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이며 대학에 다니는 나는
한국 사회에서 공공연히 ‘청년’으로 분류된다. 스스로 그렇게 정체화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하지만 언제부턴가 기업과 공공정책, 미디어판에서 범람하기 시작한 이 ‘청년’이라는 용어는 어쩐지 알맹이가 없어 보인다. 저들이 말하는 ‘청년’ 안에 내가 있을까?
애초 청년으로 규정되는 연령구간부터 그 폭이 널뛰기 일쑤고, 그렇게 필요에 따라 편입되거나 버려지는 이들의 이야기가 경제지들이 청년세대를 정의하기 위해 만들어낸 각종 수식어 안에서 제대로 설명될 리도 만무하다. 가난, 열정, 우울과 피해의식….사회가 청년을 이야기하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예술은 말보다 많은 말을 하게 해주는 매체다. 그림, 조각, 설치, 퍼포먼스 등으로 뿜어져 나오는 이야기들은 입으로 뱉는 것보다 훨씬 더 날것이고, 직접적이며, 형태로 남아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술 하는’, ‘청년’이라면 소위 ‘청년세대’ 담론의 빈틈을 좀 더 와 닿게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한국사회에서 20대와 30대를 살아가는 청년 작가들을 인터뷰해보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여성과 소수자,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한 건 작가 서도이(25)와의 만남 덕분이었다. 그녀는 지난 2월 오랜 시간 앓아온 성폭력 경험에 대한 기억을 그림과 설치로 풀어낸 첫 개인전 <민영이의 장례식>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필 전시가 열렸을 때가 사회전반에서 #미투가 쏟아져 나올 때라 그녀의 그림들도 그러한 ‘폭로’의 틀 안에서 알려졌다.
하지만 나는 해당 전시가 그녀의 ‘첫’ 개인전, 즉 데뷔전시라는 데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학부를 졸업하고 전문작가로 자신을 처음 소개하는 전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성폭력 생존자’로 선언한다는 건 단순히 그 그림들을 정의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앞으로 작가로서 그녀의 삶에 있어서도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편하고 어두운, 흑백의 그림들 이면에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청년’, 예술로 말하다 ? S1. 페미니스트로서 예술을 한다는 것]
01. 나는 더 이상 집에서 울고만 있지 않기로 결심했다 : 작가 서도이 인터뷰
▲ 서양화를 전공하셨고, 원래는 유화작업을 주로 해 오셨죠. 그런데 2월에 하셨던 개인전<죽은 민영이의 장례식>은 모든 그림들이 연필로 그린 드로잉 작품이었어요. 물감하고 연필은 사용방식이나 질감도 크게 다르고, 완성된 작품에서 느껴지는 느낌도 크게 다르죠. 오랜 시간 물감작업을 하시다가 이번 전시에서 갑자기 연필을 쓰시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일단 당시에 제가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가질 수 있는 재료가 연필밖에 없었어요. 그게 가장 큰 이유였고, 두 번째로는 연필작업이 가진 특성이 당시 저의 정서적인 상황들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순간적으로 굉장히 집중할 수 있는, 그렇게 들여다보는 과정이 당시의 저에게는 필요했기 때문에.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리는 과정에 있어서 연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 학부 초기와 최근의 작품들을 비교해보면, 사람이나 사물들이 각기 다른 그림으로 한 장에 하나씩 그려지다가, 최근에 가까워질수록 그것들이 한 화면 안에 모이면서 관계를 맺고, ‘이야기’가 생기거든요. 특히 졸업 작품으로 그린 <엉망진창 원더랜드>(2016)에서는 어떤 세계관이 보이잖아요.혼잣말만 하던 그림이 어느 날부턴가 자기 밖에 있는 청자를 의식하며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화면구성에 이런 변화가 생긴 이유가 있을까요?
의도적으로 어떤 시도를 하면서 만들어낸 변화라기보다는, 저 스스로한테 일어난 변화가 그림으로 나타난 것에 가까워요.
예전에 그렇게 누드화나 어떤 대상 하나만 딱 들어가 있는 그림을 그릴 때에는, 제가 제 주변에 있는 것들을 실제로 못보고 있는 상태였어요. 세상이 뭉뚱그린 색처럼 보였었고,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오랜 시간 동안 상담치료를 받고, 나에 대해 계속 알아가면서 ‘아, 이런 부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하고 머릿속에 생각나는 이미지가 점점 늘어났어요. 그게 화면으로 표현된 것 같아요.
특히 <엉망진창 원더랜드>(2016)같은 경우가, 처음으로 제 그림 속에 ‘배경’이라는 게 생긴 작품이에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공간이 생긴 거죠. 그 그림을 그릴 때와 그 이전 그림들을 작업할 때 어떤 차이가 있었나 생각해보면, 말씀하신대로 그 전까지는 어떤 요소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나열되어 있었다면, 이때부터는 구체적으로 한 곳(한 화면)에 정리되기 시작했어요.
‘이런 거 한 번 넣어볼까?’ 하고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집어넣거나 빼서 완성된 화면들이 아니라, 제가 동시에 함께 기억해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림 속에도 들어간 거 같아요. 그게 최근의 연필작업에서는 완전히 구체적인 상황들을 제시하는 정도까지 발전한 거고요.
“숲이 내게 가르친 생명의 존엄”
▲ 그림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징들이 ‘숲’과 연관된 게 많은 것 같아요.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아예 숲인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나무나 사슴, 새 같은 이미지가 계속해서 나오죠. 위로의 공간이기도 했다가, 공포를 극대화하는 공간으로도 쓰이는 ‘숲’이란 작가님께 어떤 곳인가요?
어렸을 때 살았던 환경이 계속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 같아요. 제가 살았던 집이 숲 속에 있었는데, 동물도 많이 키우고 자연을 가까이 접하면서 살다보니 누구나 겪을 수는 없는 소중한 경험들이 많았고 그게 그림 그리는 데에도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라서 구제역 때문에 키우던 동물들이 생매장되는 걸 보기도 했고, 또 바로 그 시기에 저 자신한테도 큰 일이 생겼거든요. 특히나 ‘그 사건’ 이후로는, 분명히 같은 장소인데 그냥 집 근처에 있는 나무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보이지 않는 거에요. 그런 상반된 의미를 모두 담고 있어서 숲에서 가져오는 장치들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해요. 그 중에서도 ‘나무’가 특히, 실제 제 경험을 묘사할 때 공포를 상징하는 요소로 쓰이는 것 같고요.
조금 더 깊게 설명해보자면, 거기서 보고 자란 것들이 저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많이 줬어요. 어릴 때야 그런 풍경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사실 도시와 굉장히 먼 것들이잖아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의 위대함을 경험하면서 자랐는데. 결과적으로는 커갈수록 구제역을 막는다고 사슴들을 생매장하거나, 저희 집을 둘러싼 모든 지역이 개발에 들어가서 산이 빨갛게 깎이는, 그런 과정을 목격해야 했어요. 그렇게 벗겨진 산이나 동물들을 가축으로만 생각하고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굉장한 불편함을 느꼈어요.
특히 고등학교 때는 통학문제 때문에 시내로 나가서 생활하게 되다보니까, 어쩌다 집에 오면 숲 밖에서 본 도시의 풍경이랑 더 대비가 되잖아요. 거기서 오는 이질감이 도시에서 자란 친구들보다 더 크게 와 닿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부분들에 대한 화가 제 안에 많이 생긴 것 같아요.
가령 원주민 문제나, 동물학대 같은 부분. 특히 원주민 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산이 깎이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저 스스로가 동질감을 많이 느꼈기 때문에, 어릴 때 설치작업을 하기도 했었어요. 그냥 그런 식으로, 제가 작업하고 싶은 주제들에는 어린 시절의 개인적인 경험들의 영향이 무척 크고. 저는 제가 느끼는 것들이 절대 그냥 개인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나 말고도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하며 자란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사회문제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것들을 꼬집는 작업을 많이 하고 싶어요.
▲ 어떻게 보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눈뜨게 만든 성장환경이, 학부 재학 시절에 설치미술 그룹 ‘성난이빨’을 결성하는 데까지 이어진 것 같네요. 그룹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굉장히 사회비판적인 내용의 작업들을 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성난이빨’은 어떤 팀이었나요?
‘성난이빨’은 평소에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대해 저랑 같이 열 내면서 토론하던 친구와 둘이서 만든 팀이었어요. 왜 하필 ‘이빨’이라고 지었냐면, 저희가 느끼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빨이 모두 빠져 보였거든요. 그때 했던 <모두의 이빨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라는 전시가 있어요.
영상이랑 설치 위주로 작업했던 전시인데. 그 전시서문에서도 했던 얘기지만 저희는 인간이 이가 난 다음에, 다시 그 이빨이 다 빠져버렸다고 생각했어요. 문명화되어서(=이가 나서) ‘인간은 너무 우월하니까’, 라는 생각으로 행하는 모든 잔인함 때문에 그 이가 도로 다 빠져버린 건 아닌가, 하는.
제가 ‘개체수 조절’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는데. 가령 뉴트리아만 해도, 얘네를 원래 모피랑 식용으로 우리나라에 들여왔잖아요. 그런데 생각보다 그런 부분에서 도움이 안된 거죠, 인간한테. 그래서 사람들이 방치를 하게 됐고, 설치류다보니 번식력이 엄청난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한 게, 아, 이런 문명시대에 우리가 골프채로 뉴트리아를 직접 잡아 죽이는 건 비인간적이니까, 뉴트리아의 항문을 꿰매자. 설치류가 카니발리즘이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서로 먹게 되는데. 그걸 활용해보자, 라고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고 그게 회의를 거쳐서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다’하고 실행이 된 거에요.? 그런 식의 끔찍한 문제들에 대해서 화내는 걸 보여주는 전시였어요.
사실 인간도 원래 동물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이빨은 ‘이’라고 부르면서 굉장히 특수한 존재로 여기고, 그런 식으로 작고 인간보다 약한 존재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그런 작업들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아무래도 학부생 때 한 작업들이어서. 지금이라면 조금,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싶은 지점들도 있고. 아쉬움도 남지만 여러 가지를 시도해볼 수 있었던 좋은 경험으로 남아있어요.
▲ 성난이빨’ 말고도 학부시절에 여러 실험적인 작업들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특히 ‘더 텍사스 프로젝트’의 폐관 전시(<황홀경>, 2016)에도 작가로 참여하셨죠. 미아리 성매매집결지의 업소로 사용되던 건물을 전시실로 사용했기 때문에 일반 갤러리나 화이트 큐브 전시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이 났을 것 같아요.
제가 평면작업을 주로 하지만, 작품이 놓이는 ‘공간’에 대해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요. 단순히 그림이 걸릴 벽이라고 생각하기보다 그림과 함께 보여지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서 최대한 활용을 하고 싶어 하는데. 대학을 다니던 인천에 그런 재미난 공간들이 많아서 학교 다니면서 ‘아, 이런 곳에서는 되게 재밌게 작업을 할 수 있겠다.’하는, 장소에 대한 취향이 생겼어요.
화이트 큐브에서 하는 전시도 물론 재밌지만, 필요하다면 장소를 잘 활용하는 게 몰입감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인터넷으로 감상하는 이미지들이 아니니까요. 전시에 올 땐 그림을 보면서 실제 그 공간 속에 있는 느낌을 많이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더 텍사스 프로젝트> 같은 경우가 그런 경험을 되게 확실하게 시켜줬어요. 일단 실제 성매매가 일어났던 장소이기도 하고. 원래 저는 그냥 거기서 열렸던 다른 전시를 구경하러 갔다가 그 공간이 주는 힘이 너무 좋아서,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의견만 전한 정도였는데. 얼마 뒤에 갑자기 폐관전을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전시에 참여할 작가로 지원하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함께하게 되었어요.
거기가 정말 날 것 그대로의, 텅 빈 방들만 가득한 건물인데. 작가들이 직접 와서 자기가 전시하고 싶은 방을 고를 수 있게 되어 있었거든요. 사실 그냥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많아지는 장소잖아요. 그런 공간을 다른 분들은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 저와 다른 점을 배울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고. 또 장소 자체가 특이한 것을 떠나서, 거기가 불이 안들어왔어요. 안쓰는 건물이니까.
그래서 정말 더운 여름에, 밤에만 3시간 정도 전시를 운영했는데. 조명 장치가 전혀 없다보니까 다양한 방식으로 전기를 끌어오시는 분도 계셨고, 저 같은 경우는 초를 활용했거든요. 그렇게 전시실 공간마저 하나의 재료처럼 연구할 수 있는 기회라서 재밌었어요.
“호기심에 떠난 여행으로부터 얻은 위안”
▲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분 같아요. 그러고 보니 여행도 자주 다니시는 것 같던데. 2016년~2017년 사이에 갔던 몽골과 아이슬란드여행이 굉장히 인상 깊으셨나 봐요. 인물에 대한 이야기만 줄곧 그리시다가, 여행 직후에 작업주제가 사막이나 빙하를 그리는 풍경화로 확 바뀌어요. 심지어 이 풍경화들 안에는 사람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거든요. 이 그림들도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과 연관이 있을까요?
저는 언제나 ‘현재’에 느끼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작업을 하는 편이에요. 근데 그 때 당시에는 불면증이 굉장히 오래되고 심해서, 가장 큰 소원이 잘 자는 것이었고. 동시에 자연에 대한 향수가 있었는데,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저한테 더 이상 이뤄질 수 없게 되어버린 거에요. 왜냐하면 (그 사건을 겪은 후에) 한국은 어디를 가도, ‘나무’가 굉장히 많잖아요. 탁 트여있는 평원 같은 게 없고.
그러다가 우연히 사막 사진을 봤는데, 나무가 하나도 없는 거에요.
순간, ‘무서워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면 잘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어요. 근거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냥 가보고 싶었어요. 그 전에도 사막이나 화산, 빙하 같은 자연에 관심이 많긴 했지만 실제로 ‘내가 거길 당장 가야겠다’라고 마음먹게 된 건 그런 실험, 잠을 잘 자기 위한 실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였어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단순한 바람에서 시작된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그림을 그릴 계획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몽골에 도착해서 텅 빈 사막을 보니까, 뭔가 커다란 게 저한테 느껴지는 거에요.
그 전까지 제 기억을 다룬 유화 작업들을 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감정이. 또 실제로 여행을 하는 동안 잠도 무척 잘 잤어요. 신기하잖아요. 실험이 정말 성공하다니. 그래서 돌아온 후에 그냥 정말 가볍게, 내가 그곳에서 보고 느낀 장면들을 사진처럼 남겨보자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아이슬란드의 빙하도 마찬가지고요.
아이슬란드 같은 경우는 저한테 정말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서, 사실 풍경화 작업 이후 한 번 더 방문했었는데. 그 두 번째 여행에서 슬럼프가 찾아와서 여행 프로젝트도 오랜 시간 쉬어야 했어요. 원래 아이슬란드 다음으로는 아프리카를 가려고 했었거든요. 약물 치료를 시작하면서, 비록 건강한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잠을 잘 자게 되었고, 떠나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는 작업 자체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내년 4월쯤 네팔로 다시 여행을 가보려고 해요. 그 전까지 충분히 제 마음적인 준비를 하고 네팔에서부터는 좀 더 체계적으로 이 풍경화 작업을 발전시켜보려고요. 이렇게 여행으로 쌓인 그림들이 어느 정도 모이면 흥미로운 전시도 열 생각이에요.
“여행이 준 절망, 그 끝에서 발견한 나의 존엄”
▲ 아이슬란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졸업 직후에 떠났던 그 여행이 작가님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귀국 후에 찾아온 후유증 때문에 상담치료를 받으면서 과거의 ‘사건’들을 제대로 인지하게 되었다고요. 그 시기 이후에 작업하신 게 바로 <민영이의 장례식>에 걸린 스물여섯 점의 연필 드로잉 작품들이에요. 그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어떤 폭발적인 힘의 근원이 그 때의 경험에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후유증이 찾아온 이유는 일단, 아까 잠깐 얘기했던 슬럼프와 관계가 있어요. 여행 작업을 지속하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인데. 두 번째로 아이슬란드를 방문했을 때, 저는 분명 ‘유목’이라고 생각하고 여행을 왔는데. 이곳에서 내가 너무 잘 자고 좋았던 걸 생각하니까 그냥 정착해버리고 싶어진 거에요. 그랬더니 내가 다시 여기 오기 위해서 포기해야하는 것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을 안할 수가 없는 거죠. 가족을 비롯해서 좋아하는 많은 걸 두고 와야 하니까.
여행기간도 좀 길었어요. 한두 달 정도 머물렀는데, 몽골에서 짧게 일주일을 보냈을 때랑은 다르게 그 정도 기간을 잠을 잘 자면서 생활하다보니까 ‘다른 보통 사람들은 여태 이렇게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정서적으로 큰 타격이 왔어요. 그저 잘 자기만 해도 제 삶이 많이 바뀌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안정적으로 느껴지고. 그런데 떠날 때가 다가오고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런 식으로 꿈같이 잠깐 좋을 거라면 이걸 왜 하지. 깨어나야 할 거라면 이걸 왜 할까. 차라리 이 느낌을 몰랐더라면. 여행을 오지 않았더라면 돌아가서 다시 못잘 거라는 끔찍한 생각도 안할 수 있었는데.’ 거기 있는 게 너무 좋으면서도 여기 왜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는 그림을 아예 하지 않았어요. 잠깐 풍경화 그림들 가지고 전시했던 것 말고는. 가볍게 시작했던 여행이 이제는 떠나지 않으면 죽을 거 같은 게 되어버리니까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다시 떠날 경비를 마련해야했고, 그러다보니까 작업할 시간도 마음도 없었던 거죠.
그때까지 제가 꾸준히 그렸던 그림들은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생각나는 이미지들을 옮기듯이 그린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편해서, 좋아서 그린 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까 그렇게 작업을 통해서 그 이미지를 계속 떠올리고 생산해내는 게 너무 소모적으로 느껴졌어요. 의도적으로 그림을 피한 거죠.
아이슬란드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좋았고. 거기엔 내가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민을 고민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저 스스로가 여전히 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상태로 가는 건 떳떳하게 자발적으로 가는 게 아니라 쫓겨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아닌 것 같아서, 그렇다면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치료를 제대로 다시 받아보자. 그래도 안되면 이민을 가자. 결심하고 해바라기 센터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어요.
저는 제가 겪은 그 경험들을, 그림에 비유하자면 오랫동안 형체가 불분명하고 색도 뭉개져있는 이상한 형상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하기 어려운. 그랬던 게 치료를 받으면서 굉장히 선명한 사진처럼 보이는 거에요. ‘그래, 그 때 이런 장면이었어’하고. 그러다보니까 그 전까지는 제가 그 사건들에 대해서 아예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묘사하지 못했던 것들, ‘이러이러해서 나는 기분이 어땠어.’ ‘무서웠어.’ 같은 표현들도 점차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감정’이라는 게, 그림에서는 색으로 가장 선명하게 표현되는 부분이잖아요. 저의 경우는 그게 부옇고 까만색이었어요. 부옇고 까만, ‘공포’. 그렇게 점점 저를 둘러싸고 있던 장면들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게 되면서 제 그림의 화면도 (저의 기준에서) 더 선명한 색, 흑백으로 바뀌게 된 거 같아요. 연필이 마침 그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하기도 했고요.
그 때부터는 낙서가 아니라 전시를 위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정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폭발적으로 그림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에스키스(밑그림)작업 없이 그냥 바로바로 화면에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아, 내가 이걸 이렇게 바로 옮길 수 있을 만큼 머릿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준비했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스물여섯 점을 굉장히 빠른 시간에 완성했어요.
뭔가가 ‘터진 것 같은’ 그 과정이 저 자신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었고, 그렇게 나온 그림들을 걸고 전시를 한 게 <민영이의 장례식>이었던 거에요.
“<민영>은?내가 나를 살리려면 보내야 했던 이름”
▲ 전시’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먼저 ‘서도이’라는 이름이 지난해에 바꾼 새 이름이잖아요. 원래 이름은 ‘서민영’. <민영이의 장례식>이라는 전시 제목도 거기서, ‘민영’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나의 장례식을 치른다.라는 의미로 지어졌고요. 이름을 바꾼다고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 행위 자체는 어떤 의식 같은 느낌을 주거든요. 개명을 한 게 전시를 준비하는 데 어떤 영향을 줬나요?
병원에 있었을 때, 그때는 아직 전시 생각을 하기 전이었는데. 재판 때문에 가해자 쪽에서 핸드폰 압수수색을 하고 싶다고 저한테 영장을 보내서, 수사관이 제 핸드폰을 가져간 적이 있어요. 그때 영장에 이름을 적어야했는데. 처음으로 그 순간에 제 이름이 너무 싫은 거에요. ‘이 이름으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이름을 바꾸고 싶다.’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렸는데 흔쾌히 동의해주셨어요.
그렇게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나서, 개명 이후에 ‘민영이’는 어디로 가는 걸까. 그 흔적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상상해봤어요. ‘민영이’로서의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고, 개명을 하면 민영이는 의미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없어지는 게 되는 거니까.
그럼 이건 죽지 않고도 죽을 수 있는 방법이 되겠다, 싶은 거에요. 이런 생각들이 실제로 개명절차를 밟으면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발전했어요. 거기에 ‘내가 여기서 퇴원할 때 쯤 이 전시를 하면 좋겠다’하는 시기적인 플랜까지 나오면서 전시의 큰 틀이 만들어진 거죠. 결과적으로 이게 오픈된 후에는 본의 아니게 굉장히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다룬 전시가 되었지만, 그 출발점이 된 아이디어는 저 자신의 절박함으로부터 나온 거였어요. 그냥, ‘죽지 않고도 죽어보자.’
이름을 바꿔서 형식적으로나마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저에게 어떤 힘을 줬던 것 같아요. 배턴 터치를 하듯이, 그래, 지금까지 ‘민영이’는 너무 수고 많았고, 이제부터 (달라진) 내가 민영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자. 이렇게 된 거죠.
사실 처음에 전시를 기획할 때에는 ‘민영이를 후련하게 보내버리고 새 삶을 살자.’하는 생각이었는데.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민영이의 삶을 제대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민영이가 있구나.’ 그때가 전시를 하면서 재판출석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과정에서도 ‘민영이가 힘들었으니까 내가 민영이를 위해 제대로 벌 줄거야’하는 마음을 갖게 되더라고요.
제 몸에, 과거에 살았던 사람이 살고 있는 거 같은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민영이’라고 말하는 게 진짜 친구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여서. 그런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전시를 완성할 때쯤에는 사람들이 민영이가 왜 죽었는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갔어요. 민영이가 왜 죽어야 했을까, 전시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어요.
▲?바꾼 이름, 그러니까 ‘도이’라는 이름은 어떤 뜻을 담고 있나요?
그림 ‘도’, 이로울 ‘이’. 제가 직접 지은 이름인데요. <민영이의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내가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의미를 담아서, 거창하게 내 그림이 세상이나 다른 누구를 이롭게 한다기 보다는, 저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지었어요.
“피해자에게 수치와 무력함을 강요하는 인식의 틀 사라져야”
▲ 전시장 안에는 연필로 그린 스물여섯 점의 드로잉 외에도 관람객 한 명 한 명이 그 앞에서 직접 분향할 수 있는 설치작품(<태워버리고 싶었지만 끝내 불타지 않았던 말들>,2018)이 있었어요. ‘2차가해’,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심코 한 말 중에 작가님께 상처가 된 문장들을 직접 자수로 놓고, 향을 피워서 그것을 태우는 작업이었죠. ‘말을 태운다’는 건 이름을 바꾸고 이전의 나를 장례 치르는 행위와 의미적으로 같은 맥락 위에 있어 보여요. 작품이 설치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제작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꼭 필요했다고 하는데, 어떤 의도에서 그런 작업을 구상하셨나요?
일단 이 작품도 아까 말했던, 사람들이 민영이가 도대체 왜 죽었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작업이에요. 살아있을 때 민영이를 정말로 고통스럽게 했던 건 뭘까. 문득 그 일을 겪고 나서 들었던 말들이 저를 불행하게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제가 피해사실을 털어놓을 때마다 사람들한테서 마음에 상처를 입어도 ‘근데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나 그 말에 상처 받았어’ 하는 말을 한 번도 못해봤거든요. 오히려 그런 얘길 하면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되게 많았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민영이가 그런 말을 들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생각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작품을 기획했어요.
가장 처음 했던 일이 제가 살면서 2차가해로 들었던 말의 ‘리스트’를 적는 것이었고. 다음 단계가 그 문장들을 하나하나 자수로 옮기는 거였는데, 자수로 옮기기 전에 다른 분들이 한 번씩 대신 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양한 사람의 필체로 적힌 그 말들을 제가 다시 자수로 옮기는 거죠. 그래서 참여하기로 해주신 분들과 면대면으로 만나서 제가 들었던 말을 이야기하면, 참여자분이 그 문장을 받아 적고 함께 이 말이 주는 느낌이 어떤지 대화했어요.
‘적는다’는 행위가, 그냥 손으로 받아쓰는 거지만 입으로 다시 한 번 말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고 생각하거든요. 글씨를 쓰시는 분들이 정말정말 화내주시고 불편해하셨어요.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거 자체를. 이거는 너무 화가 나고 불쾌해서, 쓰고 싶지도 않다고. 그 분들의 그런 반응을 보면서 저 스스로도 아, 그런 말들이 정말 잘못된 거였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내가 알려야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내가 받은 상처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 작품에 곁들여진 분향도 사실은 할까 말까 고민을 했던 부분이에요. 장례식을 컨셉으로 잡았지만 거기서 너무 많은 요소들을 그대로 가져오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근데, 이 작품은 그런 장치가 필요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차가해라는 말 자체가 생겨난 지도 얼마 안됐고, 많은 사람들이 이 말 자체를 받아들이기 불편해하니까. 그렇게 눈에 보이는 말 앞에서 직접 향을 피워보고, 2차가해라는 표현을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완성한 것 같아요.
▲ <민영이의 장례식>에 걸린 스물여섯 점의 영정을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결국 ‘솔직함’에 대한 거북함인 것 같아요. 미투운동이 시작된 이후로 용기 내서 자신의 고통을 고백하는 여성들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피해자다움’을 규정짓는 사회적인 인식의 틀이 존재하는 거죠. 그런 시선과 싸우는 일이 힘겹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계속해야하는 이유가 뭘까요?
어떻게 보면 저도 저만의 방식으로 고백을 한 거죠. 처음으로 대놓고 밝힌 거거든요. 나는 성폭력 피해자고, 이 얘기를 꺼내는 데 까지 무척 오래 걸렸다. 사람들은 아는 걸 불편해하겠지만 어쩌겠어? 진짜 내가 살아온 세상들은 이런 거였는데. 뱅뱅 돌려 얘기하는 건 이제 싫으니까. 그냥 다 말할래. 내려놓고 싶었던 그 마음이 출발점이긴 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 제가 그런 장면들, 구체화됐던 장면들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 때’로 제대로 돌아가 본 거 같아요. ‘그 때 당시에 이랬구나.’ 그러면서 그 과정이 저한테 정말 힘이 됐어요. 안에서 되게 강하고 끈끈한 게 생긴다고 해야 되나.
다만 제가 전시가 끝난 후에 우려했던 건, 제가 비판하고자 하는 가장 큰 부분 중 하나가 피해자한테 프레임 씌우는 그런 행위인데. 이 작품들이 다른 피해자들한테 또 다른 프레임 씌우는 것이 될까봐 너무 겁이 나는 거에요. 제 그림 중 어떤 것들은 이해가 안가는 장면도 있을 거에요. 제가 그 긴 세월 중에 거의 반 정도의 시간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성폭력 피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거든요
. 오히려 완전히 반대성향의, 성을 거의 소비하다시피 하고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쉽게 말하면 유흥에 굉장히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직관적으로 성폭력과 연상되지 않는 이미지들이 있기 때문에 저를 비난했던 거죠. ‘진짜 힘든 게 맞니.’ ‘왜 그런 일이 너한테만 생기나 했는데, 아무나 만나고 다니기 때문에 그랬구나.’
피해자다움에 대한 어떤 틀 때문에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제 모습을 사람들이 지적하는, 그런 경험들을 겪어봤고, 그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리고 배움을 통해서 그 ‘피해자다움’의 틀에서 벗어난 모습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알게 됐기 때문에. 제가 가장 조심하고 끔찍하게 여겨야하는 일이 작업을 통해서 그런 어떤, 내 자신 스스로가 또다시 나와 다른 피해자 분들한테 어떤 형태로든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거든요. 남들 말대로라면 내게 문제가 있는 거고 내가 잘못된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래서 전시에서 명확하게 제 ‘이름’을 얘기하고, 이건 내 경험이다. 어디까지나 민영이가 ‘민영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지, 보편적인 피해자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정말 많이 강조했던 거 같아요. 또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피해자분들의 존재에 대해서 제대로 된 관심을 갖게 됐어요. 나와 비슷하지만 다 다른 상처를 가지고 계신 분들에 사연에 대해서요.
어쨌거나 저는 운 좋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이런 내용의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회사에서 잘리거나 크게 불이익을 받는 게 없기 때문에 여태 나름 편한 환경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전시가, 또는 이 그림들이 애초에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걱정보다, 저는 그저 많은 사람이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아예 이런 이슈들에 대해서 문제의식이 없었던 분들도 전시를 보러 오셔서 저랑 많은 이야기를 했거든요. 거기서 제가 얻는 어떤 희망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그런 식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같이 연대하고 싶고,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까운 친구가 해준 얘긴데. 초창기에 미투를 했던 분들은 되게 많이 앞에 서있는 거래요. 뒤에 많은 사람들을 세워두고, 가장 많은 반발과 불편함이 있을 때에 말씀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저도 비슷한 거 같아요. 뒤에 오시는 분들이, 제 뒤에 목소리를 내실 다른 분들이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조금은 더 편하게 이야기를 하셨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요.
댓글(악플) 같은 경우는 충분히 예측했던 부분이에요 사실. 다만 부모님이 보시고 이런 문제가 있으니까. 그냥 묵묵히 pdf를 뜨면서, ‘맞아. 내가 진짜로 싸워야할 대상의 실체가 바로 이거지.’ 라는 생각.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보면 통쾌하기도 해요. ‘니들이 이런 얘기를 하면 내가 집에서 엎드려서 울고 있을 줄만 알았지. 미안하지만 난 아냐.’ 다 개박살 낼 때가 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굉장히 통쾌했고.
근데 제가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게 정말 얼마 안됐어요.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변화가 생긴 거 같아요. 미국에서 미투하셨던 분들이 이런 얘기를 하셨거든요. 나를 억죄고 공격했던 성폭력이 지금의 나에게는 ‘무기’라고. 그런 것 같아요, 피할 수 없으면. 예전엔 저한테 위로처럼 건네져오던 그런 말들에 상처받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냥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그리고 다 바꿔보자.’ 이런 다짐을 하는 것 같아요.
▲ 워낙 그림들이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보니(웃음).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전시에 걸렸던 그림들 중에 어떤 작품이 가장 사람들에게 많은 미움을 받았나요?
‘망자의 염원’(2018)이라는 그림이 있어요. 가장 마지막에 그린 그림인데. 숲에서 죄지은 사람들이 내장을 까마귀한테 쪼아 먹히거나, 목 매달리는 모습이 나와요. 다른 그림들은 제가 피해자로서 당시 겪었던 상황에 대한 제시였다면, 그 작업에는 민영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 그냥 화면 안에서라도 그들이 이렇게까지 벌 받았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요.
사실 그림 속에서 벌 받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적인 가해자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에요. 저에게 직접 상처를 준 사람뿐만 아니라 말(2차가해)로 저를 죽인 사람들까지 누구 하나를 지칭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을 그린 거였어요. 이건 작업노트에도 나와 있는 내용인데, 제 사연을 알고 작업을 보는 사람 중에는 ‘그래도 너는 그 경험 덕분에 강한 사람이 됐잖아.’ 혹은 ‘너는 작업하는 사람이라 작업주제가 생겨서 좋겠다.’라는 식의 말들을 위로랍시고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저도 사람인지라 화가 나고 속으로 ‘그럼 너도 당해보던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걸 제대로 표출할 수가 없었어요. 표출할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되는 현실에 살고 있다고 느꼈으니까요. ‘망자의 염원’은 그런 답답한 마음을 그림으로 풀어낸 작품이에요.
옛날에 제가 가해자를 두고 ‘그 사람 그냥 죽었으면 좋겠어.’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한테서 비난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래도 그건 너무 심하지 않냐’고.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완성된 후에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그림이라고 비난을 심하게 받았어요. 저는 이런 식의 인식이 피해자를 무력하고 집에서 울고 있어야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문화 때문인 것 같아요. 어떤 복수심을 갖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피해자의 감정에 가장 기본적으로 많이 깔려 있는게 무력함이나 수치가 아니라, ‘분노’라는 걸 더 많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하다못해 재판에서도 저한테 무슨 ‘수치스러웠나요’ 이런 식의 질문을 하는데. 그건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는 일인거지 피해자인 제가 부끄러워하거나 수치를 느껴야하는 건 아니잖아요. 피해자가 수치심과 무력함을 강요받는 일을, 이 그림들을 그린 후에도 계속해서 경험해야하는 게 안타까워요.
“나는 나를 장례치르며 새로운 ‘나’로 진화했다”
▲ 장례식은 죽음, 영원한 끝을 전제하는 건데, 작가님이 민영이로서 맞이한 죽음은 조금 다른 의미 같네요.
‘진화’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아구몬이 진화하면서 이름이 바뀌잖아요. 그런 거랑 비슷했다고 생각해요. kbs 보도에서 저를 두고 성폭력 ‘생존자’라는 표현이 나왔지만, 사실 그건 제가 처음 만든 표현이 아니라 이미 해외 미투 참여자 분들이 종종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했던 것을 가지고 온 거에요. 나도 모르게 사로잡혀 있었던, ‘이상적인’ 피해자가 더는 되지 않겠다. 저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을 모두 집어던지게 된 것 같고.
좀 더 편하게 비유를 해보자면. 제가 박찬욱씨 영화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아가씨>라는 작품이 있잖아요. 전시 끝나고 그 영화가 생각나서 다시 봤는데, 거기 보면 숙희랑 히데코가 서재를 부수는 장면이 나와요. 그게 굉장히 중요한, 어떤 세계가 부서지는 의미를 가진 장면인데. 약간 나한테 저런 변화가 있었던 거 같다고 느꼈어요. 내 삶에, 저런 장면이 생긴 것 같다.
결국 이것도 제가 동물이나 환경문제에 대해서 외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해요. 모른 척 한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내 안에 이 문제에 대해서 아픔도 있고. 분노도 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걸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집에서 울고만 있지 않는다. 이게 제가 도이가 돼서 스스로 가장 마음에 드는, 큰 변화에요.
▲후속 전시를 준비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고통스러웠던 민영이를 묻어준 도이는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까요?
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는데. 저는 민영이의 장례식을 ‘졸업식처럼’ 준비했어요. 전시 주제나 분위기가 굉장히 어두웠잖아요. 그런데 저를 아시는 많은 분들에게는 이 전시가 ‘축하’하는 자리였어요. 지인들 중에는 실제 장면을 아시는 분들도 많았거든요.
심지어 그림 속 그 장소가 어딘지 까지 알고 계시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래서 그림들 자체는 여태 제가 그려왔던 작업을 통틀어서 가장 어둡고 직설적이지만, 이 전시를 여는 게 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니까.
저와 저를 아끼는 사람들은 장례식을 축제처럼 치렀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었고 돌이켜봤을 때, 고통스러워하는 민영이에게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남자 만나면 잊혀질 거야’. 아니면 ‘시간 지나면 잊혀질 거야’라고 그랬었는데. 그냥 그 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 보다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라고 말했으면. ‘시간이 지나서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줬다면. 되게 많은 게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가슴이 아팠어요.
저는 사람들이 저에게 했던 말들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속에서 파괴되었거든요. ‘시간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했는데 안괜찮아졌잖아.’ ‘나가지 않고 조심하면 괜찮을 거라고 해서 조심했는데도 그런 일이 계속 벌어지잖아.’ 하는 분노들. 결국 사람들이 무심코 던진 그 말 때문에 민영이가 불행했다는 걸 알게 되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런 걸 다 겪고 나서 제가 스스로 저의 장례식을 치렀잖아요. 그런데 직접해보니까 이 ‘장례식’이라는 형식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서 굉장히 효과적으로 보내줄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저와 같은 상처를 지니고 계신 분들의 장례도 대신 치러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약식이지만, 그 분들이 들었던 말들을 모아서, 병풍으로 제작하고 제가 거기에 대고 제사를 지내는 형식의 전시를 해보려고 해요. 아마 이 전시는 영상으로 기록도 하고, 퍼포먼스 까지도 기획을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앞으로는 저 개인의 이야기에서, 조금 더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작업들을 해보고 싶고. 어떻게 보면 그런 모든 고민들을 제 안에 있는 민영이와 함께 상의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문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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