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였던 당신을 떠나보내며

할매는 젊은 시절에 사랑을 했고

식도 올리기 전에 아들 둘을 낳았다. 식을 올리려고 보니 사랑하는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할머니는 그 남자와 헤어지고 아들 둘을 홀로 키웠다. 운명의 장난인지 타고 난 팔자가 그 모양인지, 두 번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남자와는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낳았다.

할머니는 그와중에 홀어머니까지 모셔야 했다. 식솔이 늘어날 수록 가난은 깊어져 갔다. 성이 다른 자식들은 학교는커녕 기역니은과 아야어여를 배울 여력도 없이 어린 시절부터 생계를 꾸렸다. A성을 가진 큰아들이 B씨 성을 가진 막내딸을 업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식이었다. 그리고 오빠들 등에 번갈아 업히던 막내딸은 걸어다니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김장을 도왔다.

가난은 생선 잔가시처럼 걷어내도 걷어내도 끝이 없었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혹독해져 갔다. 애비 없이 자랐단 소리를 듣고 싶게 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할머니는 아들과 딸의 질서를 엄한 잠규칙으로 다스렸고, 그 규칙은 며느리와 손주들에게까지 되물림 됐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였던 할머니가,가해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구박은 기본이었다 ⓒJTBC '고부스캔들'

 

시어머니가 된 할매는 혹독했다

며느리들을 못 잡아 먹어 안달이었다. 작은엄마는 엄한 시어머니에게 손자 둘을 안겨드리고 아들 기저귀에 목을 맸다. 남은 며느리들이라고 따라 가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녀들은 이를 악물고 버텨서 오늘날까지 살아있다. 그런 할머니를, 나는 미워했다.

할머니가 정한 규칙에 따라 며느리와 손녀는 대문을 드나들 수 없었다. 늘 쪽문과 부엌문으로 다녀야 했다. 아빠, 작은아빠들, 고모부, 남동생, 사촌남동생들과 겸상을 할 수 없었다. 여자들은 그들이 먹고 남긴 걸 먹었다.

이런 분위기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한 번은 내가 할머니집 마당에서 놀면서 치킨 닭다리를 먹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어디서 기집애가 고기를 마당 한복판에서 먹냐며 과일을 드시던 쇠그릇을 나에게 던졌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나는 딸이었고, 이런 취급은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났다. 명절이 돼도 자녀들과 손주들은 할머니를 뵈러 가지 않았다. 가부장제의 권력이 늙고 병 드는 동안 손주들은 너무 커버렸기 때문이다. 중간고사다 수능시험이다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손주들이 크면 클 수록 할머니는 외로워져 갔다. 자신이 부렸던 권력의 말로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할매가 돌아가셨다

자다가 가셨다 한다. 호상이었다. 자식들은 울었으나 며느리들은 울지 않았다.  맏며느리였던 우리 엄마는 뭐 잘 해준 게 있어서 우냐며 하나도 눈물이 안 난다며 30년 만에 처음으로, 영정 사진이 된 시어머니께 대들었다. 외로웠던 말년의 할머니와는 달리 장례식장은 자식들의 지인들로 새벽까지 북적였다.

당신이 버림받아가며 씨가 다른 자식을 넷이나 낳은 이유는, 죽어서는 쓸쓸하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할머니가 외롭지 않아 보여서, 그래도 다행이었다.

할머니가 먹고 잤던 예천집에 들렀다. 영정 사진이 된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동네와 집 안을 소요했다. 평생 이사라곤 가본 적 없었기에, 할머니는 죽어서야 처음으로 예천을 떠나게 되었다.

방 안에는, 할머니가 누워 세상을 하직했던 이불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그 때,  방 안쪽에 웬 사진이 보였다. 손때가 묻어 귀퉁이가 반질해진지 오래된 사진이었다.

내 어릴 적 사진이었다. 명절에 자주 오지도 않고 전화도 1년에 한두 번 할까말까 한, 서른 즈음이 된 손녀는 아직도 20여 년 전 두 살 때의 모습으로 할머니 곁에 있었다. 가만히 그 사진을 보고 있는데, 고모가 내게 와서 말했다. 너를 가장 생각하셨다고. 다만, 겉으로 마음 줄 수 없어 항상 속으로만 품으셨다고.

 

할매는 한줌의 뼈로 남았다

천하를 호령할 것 같았던 가부장제의 마지막 권력은 재가 됐다. 자식들은 엄마의 재가 담긴 함을 끌어안고 울었다. 며느리들은 울지 않았다. 수목장을 하러 산에 갔다. 작은아빠는 작은 함에서 종이에 쌓인 할머니를 꺼냈다. 따뜻했는지 종이 위에 얼굴을 부비며 울었다. 작은아빠는 종이를 펼쳐 할머니를 움켜 잡고 뿌렸다. 여기 저기서 곡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때도 며느리들은 울지 않았다.

할머니를 쌌던 종이와 함을 묻었다. 큰아들부터 손녀까지, 서열 순대로 할머니 위에 흙을 뿌렸다. 여자들 중 딸을 제외하고 서열 1순위는 우리 엄마였다. 장남의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결연한 표정으로 와서 흙을 뿌리고 말했다.

  "잘 가세요. 거기서는 아프지 마시고."

흙을 뿌린 엄마가, 3일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엄마가, 갑자기 곡을 하며 주저 앉았다.
산의 경사 때문에 굴러 떨어질 뻔했던 엄마를 주위 남자들이 일으켜 세웠다.

날씨가 좋은 어느 날, 그렇게 할매는 떠났다.

장례 절차를 마친 자식들과 손주들은 점심을 먹었다.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딸과 사위와 손자들과 손녀들 사이에 있던 위계가, 할머니의 잔재같던 가부장적 서열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며느리들은 수저를 놓지 않았고 수저통과 가까운 사람이 놓았다.

며느리들은 물을 따라오지 않았고 정수기와 가까운 사람이 물을 따라 가져왔다. 가부장제의 서열과 상관없이 앉고 싶은대로 다같이 앉아 밥을 먹었다. 그렇게 하자고 말을 꺼낸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할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가족을 지배하던 힘이 갑자기 사라졌다.

 

할매는 그렇게 가족에게 평화를 안기고 갔다.

살아생전 왜 그렇게 혹독해야 했는지, 또 얼마나 외로웠는지 나는 다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태어나 처음으로, 유부남 둘에게 버림받고 혹독한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젊은 여자의 삶을 이해해보려 했으며, 그 삶이 죽음으로 인해 가족을 짓누르던 가부장제의 권력이 사라지고 이제야 평화가 왔음을 기쁘게 생각했다.

할매. 당신의 자식들은 이제 당신의 손 안에서 벗어나 잘 살테니, 편히 눈 감아. 당신에게 받은 상처는 당신이 낳은 착한 자식들이 이제 가슴에 묻었어. 언젠가 당신이 내게 "내 새끼" 했던 말을 기억해. 당신이 낳은 게 아닌데 왜 내게 "내 새끼"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 했고, 당신을 미워해 왔지만, 이제 나도 가슴에 묻을게. 명절에 자주 못 가서 미안해. 당신이 오래 살아있을 줄 알았어.

미안해. 저 세상에선 외롭지 마.
남자 만나지도 말고 자식 낳지도 말고

먹고 싶은 것 맘껏 먹고 잘 살아.
잘 가, 우리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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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민지

하민지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과속방지턱 인생. 그 와중에 영화와 준그리를 좋아함. 목표는 늦잠 줄이기. 자다가 인생 망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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