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새내기 배움터. 선배들이 다음 술게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남자 선배들과 짝을 지어 '내 귀에 캔디'를 추라고 한다. 강권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싫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들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진다. 그러더니, 선배들의 욕지거리가 들려온다.
"안 춘다고 한 년이 누구야"
" XX, 분위기 망치고 있네'
?분명 다들 싫은 표정이었는데도 나 말고 손을 드는 이는 없었다. 이상했다. 왜 처음 보는 사람이랑 술을 먹고 야한 춤을 춰야 하지? 그렇게 나는 흥겨운 술자리를 깨버린 년이 되었다. 이런 게 전통이고 문화인 곳에 다닐 자신이 없어 재수를 했다.
사람들은 그랬다. 술도 잘 못하면서, 분위기를 휘어잡을만큼 말도 ?잘 못하면서 술잔을 부딪으며 부대꼈다. 그렇게 해야 친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술자리가 끝나고 나면 누가 누군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억지로 술을 마시고 떠든 탓에 기진맥진했다. 그리고 말했다. 어쩔 수 없다고.
몇 년 후. 한 학자의 강연을 갔다. 주최 측은 연사에게 뒤풀이를 제안했다. 그런데 그녀, 단박에 뒤풀이가 싫다고 하는 게 아닌가.?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원래 주최 측 사람들과 연사, 참가자가 모여 하하호호 술을 마시는 거 아닌가?
"나는 언제나 내 앞의 단 한 명과, 맛있는 음식과 이야기를 조용히 나누고 싶어요"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끼리 시끌시끌 모여서 하는 대화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뒤풀이에 가서 또 많은 말을 하게 되는 건 연사의 초과노동이라는 생각을 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 후, 내 삶은 조금 바뀌기 시작했다.?'술 게임 안 하고 싶은 사람 있어요?' 또는?'술 못 마시는 사람 있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새로운 사람과의 뒷풀이는 어떻하냐고? 술게임 대신 '테마 토크 테이블'을 열게 되었다. 연애 / 10년 뒤 나의 모습 / 좋아하는 영화 등의 대화 주제를 정해 써놓고, 그 이야기를 안주 삼아 천천히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
의외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술을 못 마시거나, 술 게임이 싫거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무작정 알콜의 힘을 빌렸더라면 경험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대화 없이 술만 마시는 분위기, 주인공이 되고 싶은 한 명만 떠드는 술자리가 사라졌다.
3월이 다가오고 있다. 신선한 밤의 대학가를 거닐고 있으면, 활짝 문을 열어놓은 술집에서 "언제까지 어깨 춤을 추게 할거야" 또 "부어라 마셔라 네 발로 기어라" 하는 노래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올 것이다. 굳이 거창하게 '테마토크 테이블'을 강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분위기의 술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기회가 새내기들에게 찾아올 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한번은 자기 성격에 맞는 다양한 술자리를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을 진정으로 즐기고 있는 거라면 좋겠다.?더 이상 흥겨운 술자리를 깨버린 년들이 나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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