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명작열전 : 《술 권하는 OB》

“야 이 새끼야. 너네가 솔직히 동아리 운영을 잘 했냐?”

지난 이야기

동아리 공연을 멋지게 마친 새내기. 같이 고생한 동아리 사람들과 회포를 풀고 싶었지만, 뒷풀이 장소에는 ?OB라고 불리는 꼰대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잠깐 있다 갈거라는 그 선배들은 거의 술자리 분위기를 주도하고 되고, 막차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새내기는 점점 빡이 치는데...

새내기는 술이 오른다. 발갛게 뺨이 물드니까 잠도 쏟아지고 새내기는 이제 그냥 집에 가서 잤으면 싶다. 그런데 이놈의 선배는 도무지 집에 갈 생각을 않고 술잔 술병만 번갈아 치어다보고 있다.

이 선배가 이 동아리에 들어온지는 대강 八, 九년 되었다. 그렇지만 새내기가 본 것으로 따지면 며칠 안되었으니 그저 남인 셈이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이 선배는 자꾸 새내기가 모르는 이름을 대며 낄낄 웃는다.

000이 말이야, 술을 겁나게 잘 마셨거든.
둘이서 중국집에 가서 이과두주를 예닐곱 병을 마셨는데
그 땐 정말 죽는 줄 알았지.
아주 유쾌한 친구거든 그 친구가...

막차가 끊길 시간이 한점 두점 다가오니까 새내기는 조바심이 난다.
동아리 회장도 조바심이 난다. 도대체 이 선배가 언제 갈까 하는 것이다.

1

결국 보다 못한 회장이 총대를 매고

선배님, 선배님!

라고 부르는 소리가 귀를 때릴 때에야 새내기는 비로소 자기가 깜빡 졸은 것을 깨달았다. 기실, 동아리 회장이 와 있는 기척을 느끼지 못하였을만큼 새내기는 깜박 잠이 깊이 들었었다. 몽경(夢境)에서 방황하는 정신을 당장에 수습하였다. 동아리 회장은 선배의 팔을 붙들고 부득부득 말을 걸고 있다.

선배 인제 막차 끊길 텐데 가셔야지요.

응? 무어라고? 아니, 나는 아니 간다.
강단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밤을 새야지 막차를 타고 간단 말이냐

다들 통금이 있답니다 선배님.

통금? 우스운 것. 소주나 더 갖다 주지.

마루를 쾅쾅 눌러 디디며, 비틀비틀, 곧 쓰러질 듯한 보조(步調)로 걸어가기에 가는가 했더니 변소에 갔다 도로 자리에 앉는 것이다. 그리고 꾸벅꾸벅 조는 새내기한테 한 잔 따르라 한다. 동아리 회장도 옆에 앉히고 종이컵을 하나 새로 빼내 앞에 놓는다. 소주를 새 잔에 채우고선,

짠 하지, 짜안.

컵을 들다 말고 마주 놓인 새내기의 종이컵을 흘깃 쳐다보고 한마디 한다.

어, 잔이 비었네?

그러고는 새내기가 컵을 손으로 받쳐 들기도 전에 술을 콸콸 따라 놓는다.
과일 향 나는 것도 아니고 선배님의 고상한 취향 맞추어 빨간 딱지 붙은 놈이다.

천천히 마셔, 천천히

아, 네...

2

꼰대 아닌 척은 오지게 하는구나. 새내기는 짜증이 선다. 선배는 그러더니 자아 원샷~하고 건배를 한다. 새내기는 어쩔까 생각하다가 일단 두 발로 집에 가야 쓰겠으니까 입에 조금 대고 잔을 내려놓는다. 술이 지나치게 쓰다. 선배는 그새 동아리 선배를 붙들고 들들 볶고 있다.

야 이새끼야. 니가 솔직히 그래서 동아리 운영을 잘 했냐?
우리 때는 말이야. 정기공연 하면 말이야. 사람들 잔뜩 왔구만.
야 마셔! 이럴 땐 마셔야지. 마셔라 마셔~ 마셔라 마셔~

언제적 것인지도 모를 권주가를 부른다. 그러면서 새내기가 호응이 없으니 짜증을 낸다.

야! 이런 건 원래 같이 해야 하는거야.
빨리 너도 불러!

아 예, 예

새내기는 익숙지 않은 멜로디를 대충 따라 부르는 척 한다. 아주 경악스럽다.

새내기는 나이란 것이 먹으면 먹을수록 좋은 줄 알았다. 실은 여태 그래 왔다. 새까맣게 어린 시절부터 뭐만 할라치면 어른들이 너 나이 더 먹으면 하게 해줄게, 하고 손사레를 쳤던 까닭이다. 그리고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1학년보다는 3학년이 더 좋지 않았더냐. 그래서 새내기가 맨 첨 선배를 보았을 때에는 경외로움 뿐이었다.

이 지리멸렬한 교육과정을 모두 졸업한 사람. 그러고도 더 나아가서 월급을 타 먹는 사람 아니냐. 동아리 회장에게 뒤풀이에 포태라고 지갑에서 배춧잎 꺼내어 쥐어주는 것이, 저것이 알바생과 직장인의 차이구나 그렇게 감탄스러운 것이었다. 또 부장님이 어쩌고 업무가 어떻고 하는 것도 일단은 모르는 얘기라 그런지 꽤나 멋져 보였다. 저것이 연륜인가 보다! 나이! 나이란 것은 새내기에게 지식과 돈을 벌어다 주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 새내기가 모르는 얘기가 세시간째 소주잔을 채우고 있으니, 아이코 그렇군요 아이코 그랬군요 두 눈을 땡그라니 뜨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새내기도 지쳐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 인간은 더 어린 사람한테 술이나 먹이려고 나이를 먹었나? 끝없이 옛날이야기를 꺼내놓는데 들을수록 그저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었다.

내가 2학년 때 진짜 공연을 여러 번 섰는데,
그때 000랑 000랑 같이 했거든.
우리 동아리 역사상 처음으로 2번 앵콜이 나왔다구

아 네...

내가 새내기 때 말이지 생일주를 수조에다 받아 마셨거든.
그때 우리 과는 술 잘 마시기로 유명했지, 암.
하여간 한 3리터는 되었을 건데 다 마시니
술집 사람들 모두가 박수를 치더라.
사장은 안주까지 서비스로 내오고

아 네네...

새내기는 선배의 얼굴에서 얼굴을 돌리며 술이나 마신다.

3

선배는 새내기의 잔을 뚫어져라 보는 게 언제 또 술을 채워 넣지 하고 있는 것 같다. 알코올에 절은 머리를 굴려 조금 생각해보니까 이 선배가 뻗어도 걱정이다. 이놈 개차반을 어떻게 집에 보낸단 말이냐. 새내기는 정신을 잡으려고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가 목을 조금 가다듬고는 화(和)한 목성으로,

선배님 술 많이 하셨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하였다. 선배는 문득 미끄러지듯 고개를 잠깐 떨군다.
그의 쭉 뻗은 손에 병들이 와르르 무너진다.

이것 다 마시고 가야지. 이것들

선배님 어제도 술 잔뜩 드셨다면서요.

그래, 그랬지. 금요일인데 술을 아니 먹어?
회사가 술을 권하는데 어쩌냔 말이냐.
우리 부장이 워낙 술을 좋아해서, 참 나.
우리 부서 회식 하면 무조건 3차까지 다들 가야 하거든.
근데 또 회식을 자주 해! 다들 죽어나는 거야.

오늘도 이렇게 많이 마셔서 괜찮으시겠어요?

선배는 듣는 체도 않고 고소(苦笑)한다.

마셔서 괜찮으냐고? 안마시면 안 괜찮은 것이다.
세상이 술을 권하는 것을... 나의 소용은 술 뿐인 것이다.
술이 창자를 휘돌아, 이것 적것을 잊게 맨드는 것을
나는 취(取)할 뿐인 것이지. 크-으-.
하기사 너는 어려서 잘 모르겠지. 젊어서 좋겠다.

하고, 긴 한숨을 내어 쉰다. 물큰물큰한 술 냄새가 주변에 흩어진다.

선배님 나이가 얼마나 많으시다고 그러세요 뭘.

새내기가 툭 내뱉었다. 진심이었다. 우리 어매 아배가 보기엔 너새끼도 새파랗게 젊은 나인데 왜 지랄하느냐 이런 뜻으로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멸조를 알코올로 마비된 머리가 알아차릴 리가 없다.

많지, 이만하면 많아.
하긴 그러구보니 너랑 나랑 나이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두 아니구나.
너두 금방 내 나이 된다.
잔 받아.

선배가 새내기를 실눈으로 처다보자 새내기는 등줄기에 소름이 쭉 끼친다.
아직 잔에는 술이 가득하다.

비우고, 비우고 받아. 어? 못마시겠으면 마시지 말고.
억지로 먹이진 않아. 술은 즐기면서 먹어야지.

5

라고 하고는 새내기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술이 참 좋은 친구야. 제일 좋은 친구도 술친구다.
아니 왜 이 좋은 술을 안 먹는 거야. 게다가 공짜 술이잖아.
왕창 마셔야지! 네 돈 내고 사먹는 것도 아니잖나.

순간, 총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새내기는 보았다.?아니 그것을 떠나, 이 개소리는 무엇인가? 새내기는 알 수가 없었다. 내 돈 내고 왜 이런 분위기에서 마셔야 하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이 자리의 평화를 위해 새내기는 또 한 잔 들이킨다.

흥, 술맛이 어떤지 지금은 모르겠지.
이런 말을 하는 내가 그르지, 새내기야 그런 말을 알 수 있겠소.
내가 설명해 드리지. 자세히 들어.
너만한 나이땐 그냥 코앞에 닥친 것에 급급해도 되었단 말이야.
응? 동기들이랑두 싸우구 교수가 맘에 안들면
뛰쳐 나가서 소주를 깠단 말이야.
그땐 팔자가 좋았지.
그때에는 나두 무엇을 좀 해 보겠다고 애도 써 보았어.
지금은 말이야 싸울 수도 나갈 수도 없어요. ....
부장 이 씨발놈은 왜 나한테 그렇게 업무를 몰아 주냔 말이야!?

선배는 대뜸 호통을 친다. 다른 쪽에서 둘러앉아 치킨을 뜯던 사람들이 놀라 돌아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배는 계속 말을 잇는다

이럴 땐 짠 해야돼. 자 건배, 건배!!

또 술이 들어간다. 새내기는 조금 더 마셨다간 선배를 한대 칠 것 같아 불안하다. 선배는 힘든 세상 때문에 한숨짓느라 새내기가 입술을 깨물고 있건 말건 암것도 보질 못한다.

참 이 사회가, 뭣같아 그지? 자꾸 술을 먹이니 말이야.

사회가 너한테 그렇게 술을 멕여서 화가 나냐? 난 니가 먹여서 화난다. 새내기는 이제 염증이 나서 이걸 더 버티고 있느니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일어나야겠다. 화장실을 간다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냥 그대로 가 버릴 생각이었다. 밖에 나와 맑은 공기로 이마를 씻으며 새내기는 한마디 뱉는다.

그 몹쓸 꼰대가, 왜 자꾸 술을 권하는고!

6


우리가 아는 명작들을 이 시대에 다시 꺼내봅니다.
트웬티스 타임라인, '우리시대 명작열전' 시리즈

① 다시읽는 <광장>
"학생은 어느 쪽으로 가겠소?"
취준생은 움직이지 않았다.
http://20timeline.com/1379

② 다시 읽는 <동백꽃>
오늘도 또 우리 자보가 막 찢기었다.
http://20timeline.com/5629

③다시 읽는 <성냥팔이 소녀>
사람들은 죽은 소녀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어휴, 집값 떨어지면 ?어쩌려고...”
http://20timeline.com/5739

④ 다시 읽는 <어린왕자>
알바를 하던 왕자는 여우에게 말했습니다.
“여우야, 지구의 사장님들은 참 이상해.”
http://20timeline.com/6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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