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니가 정치적으로 중도라고 생각해?
선거철이 되면 재밌는 구경거리가 많이 펼쳐진다.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던 후보자들의 환한 미소나, 재래시장에서 벌어지는 악수 퍼레이드와 같은 것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더 이상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투표를 몇 번 해보면서 이제 어느 것이 참이고 거짓인지 구분하는 정도는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나를 헷갈리게 하는 멘트가 하나 있긴 하다. “중도정치를 지향합니다.” 일자리 창출만큼이나 후보자들의 포스터에 흔히 등장하는 말이고, 그만큼 혹하기 쉬운 말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 2012년에 19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생각당’이 창당했다. 중도정치를 표방하며 중도신당으로 불렸던 국민생각당. 하지만 지금 그 당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참고로 국민생각당은 19대 총선 결과 지역구와 비례대표 모두에서 의석 획득을 실패했다. 그들은 중도라는 이름으로 고루 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국민들은 ‘국민생각당’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내 주변에도 정치 성향을 드러낸 이들보다 자신을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보수나 진보를 지향할 때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그렇다면 중도는 말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buy depakote, generic Antabuse. 혼자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스스로 중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어떨 땐 좌도 옳고 어떨 땐 우도 옳아서
친구 A
좌도 맞고 우도 맞을 때가 있어서. 물론 좌랑 우 둘 다 틀릴 때도 있고.
나는 보수 쪽에서도 찬성하는 것이 있고
진보 쪽의 의견에도 동의를 하기 때문에 중도.
또 때마다 달라지기도 하는데
요즘 상황을 보면서는 보수 쪽을 비판해.
‘중도’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중도 그 자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위의 친구들과 같이 한 문제에는 보수적이고, 또 다른 문제에는 진보적이었다. 오히려 어떤 입장에서는 진보나 보수주의자처럼 분명한 자신만의 의견이 있었다. 여기서의 중도는 중간이라기보다 여러 조합으로 인한 평균쯤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 친구들에게는 득표를 위해 중간으로 이동하는 행동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이들은 이슈별로 다른 이념적 잣대를 대는 이중개념주의자로 ‘중도’라는 타이틀보다 내거는 공약 하나하나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뢰를 중요시하는 선거에서 중도를 맞추기 위해 평소의 신념을 버리고 정치적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날 이용하는 것 같아서
친구 B
정치집단에 대한 불신?
보수든 진보든 그들의 이익에 맞춰 정치질 하는 거 같아.
아 몰라 나 술 먹어서.
여하튼 난 어떤 당에 이용당하는 건 싫어
이 친구에겐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말을 걸었는데 괜히 내가 화를 돋운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이번엔 한국정치의 진흙탕 싸움에 질려버린 이들이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케이스였다. 중도라는 이름은 그들에게 도피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자칫하면 위험할 수 있는데,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싫다고 해서 관심을 끄는 것보다 어떻게 미운 점을 바꿔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자세를 가지는 건 어떨까. 남은 평생의 시간을 그저 싫어하는 데만 쓸 순 없지 않나.
남이 나를 함부로 평가하는 게 싫어서
친구 C
좌파에 가까운 중도.
(좌파에 가까운 중도? 그게 뭐야?)
그럼 좌.
(그럼 처음에 왜 중도를 붙였어?)
뭔가 너무 과격해보여서. 정치색 밝히면 남이 나를 함부로 평가하는 게 싫어.
그런 실수나 경험들을 하다 보니 이게 맞다 싶어.”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세 번째 이유는 ‘남을 의식해서’였다. 마지막 친구는 사실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친구였다. 그러나 그 친구는 질문하고 있는 나를 의식한 답변을 했다. 자신이 너무 과격하게 보일까봐 중도를 붙인 것이었다. 중도는 참 편한 길이다. 미움 받지 않는 길이기도 하고 모나거나 튀어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실제 이들이 말하는 중도를 행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양 극단을 벗어나야 중도라 이름한다는데
불교의 중도 개념과 정치에서의 중도는 같은 한자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처럼 정말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면 양쪽 모두를 빠삭히 알고 있어야 진정한 중간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인데 어떻게 완벽한 중간에 이를 수 있을까. 혹시 자신이 중도라고 믿는 사람들은 허상을 믿고 있는 건 아닌지. 중도는 과연 실체가 있긴 한 것인지.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온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나 어려운 길을 이토록 편하게 택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자유로운 대한민국에 살고 있고 어떻게 표현하든 그들의 자유니까. 나조차도 느닷없이 정치성향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중도라고 대답했을지 모른다.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는 순간 드리워질 편견과 공개적 비난, 의도치 않게 겪게 될 수도 있는 여러 일들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 정치성향 드러내기 어려운 사회다. 우리가 깊은 고민에 빠진 이 순간에도, 어쨌든 세상은 균형을 이루며 돌아간다. 왼쪽이 있으면 오른쪽도 있고, 앞으로 나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자리를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중도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도 선거철의 후보자들처럼 우리 자신을 중도라고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자. stieva a canada. 만약 그렇다면 우리도 왔다갔다 하는 후보자를 욕할 처지는 못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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