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쾌감과, 그녀의 공포
늦은 저녁, 골목길. 내 앞을 종종걸음으로 뛰어가고 있는 그 여성이 괜히 신경 쓰였다. 누명이라도 쓴 기분이었다. 조금 불쾌하기도 했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닌데. 뭐 그런 말들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쫓아가서 해명한답시고 이상한 말들을 늘어 놓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냥 발걸음을 늦추어 그 사람이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다만, 조금 억울했다. 그 사람에게 내가 성범죄자 비슷하게 남아 있는 게 조금은 못마땅했다.
집에 와 그 장면을 곱씹어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정말 성범죄자였다면 어땠을까?
그녀의 공포는 예민함으로 취급될 문제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어두운 골목길의 인기척이 '성범죄자의 그것'이라면, 아주 조그마한 확률이라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예민하고, 조금 과도해져서라도-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무엇보다,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고 교육 받은 쪽은 여성이었다.
'성폭력은 나와 상관 없는 일이잖아요?'
고등학교 시절, 한 학기에 한 번 있는 성교육 시간. 기대와는 달리 매번 지루했다. 남학생들만 가득했던 교실은 이번에도 '섹스'는 없었다는 탄식만 가득했다. 영상을 기억해보면 그럴만도 했다.
음습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골목길. 길고양이 하나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하나가 고장이 났는지 깜빡거리고, 빈 깡통만이 바람에 요란하게 굴러다닌다. 이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듯 보이는 '어린' / '여성'의 등장. 길게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 끝에 괴한이 서 있다. 괴한은 그의 뒤를 밟더니 이윽고 여성을 끌고 가려 한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 "잠깐!"
갑자기 영상의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캐릭터가 등장해 이야기한다.
"낯선 사람이 몸을 만지려 할 때는 '만지지 말라'고 거부의사를 명확히 드러낸 뒤, 큰 소리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해요!"
아무도 그 영상을 진지하게 보지는 않았다. 하품, 혹은 웃음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해 연구해 온 패멀리 D. 슐츠 교수는 그의 저서 『괴물이 된 사람들Not Monsters』을 통해 가해자를 "평범한 일상 바깥에서 난입한 괴물"로 상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폭력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발생하고,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 그 생각의 함정에 빠지는 순간, 그것은 수많은 성폭력을 '방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한다.
남학생이었던 내가 성폭력예방교육에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것이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해자가 될 리 없어-. 나는 저 괴물들과 달라-. 그러나 우리 일상 속에 성폭력은 이미 만연해 있다. 당신이 즐겨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 후방주의라는 말머리와 함께 올라온 여배우의 사진 아래 달려 있는 말들을 바라보자.
여자가 조심하자가 아닌, 가해를 하지 말자.
선생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① 여성들은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다니지 말라.
② 여성들은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학교가 끝나면 어서 집으로 들어가라.
③ 여성들은 노출 있는 옷을 입지 말고, 학생다운 옷을 입어야 한다.
④ 여성들은 성폭력 상황에 처하게 되면 크게 소리를 질러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라,
사회는 그렇게, '예비피해자'인 여성들에게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피해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곧 '조심하지 않은 너의 탓'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떳떳하게 피해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있었으면 그때 얘기했어야지, 왜 이제 와 난리냐. 너도 즐겼던 것 아니냐."는 말부터 "몸을 함부로 놀린 여자들 탓"이라는 말까지.
교육의 결과는 끔찍했다. 성폭력 피해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되뇌이며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좀 더 저항했더라면 달라졌을까. 내가 일찍 집에 들어갔더라면 괜찮았을까. 왜 그 상황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을까. 그러나 왜 피해자가 스스로를 탓해야 하는가. 잘못은 가해자에게 있다. 너무나 명료하고 당연한 사실이다.
일방적인 성폭력 교육의 피해는 여성에게 그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기관인 해바라기 센터를 찾은 성폭력 피해 남성은 2만 693명 중 5.2%로 나타났다. 남성의 성폭력 피해의 경우 그것이 더욱 은폐되거나, 혹은 성폭력인지조차 인식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실제 피해자 수는 이것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나 역시 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을 수없이 목격해 왔다. 특히 중-고등학교 교실은 더 했다. 왕따를 당하던 이에게 자위를 해보라고 시키는 모습. '오토바이'라 불리는, 다리 사이에 발을 집어넣고 성기를 문지르는 모습. 성기를 발로 차는 등의 가학 행위.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성폭력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남자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다. 성폭력은 언제나 여성만 당하는 것이라고 배웠으니까.
모두를 위한 성폭력 교육을 위하여
반복한다. '남학생'이었던 내가 성폭력예방교육에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것이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해 뿐 아니라, 피해 또한 그렇다. 모두가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또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듯 했던 교육은 곧 어떤 인식을 만들어 냈다.
교통사고를 조심한다고 해서 인도에 끼어드는 차까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온 몸에 히잡을 두른다고 해서 성폭력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어머나 안돼요 왜 이래요 이러지 마세요”라고 외친들 위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또한 만무하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가해자이지 피해자가 아니다. 성폭력을 정말 막고자 한다면, 이제 교육부터 달라져야 한다.
낡은 성폭력 피해 예방 영상을 바꿀 때가 왔다. 피해자를 여성으로만 고정시키던 그 교육, 피해자 위주로 가르치던 그 교육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다. 이제 '가해하지 말 것'을 가르쳐야 한다.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조심하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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