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한 나라에서 우연히 일어난 사고라기에는
루마니아에서 나이트클럽 화재로 56명이 숨졌다. 국가는 3일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국민들의 분노는 안전불감증을 초래한 국가의 부정부패를 향했다. #colectiv(“연대하라”, 화재가 난 클럽의 상호명) 해시태그가 트렌드를 탔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약 3만여 명이 모인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은 정권 퇴진을 요구했고, 그렇게 되었다.
다들 이 소식을 접했을 때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동방의 한 나라와 참 비교된다, 304명이 죽고 13만명이 모여도 아무렇지도 않은 한 나라와 참 비교된다는 생각.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두세 시간 동안 구글링을 해서 얻은 내용은 루마니아 국민이 2100만명 정도 된다는 사실과 정부와 정교회의 부패가 매우 심하다는 기본적인 정보, 화재 발생 1시간여 후에 국무장관이 그 자리에 도착했다는 사실이나, 다음 날 오전 7시에 국가위원회가 소집되었다는 점, 시위 현장에 대통령이 방문해서 군중들과 대화했다거나 하는, 좀더 우리 입장에서 서글퍼지는 이야기들이었다.
거기서 그만뒀어야 했는데. 서글픔의 늪에라도 빠지고 싶었던 걸까? 나는 좀 더 자세한 걸 알아보고 싶다고 SNS를 뒤져서 시위에 참가했던 루마니아 사람(Alexa Dogaru)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리고 내가 받은 대답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남 일 같지 않았던 #colectiv의 뒷이야기
#colectiv 집회로 인해 폰타 총리와 피돈 시장이 사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밖에 변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우리가 시위를 통해 얻어낸 건 그냥 정부가 다른 정부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The only change that was made through protests is that the Gorverment changed and now we have another one.
루마니아는 어찌 보면 우리와 비슷하다. 시민들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끝냈고, IMF 구제금융도 받았다. 독재 정권(그리고 공산 정권)이 무너진 건 1989년이었으나, 금융 구제를 받은 건 2009년이었다. 그로 인해 현재 루마니아의 부패나 경제 상황은 심각한 수준이다. 단순히 수치만 가지고 비교를 해도 알 수 있다.
많은 루마니아 젊은이들이 4년제를 졸업했든, 박사 학위가 있든 다른 유럽 국가로 가서 종업원 등으로 취직해 일하려 하고 있다고, 자신도 영국으로 가서 살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루마니아 사람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예를 들면, 병원에 갔을 때, 돈을 받기 전에는 당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의사나 간호사가 있을 수 있어요.
For example. when you're going to a hospital. There can be care assistant or doctors who dont watch you until u gave them money.
그리고 시위 과정에서 절망을 느낀 건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었다. 시위의 모습이 어땠냐는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변엔 힘이 없었다. 첫째 날에는 자신도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넷째 날에는 시위대를 갈라 놓으려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3만 명의 사람들은 2만, 1만 5천으로 점점 그 수가 줄었다고 했다.
그럼 5일째는요?
5일째 되니까 광장에 가고 싶지도 않더라고요.
In the 5th day I didn't want to be in the square.
또 그녀는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을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이상하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지도 않을 때 왔다 갔으며, 정부가 바뀐 게 다가 아니고, 그들이 잘 해낼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그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고. 게다가 (친구들은 희망에 가득 차 있지만) 정작 자신은 바꿀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작은 존재들이고, 산을 움직일 수는 없다고. 그리고 정치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과학자들이 성경을 믿게 하려는 것과 같다고.
그래도 집 밖으로 나왔다는 그녀의 Yes 한마디
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집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기 위해.
그래도 그 클럽 앞에서 촛불 추모를 하려고 나갔어요.
So I was to light up a candle in front of the club.
그래요? 왜요?
벌써 3주가 지났는데… 그 클럽에 갇혀 죽은 청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프거든요. (중략) 그냥 눈물이 나요. 내가 그렇게 됐을지, 우리 언니나 친구들이 거기 있었을지 어떻게 아느냐고요. 말로는 표현을 잘 못 하겠어요.
Even now, after 3 weeks from that… Im still sad that young people died into a club at a concert. (…) Just sad. I could be there. Or my sister. Or my friends… I‘m speechless.
혹시 다음 정부가 제대로 국정을 이끌어나가지 못하면, 그때도 다시 사람들이 일어설 것 같은가요?
네. Yes.
변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쨌거나 그녀는 집 밖으로 나왔고, 더 나은 변화를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다. 그리고 루마니아는 변화했다. 그녀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가 느낀 것은 이것이다. 일단 집 밖으로 나오자. 내 생각을 가지고.
‘헬조선’을 살아가는 나의 행동 범위
SNS는 우리가 사회적 이슈를 빠르게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 주었고, 주류적 언론을 보완해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냄비 여론을 부추겼다. 빠르게 읽고 ‘좋아요’를 누르고 다음 피드를 받아볼 수 있는 세상에서 냄비가 끓고 식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그러면서 점점 사람들은 진짜 ‘내가 신경써야 할 내 일’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쉽게 말하고 쉽게 잊게 되었다.
덕분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팔짱 끼고 삿대질하기만 하는 누군가가 생겨났다. 시위나 서명 운동 같은 것에 첨예한 논리인 체하는 이빨을 드러내면서 욕지거리를 할 뿐인 사람들도 활개를 친다. 그 덕분에 어떤 시위에서 무엇이 이야기되었고, 왜 그걸 원했고, 어떤 사연들이 그 자리에 모였는가는 모두 잊혀진다. 단지 그 현장이 어떠했느냐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국가는 딱히 그 목소리에 대해 반응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통장에 기록되지 않을 부수입만 생각하는 지도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시위나 집회가 정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1987년과 2015년을 그리 쉽게 비교할 수는 없다. 이해 관계는 복잡해졌고, 정부는 눈에 크게 드러나는 악행을 행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의견 표출은 좀더 효율적인 방향을 찾아야 하게 되었고, 광장에서 정부를 욕하며 소리치는 모든 목소리에 동조하다간 시대착오자 내지 이기주의자가 된다. 어쨌든 형식상으로는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적인 국가이긴 하다.
하지만, ‘헬조선’이라는 단어까지 나오고 있는 지금, 완벽하게 우리 사회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분명 많은 변화가 필요한 이 시점에, 지금의 정치 주도 세력은 지나치게 방어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의 국가는 국민의 연대를 만들어낼 만한 시민적 결집력을 제공하지는 않으며, 대신 시위대를 어떻게 감정적으로 자극할지에만 골몰하는 듯하다. 평화적이고 준법적인 시위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에 점점 지쳐가는 사람들은 쉽게 그 먹잇감이 된다.
다른 이들이 무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치 자신은 뛰어노는 원숭이들을 지켜보는 조련사쯤 된 것처럼 말하지 말자. 비이성적이라느니, 너무 감정적이라느니 하면서 비웃지 말자. 누군가가 어떤 일에 대해 감정적이라는 것은 그 일을 진정한 자기 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설악산을 지키려고 케이블카 반대 운동을 하시는 한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분은 지금 비박까지 하시면서 운동을 지속하고 계신다. 환경 보호와 케이블카의 실효성 비판이라는 이성적 이유로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집 밖으로 나오자
이성이 1987년 학생들을 거리로 나오게 할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끝까지 남게 한 것은 동지애 또는 다른 학생들의 희생으로 인한 분노 등이었다. 루마니아에 사는 그녀 역시, 슬픔 때문에, SNS로 회의적인 글을 적는 대신 거리로 나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쓸데없는 짓 한다’고 몰아붙이기 전, 이 질문에 답해 달라. 당신이 원하는 세상은 과연, 모든 사람이 첨예한 논리로 현 상황을 설명하기만 하면서, 아무도 현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만 있는 세상인가?
더 발전할 수 있는 사회를 그대로 둔다는 건 어린아이를 골방에 처넣는 것과 같다. 머리에 귀가 없고 눈이 없고 말초신경과의 접점도 없다면 그 머리는 정상적인 머리가 아니다. 머리로서의 기능을 하기는커녕, 머릿고기를 도려내고 남은 돼지 머리처럼 결국 썩어들어갈 무용지물의 존재일 뿐이다. 머리가 썩어들어가지 않게 해 주어야 하는 건 몸의 몫이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곳의 발전을 이끌어 가야 하는 건 우리 정부고, 그 정부에 매서운 피드백을 가해 주어야 하는 건 법률상 진짜 이 나라의 권력 주체인 우리들이다.
우리 모두 이 사회에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비판할 만큼 똑똑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으면 자신의 생각을 들고, 자신이 생각하는 더 나은 세상의 모습을 들고 밖으로 나오자. ‘colectiv’를 하자. 희망이 없더라도, 우리가 아주 작고 작은 존재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일단 나오자. 그렇게 루마니아의 그녀는 변화를 하나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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