학비 낼 돈 없는 신분도 열심히만 하면 고시 패스해서 국가의 일을 할 수 있다’라는 합의가 깔려 있다. 그래서일까? 법무부도 사법시험을 2021년까지 일단 존치한 다음 국민 여론을 모으자고 지난 3일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일 뿐, 사시가 언제까지고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 노량진 독서실에서 몇 날 며칠 틀어박혀 판례를 읽는 사법고시생을 만날 일이, 언젠가는 아예 없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수산시장 #2번출구육교 #같은시장_다른느낌
뭐니뭐니해도 노량진 최고 명물은 단연 노량진수산시장이다. 지금의 그 건물 그 자리로 온 게 무려 1971년의 일이기 때문에, 노량진수산시장의 기억은 세대를 막론하고 거의 같은 것으로 이어져 왔다. 노량진역 2번 “출구”에서 이어지는 육교, 그 끝에 바로 이어지는 수산시장 입구, 바닥이 짠물로 흥건하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점포들, 노란 전구 조명… 그 기억이, 완전히 신축된 건물에서 계승될 예정이다.
현대화된 노량진수산시장 건물은 현재 ‘공정률 99%’ 상태이다. 공식 홈페이지 등의 경로로 공개돼 있는 내부 사진과 설계도를 보면, 기존 수산시장의 구조를 충실히 반영해 이어받은 흔적이 엿보인다. 노량진 수산시장 특유의 2층 복도―해산물을 파는 상인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횟집들을 골라 들어갈 수 있는―나 하역장 등의 핵심 공간들은 지금의 수산시장이 가지고 있던 형태를 거의 그대로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건물 주변에 조성될 녹지와 공원, 흰색의 천장 조명, 자동문이 설치된 널찍한 정문 등은 낯설고 새로워서 익숙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40년 이상 사용된 건물의 노후화된 설비들 대신, 노량진수산시장의 본색을 최대한 반영해 최신식으로 지은 신축 수산시장으로 옮겨가고 나면, 그리고 거길 가 보게 되면, 우리가 알고 있던 익숙한 노량진수산시장이 전혀 색다르게 다시 경험되는 독특한 경험이 될 것이다.
#노량진 #변화하고_있다 #지금도
‘박제가 되었다’라는 표현이 있다. 원래는 죽은 동물이 썩지 않도록 일정한 처리를 거쳐서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것을 부르는 용어인데, 본질은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아 활기를 잃고 정체되어 버린 모습을 뜻하는 비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참 세상에는 박제되어 버린 것들이 많다. 걔네들은 절대로 안 변해, 아 그거 뭐 뻔하지, 거기는 안 봐도 비디오라던데, 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들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노량진이 그런 곳일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거기에 고시생들이 있고, 늘 있던 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컵밥거리가 있으며, 재미있지만 조금은 낡은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수산시장이 변함없이 있을 것처럼 생각된다. 작년 찍은 풍경 사진과 올해 찍은 사진이 같고 내년도 그러할 거라고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곳, 노량진은 그런 장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내가 살펴본 결과, 앞으로 노량진을 생각할 때는, 뻔한 사람들이 뻔한 일들을 하면서 뻔하게 살아간다는 고정관념만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노량진은 세상의 흐름에 상황에 결코 모자람 없이 반응하고 변화하는 곳이었다. 첨예한 대립부터 상권의 변화, 새 건물의 건설까지. 크고 작은 변화를 받아들이며 보이지 않게 조금씩 탈바꿈하고 있는 노량진은, 오늘도 박제되지 못할 어떤 색다른 모습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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