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질문자를 째려보는가
혹시 EBS 질문녀를 기억하시는가. 교육방송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다큐멘터리의 한 실험(?) 장면에 우연히 포착된 어떤 수강생. 수업 중 누가 손을 들고 질문을 하니까 그를 못마땅하다는 듯 째려보는 장면이 방송을 탔고, 다큐멘터리의 맥락 안에서 그녀는 ‘적극적 질문을 혐오하며 그저 침묵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 같은 것의 상징이 되었다.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그녀는 다른 학교에서 학점교류제로 청강 온 처지였으며, 자기가 촬영된다는 걸 안내받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수업 중의 질문은 매우 권장할 만한 일이다. 어떤 수업은 너무 조용해서 내가 공부를 하러 온 건지 오케스트라를 들으러 온 건지 분간이 안 갈 만큼 숨이 턱턱 막히고, 어떤 수업은 이대로 가다간 순 교수님 혼자의 프로파간다로 끝날 것 같은, 그래서 누가 이의를 좀 제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질문도 질문 나름이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풍경을 목도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시사회 GV를 생각해보자. 손을 든 질문자가 일어나서, 또는 무선마이크를 건네받고, 자기 노트북이나 공책을 들여다보면서 열의를 다해 질문을 한다. 매우 바람직해 보이는데 어째서인지 답변을 해야 하는 영화 감독, 작가님 혹은 선생님이 반가워하고 즐거워하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며 애써 웃기만 하는 풍경 말이다.
우리 중 누구도 진심으로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를 혐오해서 침묵하거나 사람을 째려보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가 남는다. 그렇게 눈총을 받을 만한 질문이란 건 어떤 것들일까? 잘난척 쩔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을 회고하며 얘기해 본다.
Type 1: 자기 공부 자랑하는 질문
제일 자주 볼 수 있는 타입이다. 고학번인 경우가 많다. 주로 교수님이 뭔가를 계속 진행시키려는 흐름의 도중에 전혀 예상되지 않았던 것을 물어서 교수님의 집중력을 분산시킨다. “답변이 됐나요?”라는 말로 힘겹게 답변을 끝맺고 나면 그 흐름이 깨져서 헤매는 교수님을 볼 수 있다.
시험에 나오는 것, 강의계획서에 있는 것이 아니어도 물어볼 수는 있지만.
글쎄, 그걸 왜 굳이 수업 한창때 하는지는…
나는 혹시?! 체크리스트
- 수업 중에 한 번도 거론되지 않은 학자의 이름이나 이론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가?
- 지금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를 교수님이 짚고 가셔야 하는데 그냥 지나치실 것 같아서 다급한가?
- 다른 수업/교수님/책/기타 자료에서 먼저 배워 알고 있는 것과 미묘한 차이가 있어 참지 못하겠는가?
- 겸양도 미덕이고, 정말 좋은 포인트라면 교수님도 강의를 업데이트하실 것이니깐, 웬만하면 수업 끝나고 따로 질문드리자.
Type 2: 예습복습을 안 해서 나오는 질문
주로 새내기 학우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 분명히 지난번에 A 얘기가 끝났고 이번 시간부터 B에 대해 배우는 시간인데, (주로) 막판에, 용기를 내어 손을 들고 묻는다. “지금 그게 다 A란 말씀이신가요?” 교수님의 주된 반응은 짧고 허탈한 웃음이다. 그게 예습이 안 돼서 나오는 허당 질문의 경우엔 더 씁쓸해하신다. 왜냐?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 “그건 집에 가서 책을 잘 읽어보면 나올 거에요, 내가 읽어보라고 했는데” 정도뿐이니까.
나는 혹시?! 체크리스트
- 수업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못 알아듣겠는가?
- 교수님이 지금 저 얘기를 왜 하시는지가 전혀 파악되지 않는가?
- 모두가 이 수업 때문에 대혼란에 빠져 있다는 확신이 있는가?
- 그런데도 수업이 계속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 수업자료를 혼자서 직접 확인해 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질문하자.
Type 3: 정리를 안 하고 막 던지는 질문
“아 네 교수님 말씀 잘 들었구요. 그 A란 사람이 B를 말했잖아요. 근데 그 B라는 게 또 C도 있고 D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저는 C는 E의 일종이라고 이해했거든요. 그러면 A는 C나 B를 다 E에 속하는 거라고 봤다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D도 B고 C도 B잖아요. E는 E가 맞는데…”
이런 유형의 질문에 대한 교수님의 전형적인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중간부터 듣기를 포기하고 끝나기만 기다리거나, 곧장 칠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길 잃은 질문을 위해 약도를 그리기 시작하거나.
나는 혹시?! 체크리스트
- 내가 생각해도 엄청 복잡하고 미묘한 질문인가?
- 질문 도중에 어떻게 마무리할지 생각해 뒀던 걸 까먹었는가?
- 자신의 수업 노트 필기가 좀 과하게 많다고 느껴지는가?
- 학부생 수준의 수업 중 질문이 그렇게 거창할 리가 없다. 교수님의 문맥 파악 능력을 믿고, 가능한 짧은 질문을 준비하자.
Type 4: 사담으로 하는 질문
교수님께 특별한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주로 하는 질문이라서 요즘 캠퍼스에서는 제일 희귀한 유형의 질문이다.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막상 등장하면 제대로 눈총을 산다.
내가 마지막으로 학교 수업 중에 들었던 이 유형의 질문은 대략 이런 거였다. 교수님이 무슨 학회에서 자기가 발표하니까 궁금하면 와 보라고 공지를 했더니, 그 다음 주에 (교수님 보기에) 웬 초면의 학생이 대뜸 손을 들고는 그 학회 때 못 물어봤던 걸 질문한다면서 인상적인 발표였다느니 끝까지 못 있어서 아쉬웠다느니 별별 얘길 다 하는 것이었다. 그를 쳐다보는 수강생들이 하나둘 늘어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나는 혹시?! 체크리스트
- 이런 유형은 확실히 예외적 케이스이므로 넘어가도 될 듯하다. “친목질”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라는 점만 짚어두자.
Type 5: 동의를 얻어내려는 질문
역시 흔한 유형은 아니지만 Type 4보다는 더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특히 교수님이 진화론을 강경하게 주장하거나 창조론을 은근슬쩍 지지하는 수업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 유형의 질문을 안 하는 사람은 영영 안 하지만, 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곧잘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말하자면 주관이 뚜렷한 지적 승부사라고나 할까? 하지만 교수님과의 맞짱은 부디 시험 답안지에서만 결행해 주길…
나는 혹시?! 체크리스트
- 지금 교수가 일종의 미신을 전파하고 있는가?
- 내가 배운 건 절대 저런 것이 아니었는가?
- 이 수업이 끝나기 전에 교수의 저 오류를 지적해야 할 것 같은가?
-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일단은 냉정하게 들어 주자. 정 못 참겠다면 사이버 강의실 게시판에서 공론을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다.
더 많은 ‘좋은 질문’을 위하여
오해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분명히 해 두자면, 질문이 없는 것보다는 질문이 있는 것이 낫다. 심지어 어떤 철학자는 “그것에 대해 질문이 가능한지 여부가 곧 그것의 존재 여부이다”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확실히 우리나라 강의실은 질문이 부족하다. 아니, 사실은 이 나라 전체에 질문이 부족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는, ‘좋은 질문’이 모자란 것이 아닐까. 좋은 질문은 좋은 답을 이끌어내며, 그 질문이 없었더라면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을 소중한 것들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그간 수업 때 던졌던 질문들은 좋지 못한 질문일 때가 많았다. 그리고 좋지 못한 질문은 대체로 보람이 없었다.
교수님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묵묵히 최선을 다해 수업을 듣다가, 더 좋은 질문을 더 많이 주고받을 수 있는 대학가가 되기를 바라며, 집에 돌아와 이번 글을 써 올린다. 우선은 내가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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