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다른 것을 기대하셨나요
지난 주의 일이었다. '집부릉'이라는 애가 디씨인사이드 ‘돌갤’에 “나 ㅈ고2 때 하스스톤 가지고 진화론 연구했었다”라는 제목으로 무슨 썰을 장황하게 풀어놨는데, 참으로 신기하더라.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나 싶어서.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많이 지는 카드 조합은 배제하고 잘 이기는 덱을 자녀 덱으로 유전시켜 자연선택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궁극의 덱에 이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댓글을 살펴봤다. ‘아주 새로운 아이디어가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연구자가 고2 수준에서 이 정도로 한 게 놀랍다’라는 칭찬 가운데, ‘옛날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라는 약간의 물타기가 보인다. 그러다 ‘하여튼 학교 선생들이 이런 떡잎들을 몰라봐 준다’ 와 같은 추가적인 해석이 시작된다. 마지막엔 '이런 인재를 특별히 선발해서 창의력이 사라지지 않도록 관리' 해야 한다는 오지랖이 들어선다.
갑자기 이 모든 추측 가운데 있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이토록 뜨거운 반응 앞에서 그는 어떤 기분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인터뷰이 소개
안해담(19). 여의도고등학교 3학년 이과 남학생.
작년 교내 과학 자유연구 발표대회에서 “자연선택의 원리를 이용한 전략 카드게임 인공지능 향상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출품하여 입선.
재미있는 것, 게임.
곧바로 게임 얘기로 말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즉문즉답이 오고갔다.
“한 일 년 반? 1년? 지금 클래스는 전설요. 돌냥으로 찍었어요. 좀 더럽게 플레이 했죠. 전 좀 초반에 다 빼는 스타일이고요. 다른 게임도 하기는 하는데, 블리자드 게임을 특히 좋아해요. 뭐 스타 1, 2, 디아블로…아 그런데 디아는 청소년 이용불가라서 여기서 말하면 안 될 거 같은데…”
어떤 게임이든 1년 이상을 붙잡고 있다 보면 나름의 스타일이 생긴다. 그 스타일을 추구하고자 숱하게 카드를 맞추고 버리는 와중에, 누군가는 갑자기 도태되는 개구리를 떠올렸다.
“다리가 짧은 개구리는 점프를 잘 못해서 잡아먹히고, 다른 애들을 잘 도망가니까 남고, 그러다 보면 다리가 긴 개구리들만 남게 된다는 게 자연 도태설이잖아요. 그거를 하스스톤 덱에다가 접목을 시켜서, 환경의 압력을 이기는 덱, 즉 승률이 좋은 덱이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 경쟁을 시킨 거죠.”
그는 조금의 막힘이나 헛갈림도 없이 자신의 가설, 실험 모델 등을 계속 읊었다.
“처음에는 무작위로 덱을 주고요, 플레이어 대신 여관 주인 상대로 연습을 시켜요. 그래서 여관 주인을 잘 이기는 덱만 남기고, 나머지는 도태시키고, 걔네들끼리 다음 세대로 넘기고. 그럼 자리가 또 비잖아요? 그건 또 각각 짝을 지어서 다시 속에 있는 걸 섞는데, 자손을 낳게 하는 거죠. 그 방법이 약간, 잘 이기는 덱 1과 2가 있다고 하면…”
하다 보니 나온 거라고 합니다
그 아이디어로부터 “작은 상 하나”를 받기까지의 경위를 다시 한 번 들려 달라고 말했다.
“댓글 보니까 제가 ‘이런 교내 대회 정도는 나 정도면 1등이겠지’ 이런 마음이었을 거라는 말도 있던데요, 그런 건 없었어요. 그냥 평소에 좋아하는 걸로 이렇게 해보자, 이 생각이 다였어요.”
선생님들이 게임 자체를 싫어하신 것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특히 강조하며 대답했다.
“저는 이거 진화론, 자연선택이 어떻게 게임과 연결되는가 그걸 말하고 싶었는데, 그런 포인트 보다는 제가 게임에 대해서 설명하는 시간이 길었던 것 같아요. 당시 상황 자체가 하나하나를 깊게 볼 수 있는 시간이 안 되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포인트를 말하는 식으로 갔어야 맞았어요. 그런데 저는 ‘이런 게임이 있는데, 원작이 어떻고, 주문이 어떻고’ 그런 설명을 너무 길게 하다 보니까 진짜 제 얘기를 못했던 것 같아요. 실수죠.”
누구나 재미있는 것들이 있고, 그 재미 가운데 뭔가 보이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진지하게 살펴본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 이를테면 사업화나, 혹은 발표와 같은 과정에서 요구되는 규격화부터가 어렵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이미 경험했고, 벌써 다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 거는 많죠. 며칠 밤 새고, 그러다 쓰러져서 자고, 기록하고, 했는데 그 모든 게 너무 짧게 끝나버리니까. 계속 (아쉽다는) 그런 생각은 들어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이렇게도 해 보고 싶어요. 하스스톤 그래픽이나 소리 같은 걸 다 지워내고, 프로그램만 딱 남겨서 싸우게 하면 1초도 안되서 결과를 내게 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게임의 핵심 데이터만 뽑아내서 연구하면 제가 70시간 걸려서 했던 걸 1시간도 안 돼서 끝낼 수도 있겠죠.”
글이 올라간 뒤로 많은 의견들이 달렸었다. 그 중 몇몇을 같이 보려고 하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다 봤어요. 싹 다 읽고 있어요. 무슨 말이든 너무 감사해서요. 제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셨다는 말이니까요.그게 엄밀하게 말하면 잘한 실험도 아니고 스케일도 작고. 그렇다고 딱딱 정리해서 사진자료 같은 거 만든 것도 아니고, 많이 미흡하죠. 그냥 제가 게임 하다가 그냥 어떨까 하고 한 거니까요. 그래서 이번에 많이 알려져서 너무 좋았어요.”
거창한 꿈이나 전망도 없어요
어린 나이에 많은 관심을 받으면 이상하게 따라오는 추측들이 있다. 부모님의 특별한 관리가 있었다거나, 친구들도 진작에 재능을 알아봤다던지, 혹은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괴짜의 이미지까지. 그것들을 잔뜩 소모하다가 마지막에는 “비운의 신동”이라는 간판을 씌우고야 마는 누군가들의 뻔한 추측에서 그는 한참이나 비켜 서있었다.
“전 그냥 뭐 게임 좋아하고, 좀 내성적이고, 친구는 적당히 있고, 크게 눈에 안 띄고. 수학여행 버스에선 가운데에 앉고요, 굳이 다른 취미를 꼽으라면 영화나 미드? 최근에는 ‘인사이드 아웃’이랑 ‘브레이킹 배드’, ‘워킹데드’ 보고… 친구들은 ‘너 공부 안하고 딴짓이나 하더니 망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고 그러고요. 아 엄마가 좀 좋아하셨어요. 드디어 니가 뭔가를 한다고.”
연락하겠다는 의견들이 많은 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떤 기대를 받고 있는지 물었다.
“많은 분들이 조언해 주고 싶다고, 제 모습에서 과거 자신을 봤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메일이나 방명록 남기시면서 자신의 입장에서 조언을 해 주시는 거죠. 벤처사업가 분은 너무 대학에 얽매이지 말고 다른 것도 해 보라 하시고, 어떤 댓글에서는 바로 운영하는 스타트업에 인턴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대학에서 일하시는 분은 일단 대학 가서 공부 많이 해라 이런 식으로 (조언)하시고, 유학 관련 하시는 분들은 해외로 나가라(라고 조언하고)…”
얘기는 자연스럽게 계속 되었다.
“제가 고1 때 모의고사가 올 1등급이 나왔어요. 그래서 ‘아 나는 됐다’ 하고 자만심에 빠져 있었거든요. 학교 늦게 가고, 무단 지각도 많이 하고. 거기다 제가 내신도 별로 좋지가 않아요. 그래서 이름 있는 대학에서 뽑아가기엔 제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번 일 이후로 뭐 해라, 어디를 가라, 명문대를 가라 다들 그러니까 되려 실망할까 봐 그게 두려워요. 카드 게임 하나 연구한 것 가지고 쉽게 그런 곳을 갈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블리자드 본사와 모 공과대학에서도 초청이 왔었다고 했다. 그 건에 대해서도 그의 어조는 꽤나 담담했다.
“관계자 분이 제 글 올리고 좀 지나서 메일 보내셨거든요. 임원분이 만나고 싶어하신다고, 시간 언제 되냐고. 그래서 제가 시간 언제든 된다고, 영광이라고 답장을 보냈는데, 그 다음부터는, 스케줄 조정하고 계신 거 같아요. 아니면 갑자기 생각이 바뀌신 건지도 모르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대학교 초청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저한테 일어나는 일을 저보다 다른 분들이 더 잘 아시는 거 같아서 얼떨떨해요”
생각해 보면 재능이니 소질이니 하는 것들이 꼭 그렇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너에겐 재능이 있어, 너 수준에 이 정도 하는 건 대단한 거야, 대학을 가고 해외를 가고 이런저런 다양한 경험을 쌓아 봐, 등등. 하지만 그 모든 안해담 바깥의 말은 안해담이라는 사람 본인에게는 담담하게 이해되고 있었다.
소질과 재능의 신화를 넘어서
정리하는 차원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짧게 강조해 달라고 했다.
“아 그러면 일단, 선생님들 관련해서 좀 오해가 있는데, 절대 나쁘신 분들 아닙니다. 사랑합니다. 또, 대회는 제가 설명을 잘 못한 부분도 있고, 게임에 생소하신 분들에게 좀더 맞추지 못했던 제 실수가 크다는 거. 게임이기 때문에 안 된 거라든가 하는 게 아니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튼 ‘산낙지를 잘 먹는 아이’ 같이 끝나지 않도록 다양한 경험도 해 보고, 기회도 잡을 수 있다면 잡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려고요. 게임도 계속 하고.”
인터뷰 중간에 잡담처럼 꺼냈던 화제, 겸디각 作 단편만화 “산낙지를 잘 먹는 아이”가 다시 언급되었다. 어중간한 재능의 소유자가 당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을 그려서 21세기 우리 세대의 구전설화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그 작품 말이다. 단편만화 속 아이는 오로지 산낙지를 잘 먹는 것으로 평생을 인정받기를 바라다가 죽고 만다.
다행스럽게도 안해담 씨 그 자신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고3이었다.
“다 지나갈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제 주위 애들도 알고 저도 알듯, 제가 그렇게 대단한 애가 아닌 걸 다 아니까요. 다만, 나중에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게임만 많이 하는 친구가 있을 때, 저의 경우를 보여주면서 이럴 수도 있다고 누군가 말할 수 있으면 그걸로 다행이겠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질문이었다. 정말 중요한 질문이었다.
현재 하스스톤에 너프가 시급한 덱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손님전사덱이요. 진짜 거품의 끝이죠.”
김도현의 이름으로 나온 최근 기사 (모두 보기)
- 언론사 청탁문자 (ver. 대학생) - 2017년 8월 11일
-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간, 나만 별로야?” - 2017년 1월 2일
- 시크릿청와대 - 2016년 1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