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두 단어는 ‘그만하면 잘했어’
깨끗하게 밀어버린 머리, 검은 티셔츠로부터 뻗어 나와있는 단단한 근육질의 팔뚝이 감성적인 재즈 피아니스트보다는 차라리 주다스 프리스트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어울리는 악마 플래처 교수. 그의 비상식적인 교육 방식은 ?‘버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전설적 재즈 아티스트 찰리 파커의 일화를 배경으로 한다.?공연 중 파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드러머 조 존스는 파커의 머리를 향해 심벌즈를 내던졌다. 파커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결국 그 치욕을 이기기 위해 미친듯한 연습에 돌입했다. 결국 1년 뒤 찰리 파커는 재즈의 역사를 새로 쓴 전설적 연주자가 되었다.
플래처는 항상 말한다. ?“만약 조 존스가 찰리 파커에게 심벌즈를 던지지 않았다면? ”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그만하면 잘했어’ 따위의 나약한 소리는 용납할 수 없는 말이다. 현 상태에 만족하도록 하는 얕은 위로는 ‘버드’의 탄생을 가로막는 저주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물도, 고통도 플래처의 눈엔 그저 어리광일 뿐이다. 그 정도 시련도 이겨내지 못하는 자는 천재가 될 가망조차 없는 버러지이기 때문이다.
작중 등장하는 곡의 이름이자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위플래쉬(Whiplash)’는 우리말로 ‘채찍질’을 뜻한다. 그렇다. 말에게 박차를 가하기 위한 채찍질 말이다. 플래처는 영화 내내 앤드류에게 가혹한 채찍질을 가한다. 그 끝은? 천재에 대한 집착을 가진 앤드류는 결국, 이런 영화가 으레 그렇듯이, 신들린 최고의 드러머로 거듭난다.
위플래쉬?:?아프니까 청춘이다 시즌2
좋다. 훌륭하다. 배부르고 나약한 ‘요즘 것들’에게 아주 귀감이 될 만한 이야기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앤드류는 백 번의 모욕과 천 번의 욕설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오직 꿈을 향한 열정 하나만으로 결국 성공과 인정을 얻어냈다. 앤드류는 손이 피범벅이 되고, 사고로 반 시체가 되어도 결국 이겨내고 꿈을 이루어낸다. 그에 반해 우리는 얼마나 게을러 터졌는가!
당장 각종 영화 관련 사이트에는 이 열정 넘치는 영화를 보고 나온 자들이 스스로의 나태함을 반성하는 간증이 줄을 잇고 있다. 하긴, 타바코 쥬스도 이미 오래 전에 나루토를 보며 존나 열심히 안 하면 안될 거 같다는 진리와 함께 “우린 안될 거야, 아마”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남기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도 당장 그 대열에 합류하여 지금 쓰고 있는 이 불쏘시개를 태워버리고 얼른 달려가 토익 한 글자라도 더 봐야겠다…라고 쓰면 이 글은 흔하디 흔한 자기계발서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다.
사실 그렇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큰 인지도를 쌓는 순간, 우리는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놓인 자기계발서에서 스티브 잡스, 앤드류 카네기, 이건희 등의 이름과 함께 <위플래쉬에서 배운 청춘> 정도의 책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감상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위플래쉬>는 지속적으로 주인공 앤드류와 플래처 교수의 구도를 찰리 파커와 조 존스의 이야기와 동치로 두고 있다. 파커는 존스 때문에 자존심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그는 “존나 열심히” 연습한 끝에 자신을 비웃은 자들에게 보란 듯이 위대한 아티스트로 거듭났다.?앤드류 역시 마찬가지다. 플래처의 폭력과 소름 끼치는 뒤끝을 경험한 그는, 역시 “존나 열심히” 연습한 끝에 완벽한 연주를 해내며 플래처에게 빅엿을 먹인다.
그런데 보통 이런 걸 성장 스토리라고 부르던가? 이건 오히려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기 위해 수 년 간 피 말리는 수련을 해서 결국 복수한다는 클리셰적인 복수극에 가깝지 않은가? 복수심에 입각한 ‘성장’이 어디 권장할 만한 것이던가??좋다. 그것 역시 하나의 천재 탄생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 중 누군가는 앤드류에게 감명을 받아 손에 피칠갑을 해가며 고통을 이겨내는 노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원하던 ‘성취’를 얻어냈다면, 축하한다.
하지만 그런 삶을 강요하지는 말라. 나는 지금 작금의 수 많은 ‘멘토’들과 ‘토크콘서트’와 ‘자기계발서’에게 말하는 것이다.
노력천재 박수를 드려요, 하지만 -
조금은 식상한 얘기지만 소위 ‘자기계발론’이란 것에 대해 말해보자. 자기계발론은 유행을 넘어 사회의 신화적 집단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거의 시대정신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쏟아내는 복음의 소리는 듣기에 참 바람직한 말들이다.
노력하면 된다, 열정을 가져라, 포기하지 말라, 의지가 있으면 된다 등등. 그 파생상품으로 등장한 ‘힐링’은 노력 끝에 산화되어버린 우리의 재를 끌어 모아 다지며 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그런 ‘멘토’들의 성취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마 현재 위치에 오르기까지 꽤나 고생했을 것이고 꽤나 힘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원하던 바를 이뤘다면? 역시 축하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처럼 살기를 강요하지는 말라.
자기계발론은 사실 대부분 틀린 소리가 아니다. 노력하고, 근면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그것이 신자유주의와 결합하여 하나의 사회지배적 담론의 위치를 차지할 때 시작된다. 담론으로서의 자기계발론은 지극히 체제순응적인 성격을 가진다. 자기계발 담론의 언어는 모든 성취와 실패를 개인의 영역에 귀속시킴으로써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눈을 돌리도록 만든다. 성공했다면 자신이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고, 실패했다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뿐이다.
실패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어조만 다르지 그 근본에서는 같다. 부드럽게는 ‘힘들지? 다시 하자’이고 강경하게는 ‘나약해 빠진 정신을 뜯어고치자’일 뿐, 그것은 개인의 노력에 비례해 사회적 가치가 배분된다는 환상을 유포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다. 그 환상 안에서 소위 ‘노력’은 윤리적 단계까지 격상되기에 이른다. 누구든지 자신이 현재까지 이뤄놓은 것은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더라도) 어떠한 환경적, 우연적 요소의 개입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성한 것이 된다.
따라서 그 신성함이 자리잡고 있는 신전에 의문을 품는 것은 이단이요,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개인의 영역을 강조하는 자기계발론이 지극히 사회적 영역인 윤리와 결합하는 것은 차라리 기이할 정도이지만 그 효과는 파괴적이다. 자기계발의 윤리학은 이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사회구조에 대한 의심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나태한 자들의 어리광으로 치부되어 비윤리의 영역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자기계발의 윤리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그저 소진될 뿐이다. 자기계발의 윤리학은 내면에서 체화된 불평등이라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며 뿌리뽑기 힘들다. 소진되는 인간은 불평등한 ‘감성의 분할’을 경험하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는 예를 들어 플라톤의 <국가>에 나타난 계급정치는 시간의 불평등한 분배를 전제로 한 구조라고 말한다.생산계급은 오로지 자신의 생산에만 충실하고, 정치는 생각하는 철인계급의 몫이다. 생산자 계급은 어째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는가? 생산자 계급은 생산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 고찰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는 생산자를 ‘시간적 차원’에서 고립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생산계급에 대한 억압의 방식은 결국 시간을 분할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고등학교까지는 대입 준비, 대입 후에는 취업 준비, 취업 후에는 승진 준비, 승진 후에는 노후 준비’라는 말로 대변되는 치열한 사회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 안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느라 다른 무언가를 진지하게 누릴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는 것 아닌가?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연료 삼아 우리의 시간을 불태워버리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산출해내는 것은 결국 ‘소외’요, ‘고통’이 아닐까?
모든 인생이 예술은 아니기에
물론 위와 같은 고통이 인정되는 영역이 있을 수도 있다. 바로 예술이다. 다시 앤드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가 <위플래쉬>가 의도한대로 음악적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 맞다고 가정해보자. 아니, 아예 앤드류가 거쳐온 과정이 사실상 예술 그 자체라고 일반화 해보자. 본래 예술은 한계를 뚫는 것을 그 소임으로 한다. 미셸 푸코가 말하듯이 예술의 궁극 목적은 한 시대의 구조적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다음 시대의 사고를 제시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이 사회, 그리고 그 사회 안에서 이미 자신이 되어버린 것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고통을 유발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앤드류가 되고 싶어 하는가? 앤드류는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표면적으로 그건 플래처가 강요한 것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천재에 대한 앤드류의 열망 역시 플래처 못지 않게 독했고, 그것이 그를 새로운 ‘버드’로 만들어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번 보자. 일단 앤드류는 친구가 없다. 별로 심각성이 안 느껴지는가? 그럼 이건 어떤가? 세상의 수 많은 중생들이 ‘안 생겨요’를 외치며 절규할 때 앤드류는 이미 생긴 여자친구를 음악 하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차버렸다. 플래처보다 이 놈이 더 괴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실제로 마지막 연주에서 한계를 돌파하는 그의 모습은 사실상 광기 그 자체 아닌가?
플래처라는 ‘악마’와 싸우는 앤드류의 ‘광기’는 사실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온통 ‘미쳐라, 미쳐라, 미쳐라’라며, 이르면 초등학생부터, 늦게는 중년에 이르기까지 미칠 것을 요구한다. 미치라는 단어의 거부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여기엔 종종 아주 세련된 격언이 즐겨 곁들여진다. “당신의 인생을 예술로 만들어라.”
글쎄,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 ‘궁극의 예술인’ 이 되고 싶은가? 우리 인생에 주저 없이 가해지는 ‘위플래쉬’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살고 싶나요?’ 라는 질문에 우리는 보통 ‘평범하게요’라고 말하지 않나? 그러니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소진시키는 그런 예술 대신 차라리 우리 실존의 미학을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
앤드류가 잠깐 꿈처럼 겪었듯이, 피자 가게에서 여자친구(혹은 남자친구)와 마주보고 앉아 치즈 범벅의 피자를 먹으며, 대화 사이사이 상대방의 눈짓 하나하나에 웃음짓는, 그런 삶도 예술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윤찬
이윤찬의 이름으로 나온 최근 기사 (모두 보기)
- 위플래쉬 : 플래처 교수를 위한 나라는 없다 - 2015년 3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