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활은 운동권 애들이나 가는 거 아닌가요?

농활을 열네 번 가 본 사람이 말하는 농활 이야기

옛날에 농활이라는 게 있었는데 말이야

얼마 전 페이스 북 타임라인에 낯익은 광경이 펼쳐졌다. 밀짚모자를 대충 걸쳐 쓰고, 다들 몸빼 바지를 추켜 입은 채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그래, 매년 이 맘 때면 가곤 하던 가을 농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농활을 열 네번 갔다왔다. 다녀온 날짜를 일렬로 붙이면 너끈히 두 달은 넘을 것 같다. 학교를 떠난 지금도, 대학에서의 가장 큰 추억은 농활에 있다.

처음 농활을 갔던 건 새내기 시절, 2009년 봄이었다. 농활이라는 말이 전설속으로 사라진 학교도 있는가 하면, 우리 학교는 유난히 농활을 많이 가는 학교였다. 수 백의 학생들이 학과 깃발과 먹거리를 바리바리 챙겨 들고 봄 농활을 떠나는 장면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며칠 간 답답한 도시를 떠나 시골 마을에서 함께 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농촌로맨스도 기대했다. 물론 놀랍도록 아무 일도 없었다. ⓒ천재교육

그리고 혹시 모를 농촌로맨스도 기대했다. 물론 놀랍도록 아무 일도 없었다. ⓒ천재교육

엠티와는 다르다 엠티와는

스무 명 넘는 인원을 챙겨야 하는 바쁜 와중에도 학과 선배들은 결코 엠티나 봉사활동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그 이름도 생소한 ''연대''를 하러 가는 거라고 강조하곤 했다. 농활은 ''농촌체험(이나 봉사)활동''이 아니라 ''농민학생연대활동''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서야 농활 가는 버스가 출발했다.

처음 농활에 갔을 땐 그게 뭘 말하는 건지 몰랐다. 그냥 농민들, 친구들과 같이 땀 흘려 일하고 밤에는 함께 술 마시며 어울려 노는 게 좋았다. 학교에 있을 때는 만취 상태에서 귀가하는 시간이었던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는 내 모습도 놀라웠지만, ''이야 진짜 오래 일했다! 이제 점심쯤 됐으려나'' 싶어 시계를 보면 아침 아홉시라 더 충격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 두세시간마다 주시는 새참(과 막걸리) 덕분에 아침부터 밤까지 취해 있을 수 있는 곳. 내게 농활은 그런 곳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하는 느낌''에 취해 있었고, 어렴풋하게나마 이게 선배들이 말하던 연대라는 건가보다 하고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상상했던 나의 농활 모습. 물론 이제는 현실을 안다.

상상했던 나의 농활 모습. 물론 이제는 현실을 안다.

2학년이 되어서도 어김없이 농활 가는 버스에 몸을 싣었다. 드넓은 청보리 밭이 참 예쁜 마을이었다. 그러나 농민회장님과 농민들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했고 마을 곳곳에는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마을의 논밭에 물을 대는 상수원에 대규모 양돈장이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마냥 사람 좋은 웃음으로 ''내 새끼들''하며 챙겨주시던 삼촌은 그날 밤을 새워 양돈장이 아랫마을 농민들의 삶을 얼마나 위협하는지 한탄을 늘어놓았다.

회의 끝에 학과 차원에서 양돈장 설립에 반대하는 시위에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 기껏해봐야 농민들과 수 십명의 학생들 뿐이었고, 지나는 사람도 없는 면사무소에 가서 항의 집회를 갖는 정도였지만 그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그 마음과 경험은 여전히 오래도록 남았다. 시혜적인 봉사활동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함께 부대끼는 ''연대''의 윤곽이 그제서야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았다.

선배, 농활은 운동권 애들이나 가는거 아닌가요?

우리의 경험과는 별개로 갈수록 농활의 여건은 나빠져만 갔다. 괜히 밤마다 모여서 한국 농업의 구조적 문제네, 등록금이 너무 높네 하며 이상한 세미나나 하는 농활이 학교의 눈밖에 났기 때문이다. 학교 입장에서는 농활가는 학생들을 보며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해서 학교순위 올릴 생각은 않고, 이상한 곳에나 힘쓰면서 불만만 많은 놈들이라고 생각했을게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불빛만 보면 달려드는 불나방마냥 농활로 향하는 우리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학교는 팜스테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봉사학점을 주겠다며 유혹했지만 참여자가 적어 곧 폐지되어버렸다. 각자에게 농활의 의미는 조금씩 달랐지만 여전히 수 백명의 학생들이 떼거지로 농촌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사회는 이미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사회변혁과 대의를 이야기하던 대학의 모습은 전설이 되어 사라진지 오래였고, 심지어 학교 내부의 일을 지적하는 일조차도 ''꼰대'', ''운동권'' 낙인이 찍히는 상황에서 학교 밖의 누군가와 ''연대''한다는 건 일종의 금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스펙에도 못 적는 농활이나 가고 말이야

스펙에도 못 적는 농활이나 가고 말이야

그러다보니 농민회와 연대하는 것이 ''정치적''이어서 함께 할 수 없다는 총학생회도 등장했다. 물론 여전히 농활에 가는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농활을 없애겠다고 하지는 못했지만, 농민회가 아니라 지자체를 통해 ''순수한 농민들''과 함께 하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순수한 농민''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가 함께 했던 농민회는 갑자기 ''순수하지 못한'' 농민들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은 정치적인 문제로부터 발생하는 것인데, 정치적인 요구를 한다는 이유로 그들과 연대하지 않겠다니. 농산물을 무분별하게 개방하고, 초국적 자본의 품종을 들여오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결국 그들이 말하는 순수한 농민은, 아무것도 모른 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는 순결한 피해자의 모습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 사회에서 저항하고 소리지르는 사람은, 피해자로 인정받기조차 정말 힘들다.

지난 9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개최한 ''식량주권과 먹거리안전을 위한 2차 범국민대회'' ⓒ연합뉴스

지난 9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개최한 ''식량주권과 먹거리안전을 위한 2차 범국민대회'' ⓒ연합뉴스

술자리에서 티비뉴스를 보다 쌀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 시위 장면을 보게 됐다. 함께 술 마시고, 땀 흘리던 이들이 먼 서울까지 울부짖으며 올라왔을 생각에 잠시 멍해졌다. 올해도 타임라인에 즐거운 농활 사진은 올라오겠지만 그 누구 하나 쌀 개방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농활은 이대로 봉사나 체험활동이 되어버리는 걸까.
나의 농활은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진짜 농활을 가보고 싶은 당신을 위해

막걸리만큼 찐한 연대를 경험하고픈 당신을 위해 소개한다.

1. 강화도 생태평화 농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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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대학의 학생회, 소모임 뿐 아니라 뜻깊은 농활에 참여하고 싶은 학생들이 모여 떠나는 강화도 생태평화농활. 대부분의 농활과 마찬가지로 매년 여름 진행한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팔로우 해놓으면 내년 여름쯤 입질이 올 것이다.

몬산토, 카길 등 초국적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농업구조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환경과 평화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2012년에는 강화군 농민, 주민들과 함께 조력발전소의 문제점을 알리는 문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2. 초록농활
제목 없음

이왕 가는 농활, 강화도보다 더~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면 매년 진행되는 초록 농활도 있다.

주로 반핵, 평화 등의 주제로 농활을 진행하며 원전 건설을 추진했던 삼척, 송전탑 건설로 마찰을 빚고 있는 밀양 등으로 직접 농활을 떠난다. 역시 올해 버스는 떠났으니 농활을 주최하고 있는 청년초록네트워크를 통해 소식을 잘 접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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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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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흑석동을 좋아하는 밥버러지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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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가지는 가장 큰 연례행사다. “요즘이야 의미가 다 퇴색돼 버렸지”, “농활은 운동권이나 가는 거 아니냐” 같은 ‘뒷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지 않은 20대가 학교 농활이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