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을 기억하나요?

그때는 몰랐지 내가 이렇게나 흔들릴 줄

사랑에 빠지는 순간들은, 그 사랑의 수 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를 가진다.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방법으로 가슴이 쿵쾅대는 극적인 순간이 있는가 하면, 사랑인지 미처 알아채지도 못하고 빠져드는 순간도 있기 마련. 그렇게 시작된 작은 사랑은 세상을 가득 채울 것 만같이 커다랗게 자라기도, 채 시작도 하지 못하고 사그라져 버리기도 한다.

그 결론이야 어떻든,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 만큼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눈 앞의 너와, 너를 바라보는 나만이 온전하게 존재하는 듯한 '작은 우주'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매섭던 바람이 잦아들고, 따뜻한 햇살이 색색의 꽃을 피우는 지금.
바야흐로 찾아온 사랑의 계절 앞에서, 네 개의 작은 우주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 볼빨간 사춘기, 사랑에 빠졌을 때

Like fire 불빛이 켜지면 온 세상이 따뜻해져서 견딜 수 없어
Like fabular 소설처럼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11월도 끝나가는 늦가을이었다. 우리 둘 다 옷을 껴입고 있었으니, 어쩌면 초겨울 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늦은 수업 도중 너에게 연락했을 때 너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학교 앞에서 우리는 저녁 식사를 했다. 나는 너와 처음 먹는 밥에 너무도 떨려 채 다 먹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간 카페에서 나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너는 딸기음료를 주문했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너는 '인간 실격'이, 비 오는 날이, 달이 좋다고 했다. 나랑 참 많이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화가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네가 내 말을 들어주고 웃어준다는 것이 좋았다. 나를 보는 그 눈빛을, 활짝 웃을 때 올라가는 입 꼬리를, 반만 염색한 머리카락을 내 눈에 다 담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싶었다. 과에서 하는 일 때문에 너는 다시 학교에 들어 가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너를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시간은 참 상대적이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벌써 정류장에 도착했고, 이윽고 버스도 도착했다. 버스에 타기 전에 손인사를 건네려고 들어 올린 네 손이 내 손을 스쳤다. 버스가 출발했고 나는 뒤돌았다. 초겨울의 쌀쌀한 냄새가 내 코에 한참이나 맴 돌았고, 네가 좋아 한다던 그 달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났다.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하게 된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다. 내 마음은 스위치가 켜진 듯 갑자기 밝아졌다.

♪어반자카파, 또 다른 너

내 맘에 없던 니가 점점 다가와 편안해지고 더 생각하게 되고
그저 친구인 니가 다르게 보여 나를 설레게 해 날 편안하게 해

친구인 네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날이 있다. 나는 강의실 앞에서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네가 보였다. 새로 나온 검정색 과잠을 입은 모습이 당황스러울 만큼 멋있었다. 단지 품이 큰 과잠 때문이었을까.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키와 듬직한 어깨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날 이후 너의 품에 안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뜩 문뜩 들었다. 너와의 공통점을 하나 둘 세는 일이 많아졌다. 네 입술 왼쪽 위에 작은 점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버렸다. 그렇게 자꾸만 너를 맘에 품었다. 유월의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는 밤이었다. 너와 학교 근처 주점에서 한 잔 하게 됐다. 하늘은 곤색으로 물 들었고 향긋한 과일 향 소주는 우리의 정신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초록색 병들이 쌓여가고 더 이상 유자 맛인지 블루베리 맛인지 구분할 수 없어진 지점. 허름한 주점의 계단에서 네게 안겼다. 너의 품은 상상했던 만큼이나 넓고 따듯했다. 그때, 반쯤 눈이 감긴 내게 너는 말했다. 좋아한다고. 유월의 밤, 그렇게 우리는 친구에서 연인이 됐다.

♪HIGH4, IU(하이포, 아이유), 봄, 사랑, 벚꽃 말고

나만 빼고 다 사랑에 빠져 봄 노래를 부르고 꽃잎이 피어나 눈 앞에 살랑거려도
난 다른 얘기가 듣고싶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버릴 봄, 사랑, 벛꽃 말고

4월, 나만 빼고 다 사랑에 빠지던 계절이었다. 2년의 공백을 지나고 다시 만난 너는 여전히 예쁘게 웃었지만, 문득 얼굴을 바라봐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이젠 다 잊었나보다, 쉽게도 착각했다. 한 번 끌렸던 사람은 결국 다시 끌리는 걸까?

강의 중 같이 보는 책에 몰래 낙서를 하며 낄낄대고, 밤새 팀플을 하느라 엉망이 된 서로를 보고 터지듯 웃으면서, 그 따사로운 봄날을 함께하는 동안 너는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었고, 밥 좀 챙겨먹고 다니라고 인상쓰는 너의 모습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스치는 손끝에, 나를 놀리며 달싹이는 그 입술에 꽃이 물기를 빨아들이듯 나는 네게 스며들었다.

하필이면 달이 예뻤던 시험기간의 어느 날. 도서관 밖의 서늘한 날씨와 밤이 주는 미묘한 분위기에 달뜬 채, 전에 좋아했었다고 고백하듯 말해버린 그날부터, 나는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다시 한 번 너를 좋아해버리고 말았다.

♪사람 또 사람, 우주

오늘 같은 밤이면 이 거대한 우주 속에 너와 나 단 둘만이 남았으면
복잡할 필요 없이 헤메일 이유 없이 너와 나 둘이서만 빛났으면

몇년 전, 이맘 때 쯤이었다. 드문드문 비어있는 강의실 덕분 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너는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남자 아이들은 잘 하지 않는 드물게 어깨까지 내려온 긴 머리는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렸고, 웃을 때 마다 깊게 패이는 양쪽 볼의 보조개는 사랑스러웠다. 전과를 해서 모든게 다 어색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보겠다며 넉살 좋게 웃어보이던 소개는 귀엽기까지했다.

그렇게 호기심 가득한 곁눈질로 너를 훔쳐본지 몇일이 지났을까. 어떤 수업이 끝나고, 너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함께 듣는 수업의 과제를 물어오는 어색한 표정의 너를 앞에 두고, 나는 너와 함께 듣는 수업이 다섯 개나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냉큼 번호를 묻고는 걱정 말라며 큰소리를 쳤다. 평소라면 귀찮아 손사래를 쳤을법한 일이었지만, 너라서 괜찮았다. ‘너’라서 괜찮다는 생각이 든 순간 깨달았다.

너는 이미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어있다는 것을. 하지만 너와 나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몇 년 동안 복잡한 길을 헤메고 헤메이다 너는 멀리 떠난다고 했고, 나는 끝끝내 어떤 말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던 그날 밤, 가벼운 포옹을 하는 짧은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랬다. 어떤 밤이되면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그때의 우리가 조금만 덜 복잡 했으면, 헤메일 이유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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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여름

문여름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좋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