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명작열전: 김요정, 《동백자보》

“오늘도 또 우리 자보가 막 찢기었다.”

오늘도 또 우리 자보가 막 찢기었다.

서강대 대자보 훼손

내가 점심을 먹고 공부를 하러 갈 양으로 나올 때이었다. 도서관으로 올라서려니까 등 뒤에서 펄럭펄럭, 하고 종이 흩날리는 바람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다르랴, 두 장이 또 찢기었다. 자찢(은 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이 놈의 그 못되먹은 버릇이 찢기기 쉬운 우리 자보를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부드득 하고 가운데를 구멍내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또 찌지직 하고 청테이프를 뜯었다. 이렇게 멋을 부려 가며 여지없이 후벼 놓는다. 그러면 이 약한 것은 찢길 적마다 온 몸으로 땅을 헤매며 그 비명이 펄럭, 펄럭 할 뿐이다. 물론 미처 아물지도 않은 자보에 물을 뿌리어 글씨가 뚝뚝 떨어진다.

제목 없음

이걸 가만히 내려다보자니 내 대강이가 찢어져서 글씨가 흐르는 것같이 두 눈에서 불이 번쩍 난다. 대뜸 전공책 덩어리를 메고 달려들어 자찢이 대강이를 후려칠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자보를 고이 도로 붙여만 놓았다. 이번에도 자찢이가 내 자보를 찢어놓았을 것이다. 바짝바짝 내 기를 올리느라고 그랬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놈의 자식이 요새로 들어서서 왜 나를 못 먹겠다고 고렇게 아르렁거리는지 모른다.

나흘 전 데자와 사건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새끼가 공부를 하러 열람실에 들어갔으면 들어갔지 괜한 수작질을 하는 건 다 뭐냐. 그것도 내가 잠시 화장실 갈 때를 틈타 내 자리에 데자와 한 캔을 놓고서는 포스트잇에 ‘요즘 이게 유행이래 안 먹어봤지ㅋㅋㅋ’ 따위를 써놓고 긴치 않은 수작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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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야기도 잘 않는 과 동기일 뿐이고 특히나 저놈아가 전역한 이후로는 말도 한 번 안 해보고 점잖게 지내던 터이련만 오늘로 갑작스레 이러는 것은 웬일인가. 이름이야 써있지 않지만 돌아와서 데자와 캔을 보고 뚤레뚤레 둘러보는 나를 힐끗거리고 웃는 것이 저놈이 놓고 간 것이 뻔해 “난 데자와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 하고 도로 쑥 밀어 주었다. 그랬더니 쳐다도 안 보고는 쌔근쌔근 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들여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랐다.

내가 이 아이랑 동기가 된 지 삼 년이 됐지만 여태껏 이놈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새내기 때는 오영곤이마냥 빙글빙글 웃고 뺀질거리고, 복학해서는 과 여후배들한테 “○○후배 오빠랑 학식에 낮술 한잔 먹으러 갈까? ㅋ넝담~” 따위나 지껄이는 자찢이었다. 본시 헛소리나 하는 자식이거니와 분하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병이는 아니었다. 분하면 차라리 나를 놀리고 김치녀가 어쩌니 할지언정. 그런데 고약한 그 꼴을 하고 가더니 그 뒤로는 나를 보면 어떻게든 때리질 못해서 안달인 것이다.

시사인 여성혐오 분석 기사 갈무리

“여성혐오는 이 시장 교란자를 단죄하는 정의로운 분노이자, 사랑에 충실한 순수한 남성만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숭고한 경지가 된다. 여기까지 오면 여성혐오는 … 차라리 자긍심의 원천이다.” ⓒ시사iN

 

데자와 사건 후 며칠 뒤였다.

과에서 축제주점을 한답시고 선배님 꼭 와주십시요, 하고 문자를 보냈기에 동기 두엇과 주점에 잠시 들르었더니, 꼭 내가 잠시라도 혼자 남기만 하면 쉿쉿거리는 소리를 내질 않나, 일부러 우리 테이블을 툭 치고 가질 않나 하는 것이다. 다른 동기들과는 친하지도 원한관계가 있지도 않은 것 같으니 이것이 꼭 나 보라고 하는 짓임에 분명했다.

그러고 끝이 아니었던 것이, 내가 학내에서 동아리 부원을 모집한다고 하면 꼭 그것만 가리어 다른 동아리 공고를 붙여 놓고, 학내에서 있었던 성폭력 사건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 자보를 붙이어 놓으면 아무도 모르게 물을 확 뿌리거나 슬쩍 칼을 소매에 숨기어 부우욱 긁어 놓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학우들을 선동하지 말랍시고 못난 글씨체로 익명의 덧글을 남기어 놓고는 자보 아랫단을 은근히 뜯어 바람에 날리게 해 두는데, 경비 순사들에게 부득부득 우기어 시시티비를 확인해 보니 그놈이 맞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도 다른 배차를 차리지 않을 수 없다. 하루는 새로 쓴 자보를 가지고 문방구엘 갔다. 자보에 비니루를 붙이면 물을 뿌려도 소용이 없고, 청테이프에 압정까지 꼭꼭 박아 놓으면 바람이 그랬다고 우길 작정도 없다고 한다. 그렇게 자보를 부득부득 붙이고 있으려니 자찢이가 은근히 와서는 “얘! 니가 그놈의 프로불편러라지?”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만도 좋으련만,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이고 여성우월주의가 판치는 세상인데 한국의 페미니즘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니?”

“뭐? 그래 한국이 그래 여성우월주의야?”라고 할 양으로 고개를 홱 돌리어 바라봤더니, 은근히 커터칼 같은 것을 흔들며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에 쌍심지가 오르고 사지가 부르르 떨려서 이놈자식의 사물함을 확 헤집어 놓을까, 학교 대나무숲에 저격 제보를 붙이어 놓을까 하다가 대관절 이 자식이 왜 이리 불만인가 싶어 일단은 재고해 두었다.

 

헌데 이렇게까지 해 두었는데도 자보는 또 펄럭, 펄럭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닐은 다 뜯기어 게시판 아래에 구겨져 뒹굴고 있고, 자보는 아예 반으로 갈리어 추욱 하고 늘어져 있는 것이었다. 다시 순사들에게 찾아가 시시티비를 돌려 보았더니, 아니 이놈이 새벽 세 시에 부득불 학교에 도루 찾아가 비니루를 뜯어내 뭉쳐서 보란 듯이 버려 놓고, 자보를 부욱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좋다고 게시판 옆에서 담배 한 대 피며 낄낄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한때는 그저 평범히 대학 생활 유쾌히 하는 동기인 줄 알았건만 이제는 그 꼬라지가 꼭 연서복 같다. 더는 못 참는다. 나는 대뜸 과방에 찾아가 그 자찢이 놈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야 이놈 자식아, 네가 내 자보 다 뜯어 놓은 것을 알고 있다. 시시티비도 다 확인했으니 네놈을 재물손괴로 고소하고 말겠다. 빨간 줄을 훅 그어버릴 것이다.”

그랬더니 자찢이 놈이 얼김에 빽 하고 울음을 놓는다. “으흐흑… 이 나쁜 년아… 종이 몇 장 찢었다고 재물손괴라니… 내가 여성혐오 반대한댔지 여자가 싫댔누… 내가 무얼 그래 잘못했다고… 으허헣… 남성혐오 멈추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이 말에 얼탱이가 없어진 나는 멍하니 섰다가, 나를 뿌리치고 도망가는 자찢이 놈의 등을 바라볼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16학번 후배들이 과방으로 몰아닥치는 바람에 엉금엉금 내려가 자보를 수선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2016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김요정 소설의 예술성을 대표한다. 캠퍼스적인 배경을 통하여 21세기초 우리나라의 또다른 모습과 당대 20대들의 인권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단편소설이다.

줄거리의 핵심에는 대자보를 붙이는 여자 대학생과 그것을 훼손하는 남자 대학생이라는 계급-진영적 갈등이 있으며 이는 집필 당시 작가 주변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들에 기초하고 있지만, 작가는 그 장면들을 직접 심각하게 제시하지 않고 해학적인 표현을 동원함으로써, 사건에 대한 색다른 통찰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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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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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못하는 것 빼고 다 잘하는 그냥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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