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전화가 왔다
2013년 초, 부모님이 대만 여행을 다녀온 밤이었다. 어떤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서 일하시는 병원에서 동료 간호사 한 분이 자살했다는 긴급한 연락이었다. 그 내용을 듣자 하니, 이런 것이었다.
고인은 10대 초에 사고로 부친을 잃고 편모 가정에서 경제적 파탄의 쓴맛을 곱씹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간호대학을 마치고 간호사로 분당 모 대형 병원에 입사했다. 그리고 반려를 만나 결혼을 했다. 자녀는 둘을 낳았다. 그 당시 큰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작은 애가 4살이었는데, 직장 동료들이 듣기로 그 남편은 2년이었나, 3년이었나, 그 사이에 네다섯 번 직장을 바꾸었다고 했다.
편모가정에서 딸의 행복한 독립을 위해 무슨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고인을 지배하던 것은 망령처럼 쫓아오는 과거의 빈곤으로부터의 일시적인, 하지만 달콤한 도피일 뿐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고인과 남편과 두 아이는 20평이 안 되는 성남 외곽의 작은 연립주택에서 살았다고 했다. 고인은 병원에서 10년을 넘게 근무하며 직장 동료들로부터 너무나 성실하고 매사에 근검절약한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사실 이건 좋게 포장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고인과 함께 2년여간 파견업체 소속으로 근무하셨던 어머니만 하더라도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도시락 대신 구내식당에 가시는 것을 본 적이 두 번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구내식당에서 동료가 호의를 베풀면 그것은 고인에게 유쾌한 일이 아닌 일종의 부채가 되는 일이었고, 구내식당에 적힌 가격은 고인이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했던 빈궁함과,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타협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어머니께서는 고인이 새 옷을 입은 걸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가난했던 과거와의 독립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던 고인은 어째서 생을 그만두었을까.
내막은 이러했다
2년 만에 네다섯 번 직장을 바꿨다는, 이직이라 부를 것도 아닌 일용근로직이라는 비참한 신분에 속해 옮겨 다녔을 뿐이었을 고인의 남편이 있다. 그렇게 겨우 모은 1억이 든 통장을 보며, 그 돈으로 가족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면 집도 더 넓은 곳으로 갈 수 있고, 좀 덜 고생하고 살 수 있다고,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편의 외삼촌으로 생각되는 한 친척은 목돈에 대한 부부의 꿈을 잘 알고 있었다. 좋은 투자처를 알고 있다며 브로커 역할을 맡았다. 부부는 그 돈을 투자했다. 그리고 언제나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비극이 그렇듯, 실로 교과서적으로 그 돈은 증발했고, 고인은 그 일로 남편과 싸우고, 남편이 잠깐 집을 나선 두 시간 사이, 집에서 목을 매고 말았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사회와 직장의 시스템은 그녀의 삶을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인은 병원 근처에 살았던 간호사였기에 응급 후송이 바로 ‘고인이 일하던 직장’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병원 근로자들이 공유하는 경조사 알림 시스템에 의해(한국의 직장인들에게 관혼상제는 철저하게 직장생활의 일환이니) 고인의 사망은 전파를 타고 삽시간에 병원 전체에 전파되었다. 남편이 반려의 사망을 인정하지 못해 병원에 데리고 왔지만 이미 응급실에선 ‘끝난 일’이었다.
경조사 알림 문자가 병원 근로자들에게 전송된 덕택에 병원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으며, 임원, 과장, 레지던트, 인턴부터 우리 어머니와 같은 의료 관련 파견직, 시설을 관리하는 파견직 어르신들. 모두가 종일 그 진위와 간호사의 평소 처지에 관한 나름의 담화를 나누는 병원은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솔직히, 본인의 가정은 결코 가난하지 않으며, 지금도 가난하지 않다. 어머님이 늦게 퇴근하시는 날이면 아버지가 병원으로 가 두 분이 품위 있게 외식을 즐기기도 하시고, 간간이 드라이브도 가고, 해외여행도 그저 뉴스에서 접하는 일이 절대로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있어 일은 자녀에게 노후를 되도록 의지하지 않고, 자녀에게 품위유지를 위한 자금을 조금 나눠주며 삶의 여유를 더 누리기 위해서 하는 일이었다.
그런 한국의 중산층적 모습을 표본처럼 보여준, 가난하지는 않지만 당신의 아들딸이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도록, 위험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이유로 일하시던 우리 어머님의 모습을 고인은 특히나 부러워했다고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분명 그랬으리라. 고인은 어려서 부친을 잃었다. 고인의 모친 혼자서 4년제 대학교까지 고인의 뒷바라지를 하셨다고 한다. 일찍 돌아가신 부친이 무언가를 남겨줄 수 있었다 할지라도, 고인의 10대는 끝없는 자존감의 상처와 고통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며, 20대는 그런 상처의 연쇄를 끊기 위한 지독한 내적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고인의 모친은 누구의 죄도 아니지만, 딸에게 한없이 미안해 더 몸을 돌보지 않으셨을 거고, 딸은 나이가 들수록 모친을 이해하며 모친과 같은 태도로 삶을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모친은 원하지 않으셨겠지만, 모친의 모습은 고인에게 10년이 넘도록 어떠한 심신의 휴식을 허용하지 않는, 죄책감과 터뜨릴 수 없는 아픔으로 쌓이고, 나아가 근면함을 빙자한 끝없는 심신의 혹사로 이어졌을 것이다. 단지 고인의 죽음에는 단 하나의 계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인에게 1억이라는 통장의 글자는, 자신이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며 살아온 대가로서 아른거리는, 생의 증거이며 자신이 겪어야 했던 어느 순간 사고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였을 것이다. 남편을 위해 남겨진 자식을 위해 살아야 했다? 바로 그 가족이 고인을 더더욱 궁지로 몰아가는 족쇄가 아니었다고, 그 누가 그저 빈말이 아닌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어머님의 표현을 빌리면, 고인은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자신을 불사르며 가족의 기둥으로서 살았다. 물론 고인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집 정도는 쉽게 장만해 줄 수 있는 반려와 만났다면, 삶은 더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인이 남자 보는 눈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예의범절이라는 글자를 아는 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반려자를 잘못 선택한 대가가 죽음으로 이어지다니?
그리고 1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마지막 월세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세 모녀가 있었고, 자신의 장례비와 '팁'을 남기고 삶을 끝낸 노인이 있었다. 실로 허망한 죽음, 그 자체다. 남들이 있는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 어떤 사람들의 삶을, 그것도 다른 사람의 손도 아닌 자신의 손으로 끝내게 하였다.
사회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장례비와 월세를 남기고 가는 품위를 그들에게 권했으며, 동시에 자살은 나쁜 것이라는, 허망한 종교적이며 사치스러운 몇 마디만이 그런 삶이 끝난 자리를 마치 잔향처럼 맴돈다. 물론 그 죽음들의 마무리는 사회적으로 잘 묻혀졌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1년 반이 지났다. 부디 고인이 좋은 곳에서 쉬고 있기를 바라며.
김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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