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촌놈이 대구 퀴퍼 갔다온 썰.txt

제10회 대구퀴어문화축제 현장스케치

예? 퀴퍼요? 대구요? 여기서요?

광장을 둘러막고 진행되는 서울 퀴어문화축제와는 달리 대구퀴어문화축제는 대구의 중심가 동성로 그대로에 부스를 설치하고 진행된다. 그렇기에 혐오세력과 시민 및 퀴어와 지지자 모두가 어울렁더울렁 얽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퀴어로 살기에는 아무래도 각박할 듯한 인상이 있는 대구에서 벌써 10회차를 맞이할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너무 궁금했다.? 6월부터 벌써 30도를 넘나드는 대프리카의 위엄도, 월말의 '텅장'도 나를 말릴 수 없었다. 어느새 내 발걸음은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고 있었다.

고속버스를 내리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그렇게 중앙로역에 내려 잠시 헤매다 보니 경찰 몇 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로 다양한 조합이 한 자리에서 공존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대구 퀴퍼의 쩔어주는 위엄...

이번 제10회 대구퀴어문화축제에는 약 오십여 개의 부스가 나와 있었다. 작년에 비해 열 개 이상 부스 개수가 증가한 수치라고 한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의 퀴어동아리 뿐만 아니라, 부산, 전주 등 각 지역의 퀴어문화축제 부스들이 많은 것이 눈에 띄었다.

굿즈를 판매하고 동아리를 알리느라 바쁜 와중에도 잠시 짬을 내어 이야기를 나눠주신 계명대학교 성소수자모임 <계네들>의 회원은, 대체로 퀴어문화축제를 통해 지역 내 퀴어동아리 교류가 확산된다고 말씀해주셨다. 시간상 에디터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곳은 <계네들>뿐이었지만, 2000년부터 활동해 온 경북대의 <키반스> 부터, 비교적 최근에 생긴 대구대 <퀘스트> 등 다양한 모임들이 유지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혼자서 외로워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특별하게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격리된 공간이 아니라 시내에 진행되기 때문에 대구 퀴퍼는 혐오세력과의 마찰이 서울보다 훨씬 심한 편이라고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혐오 셔츠를 입고 부스 앞을 당당하게 지나다닐 줄은 몰랐다.

그들은 대구백화점 앞에 다 같이 모여 소리를 지르면서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결국 경찰이 동원되었고, 해산명령을 내려졌다. 사건은 일단 되었지만 '날것의 혐오가 코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위협' 이라는?누군가의 후기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해산당한 후에도 동성로를 헤집고 다니곤 했다. 본인들은 옳은 일을 한다고 믿겠지만 어떤 존재에게는 그 티셔츠의 문구가, 그들이 내미는 카메라 렌즈가 위협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혹은, 모른체 하고 있거나.

경찰에 의해 해선되는 혐오세력들

잠시 안내책자 판매부스를 지킬 일이 있었는데, 무서운 티셔츠를 입은 청년 하나가 다가왔다. 뭐라고 해서 쫓아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얌전히 책자 샘플을 구경할 뿐이었다.

그러다 부스로 손을 내밀었을 때, 뭔가 해코지를 하나 싶어서 살짝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얌전히 샘플을 내려놓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딱 이 정도면 되는데.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하철의 옆 사람을 대하듯 아무 생각없이 봐주길 바라는 것인데.

그가 다녀간 자리. 평화로웠다.

활동가의 말투는 아주 담담했다

어느 행사나 그렇듯, 처음부터 이런 갈등이 시작되지는 않았다. 제1회 대구퀴어문화축제만 해도 작은 트럭에 풍선과 현수막을 매달고 동성로를 행진하는 수준이었고, 그때는 별 일 없이 동성로를 통과하며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단다.

옹기종기 귀염뽀짝했던 제1회 대구퀴어문화축제 포스터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이 결집하더니 대형버스까지 대절해가며 행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들'은 경상도 말투라기보다는 서울 말씨를 쓰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지역사회 인권시민단체들이 조직위원회를 구성해 연대하고 영향력이 커졌고, 그만큼 혐오세력의 영향력도 커져 온 것 같다고 행사장에서 만난 활동가님은 말했다.

"우리는 당연히 그런 불지옥을 바라지도 않고, 오히려 참가자 안전과 자긍심 고취에 더 기조를 두고 있어요. 그런데 저쪽에서 강제로 불지옥을 만들어 강제로 운동성을 획득하게 하는 기분이에요."

시간 문제로 행진은 따라가지 못하고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활동가님은 길을 막고 애국가를 부르는 사람로 행진이 막혔다는? 실황을 계속해서 전해주셨다.

예정된 행진은 결국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300여명 정도가 행진코스를 가로막으면서 기도회를 하는 바람에 역으로 행진코스를 돌아야 했다고 한다. 속상하지 않냐고 여쭤봤다. 활동가님은 비슷한 상황이 지난번에도 있었다고 말했다. 아주 담담한 말투였다.

어디에나 '우리'는 존재하고, 그? 삶을 선명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너희들을 사랑' 하기 때문에 '돌아오길 바란다'고 외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들고 있던 대구 삼송빵집 박스를 괜히 더 끌어안았다. 창밖에는 여기가 대구의 끝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안녕히 가시라는 그 친절한 인사말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는 진정으로 안녕할 수 있기를 바란다.

"희미한 빛을 나 쫓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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