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기 : 일기에 대해 쓰시오

가장 부끄럽지만 가장 친숙한, ‘일기’에 대한 에디터들의 일기

가장 수줍고도 가장 친숙한

하루 일과를 빠짐없이 적고,?그 안에서 친구들에게 귀감이 될 교훈 한 가지씩은 정해야 하며,?잘한 일과 못한 일을 굳이 가려내야 했다.?돌이켜보면,?일기는 풀어야 할 숙제였다.?가슴 속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은 일들이 낭독될까 두려워 숨기곤 했다. (되돌아 보아도?그건 참 잘한 일이었다.)

그래도 일기는, 사람들이 속에 있는 깊은 이야기를 말보다 강하게 깊은 문장으로 풀어내게 만든다. 그 순간만은 그 어떤 힘으로도 적고 싶은 것을 말릴 수 없다.

가장 부끄럽지만 가장 친숙한, '일기' 를 둘러싼 에디터들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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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

-11살,

왜 내 하루 일과를 적은 걸 보여줘야 되지??안 썼다고 처맞고,?쓰면 애들 앞에서 읽어주는 반인륜적 행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15,

안네의 일기를 읽었다.?엄마,?아빠는 내 마음을 몰라준다.?내 친구들은 나만큼 유치했다.?누가 내 얘기를 들어줄까? 창피하지 않게 속 시원히 날 어루만져 줄 누군가가 없었다.?그래서 만들었다.?네 이름은?"MS"

-19,

힘들다.?자꾸 나 자신과의 싸움을 부추기는 어른들한테 개기고 싶다.?어렸을 땐,?그렇게 쓰라고 하더니,?이제 와서 그거 쓰면 대학 보내주냐는 선생들이 얼탱이가 없었다.?사실,?써봤자 해소되는 것도 없었다.?힘들게 펜과 종이에 끄적거려봤자,?나도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논술형 문체.?스스로 오글거리면서 자책하는 말만 늘어놓느니,?구석에 몰래 숨어서 담배 몇 모금 빨아대는 게 더 편안했다.

-22,

오랜만에 느껴보는 익숙한 강압이다.?훈련소에선 수양록을 쓰라고 한다. 5주 동안 빠지지 않고 쓰면 전화라도 시켜주니,?군대가 초등학교보다 기브앤테이크 문화는 잘 갖춰진 것 같다.?근데,?일기를 쓰다가 눈물을 흘려본 적,?그때가 처음이었다.

-25,?

블로그,?페이스북,?트위터? SNS를 내 일기장으로 삼기엔,?보는 눈이 많다는 걸 알았다.?날 위한 일기가 아닌,?남을 위한 일기를 쓰고,?그런 척하는 나를 발견하면서 가끔 쓴웃음이 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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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진

철저하게 사적인 단계에서 사고하고 처리해야 할 사안들이 존재한다.?예컨대 자기 신앙 생활의 진전이나 퇴보,?가정사(家庭事),?아무도 웃어 주지 않을 농담,?알바하는 곳에서 매일 얼굴 보는 사람들에 대한 불평 등등.

2014년에는 정확히 첫?3개월 동안만 일기를 썼는데,?다시 읽어보아도 딱히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 같은 것은 없다.?애당초 일기를 쓰던 그 시점에 모든 기억들이 너무 많았고 저마다 흐리멍텅했으며 글씨까지 더러웠기 때문이다.?그래도 그 석 달간 일기를 쓴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거기 쓰여있지 않은 것은 전부?SNS에 꼼꼼히 기록해 왔고,?거기 써 있는 것 중 공연히 남에게 알렸던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게 너무 가볍게 쉽게 유통되는 지금이지만,?그럴수록 어떤 것들은 온전히 혼자만의 것이어야 한다.?그걸 해내지 못해서 신세 망치는 사람들이 오죽 많은가 말이지.?피카츄란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엄마가 돈벌어서 빚갚쥬”?같은 농담을 만들었으면,?그리고 그게 별로 안 웃기다는 판단을 할 수 있으려면,?역시 그런 건 일기에만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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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새봄

일기를 꾸준히 쓰지 않은지는 오래됐다.?초등학교 시절 숙제로 일기를 써야할 때에도 성실히 일기를 쓰는 타입은 아니었다.?그 이후로 십년.?어떤 누구의 강요도 없어진 지금 일기는 때때로 나를 찾아온다.?이상하게도 행복할 때 일기는 쓰이지 않는다.?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은 소중하지만 또한 익숙해서 그것을 기록하고자 하지 않는다.?나는 분노하고 슬플 때 책상 구석에 있는 일기장을 꺼내든다.

그 일기장 속에서 나는 보통의 내가 아니게 돼버린다.?그렇게 일기장 속에 머리 안의 온갖 소음들을 적고나면 실로 머리는 후련해진다.?그러고 나면 다시 평범하고 나쁘지 않은 시간이 흘러가고 일기장은 다시 잊혀진다.?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이 감정의 배설물들을 나를 아는 누군가가 발견하고 그 주인이 비로소 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사람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하지만 그것은 상상일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오늘도 내 일기장은 책상 구석 그늘과 먼지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있다.


3

정다혜

나를 해칠 힘이라곤 하루살이의 날개만큼도 없는 흰 종잇장과 연필 앞에서,?나는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솔직함과 나약함과 옹졸함을 여과 없이 풀어냈다.?너무 진솔해져버린 나머지 폭력적이기까지 했다.?물론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읽으며 반성도 했다.?큰 시험을 서너 달 앞두고도 아무런 갈피를 잡지 못 했던 때에 일기를 써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고선 며칠 동안 일기를 쓰며 느꼈던 것들이다.

일기장과 거리를 두게 된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다들?sns?하나쯤은 쓴다.?텍스트 화장실에서 나의 가장 여린 모습들이 스크롤바 두어 번 넘기는 행동으로 한없이 가벼워져버리고 마는 상황이 무서워서 남들 쓰는 만큼만 쓰곤 했다.?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게 참 힘들고 무섭다.?어릴 때엔 담임 선생님이 검사하는 일기가 그랬고 지금은 누가 누구인지 희미하게 기억나는 랜선 친구들이 그렇다.?그러면서도 이걸 좋다-나쁘다,?맞다-틀리다,?선뜻 나눌 자신이 없다.?다들 쉽게 생각하고 쉽게 쓰는 걸 혼자 어려워하고 행동 하나하나에 연연해 하는 건 뒤처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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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지금까지도 문구점에 가면 예쁜 공책 하나하나에 충동구매를 하는 나에게 일기는 공책을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핑계였다.?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고민고민해서 샀던 일기장은 세상에서 가장 촌스러운 공책이 되었다.?페이스북 계정을 처음으로 만든 고등학교 때부터는 검은 펜 대신에 키보드 자판에 익숙해졌다.?무엇보다 내가 글을 쓰면 좋아요를 눌러주는 단골 고객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척 좋았다.?

그래도 남보다는 자신에게 허튼소리를 하는 게 익숙해서,?감정적인 저격글보다는 내 자신이 겪은 하루를 문학적인 비유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지만 몇 년 뒤에 다시 보니 오글거리는 말들 뿐이더라).?그 노력이 절정으로 빛나던 순간은 대학교에 들어선 이후였다.?먼저 대학생이 된 형을 보고 어릴적부터 수강신청을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나는 막상 새롭게 시작해야하는 모든 관계가 버거웠다.?

그 고민을 새벽에 엄청 긴 글로 페북에 올렸는데 얼굴만 아는 친구들이 하나 둘 씩 댓글을 달았다. “힘내자,?잘 지내보자.”?그 이후로 친구들은 나를?페북에 글 쓴 애로 알아봐주었고,?그 안면이 지금까지 이어져 대학교에 그럭저럭 잘 적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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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성

누구나 일기를 쓰면서 은밀하게 누군가(그것이 심지어?미래의 나일지라도)에게 읽히게 될 것을 기대하곤 한다.?그래서 일기장에 집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온전한 나만의 것이라는 환상에 집착하는 꼬라지가 영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페이스 북이 더 이상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느니 하는 투정은 유치해 보인다.?애초에 사적인 공간이 될 수 없는 곳에,?누군가 읽어줄 것을 기대하면서 쓴 글들일 뿐이다.?그걸 인정하고 나면 훨씬 편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누군가에게 읽힐 글을 쓰는 것이 두려운 요즘이다.?좋은 말로 하면 글을 읽는 독자의 시선을 염두에 두는 것일 테고,?나쁘게 말하자면 남의 눈치를 보기가 심해진 까닭이다.

(꽤나 비주류적인)?꿈을 좇으며 연을 맺은 사람부터 어린 코찔찔이 시절의 나만을 기억하는 중고등학교 동창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독자들을 떠올리면 아무것도 쓸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그들이 알고 있는 다양한 얼굴을 모두 지키려다보니 두려움은 배가 된다.

그러나 솔직해지자면,?이게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다.?눈 한번 딱 감고 누군가에게는 눈총 받을 각오를 해버리면 그만이다.?진짜 문제는 외려 글을 쓰는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에 있다.?올해를 기점으로 사실상 나의 꿈으로부터 이탈해버리고 난 후부터는 내가 무얼 위해 글을 쓰는지,?글을 통해서 무얼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져버렸다.?그러다보니 늘 글의 결론은 자조적이고 패배적이다.?더 이상 공적인 공간에 글을 쓸 수가 없다.

결국 얼마 전,?그리도 싫어하던 일기장으로 숨어버리는 길을 택했다.?블로그를 하나 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내 생각을 배설하는 화장실 같은 곳이다.?내가 누구인지,?독자가 누구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후퇴고 도피지만,?동시에 짜릿하다.?어쩌면 나는 노출증 환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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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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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말은 하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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