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거부, 잃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비겁하다. 남자답지 못하다.’ 사람들은 흔히 병역거부자를 이렇게 묘사한다. 이 나라에서 병역이란 ”남자라면 마땅히 치러야 할” 의무처럼 되어 있고, “진짜 사나이”의 길을 포기하는 것은 마냥 쉬운 선택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2013년 10월에 병역거부를 선언한 운동가 박정훈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담은 병역거부 소견서에서 국가로부터 보호받고 있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송전탑을 반대하는 밀양의 주민들을, 쌍용자동차의 해고노동자들을, 용산의 철거민들, 장애인과 성소수자들을. 그들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는 대신, 오히려 ‘비국민’이라는 딱지를 받았다. 그러므로, 자신은 이런 국가 폭력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에 병역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나긴 재판 끝에 수용되었고, 형기를 꼬박 채워 지난 10월에 풀려났다.
의문스러웠다. 병역의 의무를 기피하는 대가로 포기해야 할 것이 이 나라에는 좀 너무 많지 않은가. 번듯한 직장에 들어갈 기회, 정상적인 남성이라는 영예, 감옥에서 보내야 할 1년 6개월의 청춘 시절, 전과자라는 낙인만 아니었어도 얻을 수 있었을 그밖의 다른 모든 것들. 이 모두를 기어코 포기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 이후로, 그러니까 감옥에 들어가 “벌을 받은” 이후로 변한 것이 있을까.
그를 만난 것은 10월 말, 신촌에 위치한 아르바이트 노동조합의 사무실에서였다. 감옥에 갔다온 후에도 그의 정체성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그렇다. 그는 소위 이야기하는 ‘운동권’이다. 사회적 약자들과 여러 투쟁에 함께했다.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가 아니었다. 여전히 국가는 선택된 사람만을 보호하고 있었으며, 자신은 그들의 친구가 되지는 못 되더라도 그들을 탄압하는 국가의 편에 설 수는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인터뷰이 소개
박정훈. 1986년 출생. 청년좌파 및 알바노조 소속 청년운동가.
2013년 10월 8일 대한문 앞에서 병역 거부 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2014년 4월 15일에 징역 1년 6개월 선고 및 법정 구속 처분을 받았으며, 2015년 10월 11일 화성직업훈련교도소를 만기 출소하였다.
“나는 거절한다” 이후 2년, 달라진 것이 없다
우선 병역거부 얘기부터 하는 게 좋겠다. 왜 했나.
전쟁은 무력 싸움이 아니라 정치 싸움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왜 대포동 미사일을 쏘는 걸까. 무력을 과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이유와 갈등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를 실현하는 가장 좋은 길은 정치를 통한 해결이다. 각 나라의 평화 세력들이 전쟁을 하자는 이들과 싸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안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다.
병역거부 소견서에서 “매년 60만 명의 청년들이 국가안보를 위해 휴전선을 향해 눈을 돌리라는 명령을 받지만, 정작 국민들은 그들의 등 뒤에서 죽어간다”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한 지 2년 가까이 지났다. 얼마나 달라진 것 같은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내가 그 소견서를 쓰고, 감옥에 들어간 바로 다음 날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사회구조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이 훨씬 많다. 군인들이 전쟁으로 죽나. 아니다. 군대 내 가혹 행위, 총기사고로 죽어간다. 누가 누굴 지키라는 것인가. 진짜 국민들을 지키려면, 정부랑 싸워야 한다. 전혀 나아진 게 없더라. 심해지면 심해졌지. 세월호도 그렇고, 산재는 계속 일어나고. 노동 개악이 이루어지면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갈 것이다. 실은, 계급 전쟁인 것이다.
병역거부를 한 이후가 그동안 겪어왔던 ‘운동’과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운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계기는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었다.
처음에 화가 나는 감정에 솔직했던 거다. 마음의 소리에 대해 도망치지 않고 마주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었다. 만약 공부로 운동을 시작했다면 크게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운동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과연 이것이 합리적인 행동인가. 인풋과 아웃풋이 있어야 하는데,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제로에 수렴하지 않나. 비합리적이다. 인풋은 거의 인생을 담보로 하는 데 말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으면 시민단체 CMS 후원만으로 충분한 줄 알고 살았을 것이다.
“나는 소지품 검사를 거부합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생회장이었다고 들었다. 수련회에서 소지품 검사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접한 기억이 있다. 동창이 쓴 글로 기억하는데…
졸업 여행이었다. 입소식 행사 전에 교도관…이 아니라 조교들이 소지품 검사를 한다고 하더라. 우리 가방을 볼 수 있다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회장으로 선서를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규율을 지키겠다는 선서 뒤에 하나를 더 덧붙였다. “더불어 일방적인 소지품 검사를 거부할 것입니다.”
완전 웹툰 ‘송곳’의 주인공 아닌가? 이수인도 육사 안에서 강제된 투표를 비판하며 연설을 하는데.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간다”라고 했던가.
그렇게까지 깊게 오래 생각하고 행동한 건 아니었다. 안 되겠다, 별로다,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선서를 끝내고 나니까 몇 초 간의 침묵 후에 학생들로부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교감 선생님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생각 외로 선생님들, 조교들이 건드리지 못하더라. 소지품 검사는 결국 취소됐다.
송곳처럼 날이 선 삶이다. 병역거부가 오히려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거의 10년 넘게 생각했던 일이다. 9·11 테러를 보면서부터 “이건 아니다”란 생각을 했다. 큰 어려움은 없었다. 부모님에게는 “내가 군대에 가면 내 신변에 위험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당시에 통합진보당 사건도 있었고. “국회의원도 저러는데, 내가 군대에 가면 영창 가서 끝장날 수도 있다.” 거의 협박을 했다.
댓글들도 상당히 스트레스를 주었을 법하다. 그런 것 있지 않나. “병역거부자는 비겁하다.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누리려고 한다” 같은. 어떤 생각이 들었나.
마초적으로 대답을 하자면 이렇다. “니들이 깜빵 가 봤어?”
감옥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군대를 갈 거냐, 감옥을 갈 거냐 하고 물어보면 당연히 군대에 갈 거다. 군대를 정말 애국심과 신념 때문에 가는 게 아니지 않나. 다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기는 불이익, 그렇게 함으로써 생기는 이익이 있다. 그런 것들을 감옥에 가면 다 포기해야 하니까 다들 군대로 가는 거다.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을 서로 인정해줬으면 한다. 국가의 의무를 다한 것을 존중한다. 인정한다. 고생한 것 맞다. 그렇다면, 국가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 않나. “내가 그쪽을 위해 2년간 의무를 다했는데, 그쪽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줬나”라고. 그런데 그런 요구를 국가 말고 약자들에게 하는 것이 비겁한 일이다.
그래서 말한다. 대체복무를 도입하면 된다. 해외자원활동 같은 거. 그럼 갈 사람 많다. 한국이 가난한 나라도 아니고, 얼마든 가능하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좋은 일이다. 그런 발전적인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안에서는 헌법소원을 냈다.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를 도입하라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공개변론에서는 많은 주목을 받았다. 무죄판결도 받았다. 법리적으로는 무죄가 맞다. 그런데 판결문에 정치가 들어가 있다. 남북관계, 법리에 왜 정치가 개입하나. 국방부도 공개변론에서 대체복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시기상조라는 거다. 이건 논리가 아니라 정치 싸움에 가깝다.
이 세상의 여기저기에서, 꼿꼿함을 지키며 적응하기
병역거부를 선언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가 가지고 있는 다른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출소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마침 출소일이 사촌 형의 결혼식이었다. 새벽 다섯 시에 나와 부랴부랴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사촌 형은 집안의 말썽꾸러기였다. 어릴 때 PC방을 돌아다니면서 사촌 형을 찾으러 다녔다. 그 사람이 결혼하고, 나는 빵에서 나왔다. 결혼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알바노조에서 노동개악대책위원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돌아오자마자?
할 일이 많더라.
알바노조의 활동이 병역거부와 큰 연관이 있어보이지 않는다. 왜 알바노조인가.
계속 해 오던 것일 뿐이다. 나는 노동운동을 계속 해왔고, 그런 점에서 병역거부가 오히려 예외적일지도 모른다.
사회에 적응하는 건 안 힘들었나.
적응은 잘 안 된다. 공인인증서 발급도, 내 명의의 휴대폰을 찾는 것도 힘들었다. 내 신분을 증명해야 하는 과정이 발품을 많이 들여야 하는 일이더라.
보통 군대에 가면 핸드폰은 ‘군정지’를 한다. 그런 거라도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구속정지요금제 같은 거? (웃음) 물가도 많이 올랐더라. 우선 교통비가 그렇다. 출소한 지 20일도 안 됐는데 벌써 10만 원을 넘게 썼다.
사회에 다시 적응하는 것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감옥에 적응하는 일은 더욱 어려웠을 것 같다. 무엇이 제일 힘들었나.
시간차.
시간차?
수요일 저녁에 일이 생기면, 목요일 아침에 편지를 써야 한다. 제일 빠른 게 익일특급이다. 그러면 금요일에야 받게 되겠지. 답장을 하려면 주말이다. 월요일에 답장을 하면 화요일에 받을 수 있다. 연휴가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만약 목요일 아침에 편지를 보내고, 그 날 또 다른 일이 생기면 화요일에 받게 되는 답장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다. 일주일 정도의 텀이 생기는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징벌방에 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게 제일 답답했다. 좌식 생활도 그렇고.
좌식? 바닥에 앉아서?
꼿꼿하게 앉아 있어야 한다. 누울 수도 없다. 또 번호구령이 그렇다. 보안과장 같은 사람이 오면 크게 외쳐야 한다. 의전 한다고. 전체 차렷!
그런 점은 군대랑 별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그게 싫어서 싸웠다. 왜 앉아 있어야 하냐고, 규정 달라고. 운동도 마음대로 못하게 한다. 내가 받은 형이라는 것은 ‘갇혀서 사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이루어지는 집행은 감옥 안에서의 태도와 자세까지 규제하려고 하더라. ‘소내질서유지’를 위해서 그렇단다.
좁디좁은 감방, 작은 권력과 신념 사이에서
감옥 안의 분위기는 어땠나.
그 얘기를 다 하면 책 한 권은 나온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감옥 안에도 계급관계가 있다. 영치금이 있느냐, 서신이 자주 들어오느냐가 계급을 결정한다.
감옥 안에서도 음식, 생필품을 다 사야 한다. (그런 것들을) 많이 사는 사람에게 권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편지가 자주 온다는 것은, 이 사람을 누군가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다. 영치금이 있는 사람에게 편지가 자주 온다. 그 다음이 나이다. 30대, 40대가 가장 힘이 세다. 50대인데 돈이 없으면 개무시당한다. 내 나이대가 징역살이하기 좋은 나이인 셈이다. 얼마 후에는 내가 방장이 되어서 권력을 쥐게 되었다.
권력을? 그런 게 싫어서 감옥에 간 게 아니었나?
맞다. 권력을 쥐고 있는 게 미안하더라. 권력관계에서 그것을 너무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양심에 찔렸다. 여기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호 구령을 할 때에도, 허리를 꼿꼿이 펴 앉아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런 게 하기 싫어서 감옥에 온 건데 그런 걸 하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뱉은 말에 책임을 지려면 독방을 가야겠더라. (방장의 권력으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싫었다. 편하게 살려면 자존감이 떨어진다. 명령을 그대로 따라야 하고, 권력을 가지게 된다. 병역거부를 한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여섯 번 징벌을 받으면 독방을 주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80일간 징벌방에 있었다.
어떤 징벌인가?
TV가 없고, 서신이 막히고, 신문을 볼 수 없다. 음식물을 구매할 수도 없다. CCTV가 달려 있고, 운동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제한된다.
아예 차단되는 건가.
바깥과 완전히 차단되는 곳이다. 그렇게 독방에서 지내게 됐다. 그때부터 번호구령도 안 하고. 그 후로 집행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서울구치소로 옮겨갔다. 그때는 내가 법에 대해 잘 알게 된 후라, 교도관들에게도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었다.
독방에 살기 전에 함께 지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경제사범들과 함께 지냈다. 사기 같은. 4년 형을 받았던 방장은 소셜커머스 사기였다. 무슨 기업의 회장도 있었다. 그 사람은 종종 “당신들, 밖이었으면 나한테 말도 못 붙였다.” 같은 말을 하곤 했는데, 면회 오는 사람도 없었고 영치금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러니까 사람들이 엄청 싫어하지. 목소리만 크고.
회사 일을 하다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인간관계가 돈과 엮여 있기 때문에 감옥에 오는 순간 다 끊어진다. 성격도 누구를 부리기만 하던 이들이라 안에서 적응을 잘 못 한다. 옛날 얘기 해 봐야 뭐하나. 영치금이 없는데. 참고로 그 사람은 방 사람들이 도와줘서 합의금 모아서 나갔다. 사과 두 개 놓고 나가서 연락이 없더라. 감옥 안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걸 느꼈다.
그들 중에 병역거부를 했다는 이유로 싫어했던 사람은 없었나.
그런 점에서 난 운이 좋았다. 판결문에 집시법 위반이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병역법 위반은 딱 한 줄 적혀 있었다. 교도관들도 심지어 내가 병역법 위반인지 몰랐다. 아는 사람들도, “어, 군대 안 갔네? 네가 군대 가는 건 문제가 있지.” 같은 반응이었다. 병역법이 먼저 나와 있었으면 좀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친해진 사람들이랑만 얘기를 했다.
어떤 사람들과 제일 친했나.
남부구치소에서 만난 방장의 죄목은 인터넷 사기였다 . 그분이 나에게 처음 이불과 침낭을 줬다. 지금도 편지를 한다. 또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내 또래는 전신문신을 했었다. 영어 발음기호를 물어보더라. 그렇게 영어를 가르쳐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친해졌다. 아, 그 친구 죄목은 보험사기였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삼성화재 같은 대기업을 등쳐먹은 거니까 좀 낫다.”는 얘기를 내게 하곤 했다.
감옥에서는 대학 나온 사람이 상위 1%다. 운동을 하면서 만나왔던 웬만한 사람들은 4년제 출신이었으니까, 얼마나 계급사회가 고립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대학 안 나온 사람이 많은지 처음 알았다. 아저씨들이 대학 나오면 다 박사라고 불렀다. 경제적으로는 낮지만, 문화적 계급은 꽤 상층부에 있다는 걸 그때 느꼈다.
과연 감옥 생활은 쉬운가?
밥 같은 건 어땠나?
급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 끼에 1,300원. 묵은 쌀을 쓰기 때문에 벌레가 자주 나온다.
벌레?
쌀벌레. 돼지고기에 등급도장을 찍어둔 게 반찬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먹을 만은 했다. 대신 반찬은 좀 사야 한다. 김, 소시지, 김치 같은 것들. 그래서 영치금이 중요하다.
하루 일과는 어땠나.
여섯 시 기상, 일곱 시에 아침 식사, 일곱 시부터 라디오가 나온다. 호란의 FM… 여덟 시에 일과 시작 점호로 일과가 시작된다. 나는 공부를 했다. 운동 시간은 그 후에 유동적으로 주어진다. 11시쯤에는 점심을 먹는다. 오후 다섯 시면 폐방점검으로 일과를 종료한다. 저녁 먹고, 다섯 시 반부터 저녁방송이 나온다. 이때부터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이 나온다. 여덟시부터 드라마를 틀어주고, 드라마 진짜 많이 봤다. 아홉 시에 방송을 종료한다.
취침 시간은?
취침은 아홉 시부터다. 나는 보통 열 시에 잤다. 독방은 불을 안 끈다. 그것도 괴롭다.
감시하려고?
(내가 그들에게) 보여야 하니까. 그래서 남부구치소에 안대를 팔라고 일 년 넘게 요청했다.
흥미롭게 잘 들었다. 벌써 마지막 질문이다. 이 인터뷰를 읽고 있을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욕하러 들어온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 병역거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조선시대에는 일제의 강제노역에 반대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당시에는 애국자였다. 나치에 반대한 병역거부자들도 있었다. 훌륭한 사람들 아닌가. 내가 이스라엘에 태어났으면, 팔레스타인 폭격에 반대했을 것이다. 이라크 학살에 반대했던 미국의 병역거부자들처럼 말이다.
한 발짝 떨어져 보면 굉장히 합리적인 이야기이다. 일본에서 징병제 도입 이야기가 나온다. 만약 실현된다면, 병역을 거부하는 평화세력들이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도 김정은 정권에 반대해 총을 들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시 김정은 정권에 맞서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 다만, 대한민국에 태어났을 뿐이라고. 우리도 베트남 같은 곳에서 나쁜 일들을 자행해 왔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끝?
고생했다. 더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연락하겠다.
수고했다.
어쨌든 나의 행동 하나가 작으나마 한두 가지를 바꾸기에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뭔가 찜찜한 기분에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으로 뉴스를 검색해 봤다. 기사 제목의 50%도 차지하지 않는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단어 자체에 경기를 일으키는 반응들이 많았다.
"아 그럼 나는 양심이 없어서 군대를 갔다왔나 보네?"
“졸렬한 새끼들…"
"그냥 군대 가기 싫다고 말을 해라."
맞다. 군대 가기 싫다고 주변 사람 붙잡고 징징거리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그냥 눌러 참고 다음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일 뿐이다. 팔팔한 스무살의 남자 청년들이 군사외교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거대한 모순을, 모두 다함께 안 해도 된다고 하면, 그게 분명 제일 좋은 일일 텐데, 우린 그냥 남들 다 하고 있다든가 하는 이유 아닌 이유로 이 부조리를 다음 사람에게 쉼없이 인수인계하고 있다.
내가 만난 박정훈은 무슨 별난 ‘양심’이 있어서 병역을 ‘거부’하고 도망간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모순의 한 조각씩을 바꿔 보려고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졸업 여행 선서 자리에서 뭐 하나를 바꿔 보겠다고 애드립을 쳤을 때 환호를 보내던 동창생의 마음으로, 그의 양심적 병역 거부를 지지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군 복무라는 어마어마한 일까지도, 그와 같은 이들의 행동에 힘입을 때, 언젠가는 정말로 그 부조리의 인수인계가 끝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지금까지는 성공적으로 잘 해 왔다. 학교에서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했을 때도, 부대 생활관보다 열악한 서울 남부구치소 독방에 들어가 있었을 때도.
추신
물론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지만, (웃음) 남부구치소 가시게 되면 아마 지금은 안대를 팔 거다. 그거 내가 들여놓은 거다. 독방 불 안 끄는 거 뭐라 안 할 테니까, 안대라도 쓰고 자게 해 달라고 그거 갖고 1년을 싸워서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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