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학재단 귀하
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아직 9학기 이상도 아니고, 병역도 얌전히 필했고, 학점이 약간 모자라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놀지도 않은, 나름 성실하게 대학 생활을 한 편이라고 자부하는 한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지방을 전전하며 일하시는데, 일의 특성상 벌이가 크게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꽤 오래 전부터 여러 직장에서 경리직으로 맞벌이를 하셨죠. 저도 나이가 찼고, 이제 아버지도 연로하시고 하니 다음 학기는 기왕 졸업예정학기로 보낼 거 학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면서 내 용돈부터 벌어서 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마침 학교 게시판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곰곰이 읽어 보니, 학교에서 일하려면 학교에 지원하는 게 아니라 한국장학재단에 지원하면 되더군요.
그래서 홈페이지에 들어가 지원 창구를 찾아보았습니다. 사이버창구 → 장학/대출 신청에서 “상품” 중 “국가근로장학금”을 선택하는 방식이더군요. 내가 월급을 받는 게 아니라 장학금을 받는 건가 하고 순간 의아했지만, 장학재단에서 고용을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려니, 하고 다시 십분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제 정보를 입력하고, 아버지 정보를 입력하고, 어머니 정보를 입력하고, 그 많은 ‘동의합니다.’ 선택칸을 눌러 일일이 동의하고, 공인인증서 암호를 세 번째 입력해 넣었습니다. 다 끝난 것 같은 화면이 뜨는데, 가구원 정보제공 동의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서류가 제출되었더라도 심사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왠지 당연하게도, 아버지, 어머니, 누구도 “가구원 정보 제공 동의”를 하지 않은 미 동의 상태였지요.
한국장학재단 설립 등에 관한 법률 제50조
① 학자금 지원(제16조제1항제5호에 따른 학자금 지원을 포함한다)을 받으려는 사람은 교육부장관 또는 재단에 학자금 지원을 신청하여야 한다.
② 교육부장관 또는 재단이 제1항에 따른 신청을 받는 경우 학자금 지원을 받으려는 사람과 그 부모 또는 배우자로부터 다음 각 호의 자료 또는 정보의 제공에 대하여 동의한다는 서면을 제출받아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나는 그래서 다음 학기부터 학교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알 수가 없어서 고객센터를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FAQ를 읽어보았는데요
저만 당황했던 건 아니었나 봅니다. 고객센터 → 자주 묻는 질문 메뉴 하단에 나오는 분류 목록에서는 오로지 가구원 동의에 관련된 FAQ만 모아 놓은 목록도 선택되더군요.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물어본 것인지 짐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그 분류 안의 34건의 관련 질문들이, 차마 그 질답들이 오고간 정황을 짐작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제 친구 A는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입원하셔서 수술을 앞두고 계십니다. 갑작스러운 걱정과 두려움으로 시험 범위 기억할 겨를조차 없는 A지만, 어쨌든 살아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안정적인 수입원을 찾아보다가 이제 겨우 국가근로장학금 제도를 알았습니다. 장학재단을 거치지 않고 학교에 곧바로 지원할 수 있는 형태였다면 좀더 유연하게 아버지의 상태를 입증할(또는 양해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애초에 아버지의 안부를 채용 과정에서 고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A는 이제 어디서 어떻게 발급받는지도 모르는 “개인정보 동의서”, “금융정보 동의서”와 함께 아버지의 수술 확인서 내지 입원 증명서를 떼어다가 마감 전까지 장학재단에 제출해야 합니다. 시험 범위 한 번 제대로 훑어보지 못한 A군이 직접 말입니다.
Q. 부모님이 해외 체류(또는 외국인)가 아닙니다만, 특별한 사유로 온라인 동의가 불가능하고 오프라인 동의만 가능합니다.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
A.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는 학자금 신청 상담 후, 상세사유 기재 및 증빙서류 등록과 함께 「개인정보 동의서, 금융정보 동의서」를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오프라인 동의를 할 수 밖에 없는 증빙서류로는 입원증명서, 수술확인서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제 학교 선배 B는 어머니와 오랫동안 싸웠습니다. 여고를 졸업하면서는 아예 절연 선언을 하고 뛰쳐나와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버지가 몰래 주시는 용돈으로 자취 생활을 이어왔습니다만, 아르바이트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그 경위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더 말할 수가 없군요) 상황이 되어 근로장학생을 하려고 합니다.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의 한 마디 건네지 않은 어머니이지만 그는 어머니에게 찾아가, 혹은 전화를 해서, 공인인증서든 무슨 증빙서류든 발급해 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세상 무서운 것 없는 천하의 B선배지만 그 순간만큼은 비굴할 정도로 싹싹해지겠죠. 그 서류가 있어야 일을 해서 돈을 버니까요.
Q. 부모님과 사이가 나쁩니다. 반드시 동의 받아야 하나요?
A.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면 동의대상입니다. 부모님과 학생과 사이가 나쁜 것을 사유로 동의제외 요건이 아님을 양해바랍니다.
제가 아는 신입생 C는 부모님이 사실상 이혼 상태입니다. 벌써 십수 년째 아버지를 만나본 적이 없는 녀석이죠. (사실 이런 얘기는 저를 포함한 C 주변 극소수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C의 어머니가 C를 앉혀놓고 눈물로 하소연하시더랍니다. 네가 대학을 졸업하려면 아직 3년이나 더 남았지 않느냐, 그런데 엄마는 솔직히 너와 단둘이 이렇게 사는 것만도 벅차다, 널 어떻게든 공부 시켜서 졸업시키고는 싶지만, 솔직한 엄마 심정으로는 네가 자퇴를 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C는 지금 무너지는 마음으로 근로장학금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맞습니다, 가구원 정보제공 동의의 조항에 걸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Q. 사실상 이혼상태인 부 또는 모 중에서 금융정보제공 동의를 거부하는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요?
A. 법적으로 이혼관계가 아니라면 부모 모두가 가구원에 포함되어 「개인정보 동의서, 금융정보 동의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부모가 동의를 거부하는 경우 학자금지원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례들도 읽어보았습니다. 부모님이 외국인이신데요, 배우자가 군대에 가 있는데요, 아직 배우자와 혼인 신고를 안 했는데요, 부모님은 차상위계층이 아니지만 저는 차상위계층으로 살고 있는데요, 부모님이 신용불량자이신데요… 그 한두 줄 행간 사이에서 어떤 인생들이, 어떤 사연들이 생략되었을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아 어려운 와중에 심지어 어떤 부모님의 질문으로 추측되는 FAQ도 눈에 띕니다.
“예전에 아무개 학생을 위해 가구원 동의를 해 주었습니다. 그걸 이제 취소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무슨 사연일까요. 저는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이 공개서한을 읽고 있는 어느 비관계자라도, 흔히 하는 말로 삼척 동자라도, 이것이 별로 공개적으로 ‘자주 묻는 사례’에 올라야 할 만큼 알려질 만한 일은 아님을 능히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오직 한국장학재단 관계자 여러분만이, 그런 감수성을 결여하신 것 같습니다.
한국장학재단 법률 시행령 제33조의 5
② 제1항에 따라 학자금 지원을 받으려는 사람과 그 부모 또는 배우자는 법 제50조제2항 각 호 및 제33조의7제1항 각 호의 자료 또는 정보의 제공에 대한 동의서면을 교육부장관 또는 재단에 직접 제출하거나 정보통신망을통하여 제출하여야 한다. 다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우편 또는 팩스를 통하여 제출할 수 있다.
1. 해외 체류 등의 사유로 직접 또는 정보통신망을 통한 제출이 불가능한 경우
2. 학자금 지원을 받으려는 사람의 부모 또는 배우자가 외국인으로서 직접 또는 정보통신망을 통한 제출이 불가능한 경우
3. 그 밖에 교육부장관 및 재단이 직접 또는 정보통신망을 통한 제출이 곤란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정말 당신들은 우리 집안 사정이 궁금하신가요?
좋습니다. 백보 양보해서 일반 장학금 심사에 있어서는 “학자금 지원이 더욱 투명하고 공정해”지기 위해서, “일부 고소득자들이 지원 받던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금융부채가 있는 어려운 가구의 경우에는 학자금을 더 많이 지원받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가구원의 소득 여부나 과세 여부나 재산 여부 같은 걸 볼 수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원리가 왜 국가에서 관리하는 각 대학교의 근로장학생들을 선발하는 데까지 이용되어야 하는지는, 납득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일단 어머니 공인인증서 서명을 먼저 받으려고 거실에서 쉬시던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어머니는 전말을 듣더니, 이게 뭐 하는 짓이냐시면서 벌컥 화를 내시더군요. “아니, 근로장학생을 한다는 게 그렇잖아. 오죽 어려우면 학교비(등록금) 그거를 갚기가 어려우니까 일을 해서 벌충을 하겠다는 건데 그런 (사정의) 집의 부모가 그런 거 (발급 및 동의)해 줄 시간이 어딨냐고. 젊은 애들이야 다 대학 다니면서 (어떤 경로로든 발급을 받은) 자기 공인인증서가 있을 수 있지만, 부모들 동의라든가 그런 건 다 서류로 검토하게 해 줘야지, 이거 순 (장학금 등의 혜택을) 안 주겠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
흥분한 어머니를 진정시키면서 문득 한 포스터가 생각났습니다. 언젠가 우연히 지나치면서 보았던, 그래서 선명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진만큼은 또렷이 기억나는 포스터입니다. 양복 입은 “아버지”, 집안일을 할 것 같은 차림의 “어머니”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모델이 하나같이 웃으면서 손가락을 모아 뭔가를 체크하고 있는 저 사진을 보고 있으면,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대로, 한국장학재단의 의도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장학재단 관계자 여러분께는 대단히 유감입니다만, 어쩐지 당신들이 생각하시기에 국가장학금이란 결국 저런 구성원으로 잘 구성된 집이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인 모양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버지가 외국에 계시면, 부모님이 이혼이나 별거를 했다면, 배우자와 제대로 된 혼인을 아직 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손가락을 모아 함께 뭔가를 클릭하지 못하면 학교에서 일할 자격이 박탈됩니까?
당장 뭔가를 바꿔 달라는 식의 무리한 요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좀 알아달라는 겁니다. 가구원 동의를 공인인증서로 처리하는 것은 좋은 방식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근로장학생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이 과정은 포스터가 약속하는 유쾌한 과정이 결코 아니며, 따라서 다른 서류상 방식이나 과감한 생략이 있었으면 하는 절차라는 점입니다.
대답해 주세요.?정말 당신들은 우리 집안 사정이 궁금하신가요?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아 보이거든요. 제가 보기에 당신들은 우리 가족의 진짜 사정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고 그저 우리 ‘가족’의 공인인증서라는 열쇠만 원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 열쇠는 한없이 편의주의적이지요. 그것만 일단 얻어내면 원 클릭으로 재산세, 소득세, 어떤 자료든지 긁어온 다음 기계적으로 1분위 2분위 구분할 수 있고, 그러면 “더욱 투명하고 공정한” 학자금이나 장학금이 지급될 수 있다고 보시는 것 같아요. 글쎄요, 너무 투명해서 우리 집안의 불편한 점, 부끄러운 점까지도 굳이 보거나 보여야 하는 과정 같아 보이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저보다 더 비참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미래를 바라보며 대학 생활을 꾸려 가고 있는 숱한 예비 근로장학생들이, 가구원 동의 현황 메뉴를 열어볼 때마다 어떤 기분일지 저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장학재단 관계자 여러분, 이제 당신들이 진지하게 이 문제를 재고해 보셔야 할 때임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누가 학교에서 일하고 싶다는 말을 꺼낼 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려니 하면 되는 것이지, 그 사정이 뭐냐고 부모님 모셔오라고 두번 세번 묻는 건 아무래도 인지상정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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