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들어온 나쁜 균인지 확인을 해야 질에 생긴 염증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어요”
맞은 편에 앉은 산부인과 선생님은 계속해서 ‘나쁜 균’을 강조하면서 세밀한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산부인과에서 말하는 ‘검사’의 비용이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걸 아는 나는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얼마냐’고 물어봤다. 돌아온 숫자는 11만원. 다음 달 월급이 들어오려면 2주는 남았는데.
방어적으로 “오늘은 치료만 하고 가겠다”고 몇 번을 이야기하고서야 그 자리를 나올 수 있었다. 선생님은 계속 ‘~라는 건 알고계시고’ 라고 말하며 나를 물정 모르는 아이 다루듯 했다. 그것도 계속해서 ‘나쁜 균’을 언급하시면서. 왠지 내가 어디서 나쁜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쁜 짓? 섹스를 했을 뿐인데.
생리가 끝난 직후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를 가진 탓인지, 정말 산부인과 의사의 말처럼 그에게 ‘나쁜균’이 옮았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날 밤의 섹스는 함께였지만 산부인과 문 앞에서 나는 혼자였다는 것.
홀로 남겨진 14일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임신’에 대한 공포가 찾아왔다. 테스트기를 사용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관계 후의 14일 동안, 매일 혼자서 최악을 생각했다. 이모저모 따져봤을때, 가능성이 낮다는 건 알고 있어도 ‘여성은 365일 가임기’라는 말이 내 발목을 잡았다.
혹시라도 모를 1%의 가능성이라도 현실이 된다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엄마에게는 어떻게 말할까. 사서 하는 걱정이라도 좋았다.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해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20대의 나이에 ‘1억 이상이 예상되는 양육비’를 현실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생명은 소중하니 무조건 아이를 낳으라는 사람은 생명의 소중함은 알아도 ‘엄마가 될 한 여자와 태어날 아이의 삶’에 대해선 지극히 무관심한 사람이다.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고민 상담 방에 들어 글을 읽었다.
‘사후피임약 먹어야 할까요?’
‘질외 사정 후에 한 달이 지났는데 생리를 안 해요’
‘임신 테스트기 지금 해도 될까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고민을 하는 사람 모두는 ‘여자’였다.
의문이 들었다. 왜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혼자인 걸까. 섹스는 둘이 하는데 고민은 왜 한 사람의 몫인가. 그리고 궁금했다. 삽입이 끝난 다음 내가 겪을 일들을, 고민들을 너는 알았을까. 이 모든 걸 알았더라면, 똑같이 겪어야 한다해도, 너는 쉽게 콘돔을 벗을 수 있었을까?
만약 당신이 똑같이 겪어야 했다면
오래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만났던 남자친구는 내 동의를 구하지 않고 관계 중간에 콘돔을 벗었다. 내가 화를 내자 남자친구는 ‘미안하다’며 자신을 자책했다. 눈물까지 흘리며 사과하는 그 앞에서 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남자친구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 다음날 처음으로 혼자 산부인과에 갔다. ‘사후 피임약은 기록에 남지 않기 때문에 의료보험이 안된다’는 말에 왠지 죄책감이 들었다. 진단서를 받은후 진료비 2만원과 약값 1만원을 지불한 후 사후피임약을 먹었다. 남자 친구는 다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그 말을 하는 너는 쉽게 벗겨지는 콘돔 껍질처럼 참 쉬워만 보였다.
더 불안하기 싫었다. 내가 알아서 ‘피임약’을 먹기 시작했다. ‘약 먹는다’고 염려하던 네 얼굴 한편에서 ‘안도’를 느낀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얼마 후, 그는 다시 ‘빼고 해도 되냐고’ 물었다. ‘내가 피임을 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남자친구에게 ‘피임으로부터의 자유’를 안겨준 듯했다. 그러려고 그런건 아니었는데, 스스로 피임을 시작한 순간 현실에선 오히려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다툼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생리가 늦어졌다. 나는 또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테스트기에 두 줄이 뜬다면, 헤어진 네게 가서 말을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은 여전히 혼자만의 것이었다. 이 ‘만약’이 현실이 된다면 너한테는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까. 그리고 궁금했다. ‘중절 수술’을 몰래 검색했다 지우고, 그 비용을 구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 모든 과정을 네가 겪어야 했다면, 그렇게 쉽게 ‘콘돔 빼도 돼?’ 라는 말을 내게 할 수 있었을지.
‘빼도 돼?’ 냐고 묻기 전에
이 글은 함부로 섹스를 해서는 안 된다거나, 여자가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거나, 남자가 여자를 책임져야 한다거나 그런 헛소리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섹스는 즐겁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처럼 ‘대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두 사람의 몫이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당신이 콘돔을 빼고 난 다음, 단 10분 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혼자서 감당할 누군가를 떠올리길 바란다.
다행히 14일 후 임신테스트기엔 한 줄이 떴다.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도 누군가는 ‘가임기’나 ‘임신’을 검색하며 홀로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 외로운 사람의 옆에 피임에 대해 함께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당신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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