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와 윤제균의 어떤 만남
두사부일체, 색즉시공,1번가의 기적, 낭만자객, 그리고 해운대까지. 윤제균 감독의 빛나는 흥행실적이 담긴 궤적이다. 저 영화들을 언급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윤제균 감독에 대해서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생각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2014년 12월. 윤제균 감독이 이번에는 '아버지 세대'를 키워드로 삼아서 <국제시장>으로 돌아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흥남 철수로 이북에서 내려와 부산의 국제시장에 정착한다. 아버지와 떨어지고, 홀로된 어머니를 대신해 생활비와 동생의 학비를 대야 해서 베트남 전쟁에 뛰어든다. 서독에 광부로 파견을 간다. 반려를 만난다. 어떻게 어떻게 살다가 이산가족 상봉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좋은 요약이다. 아마 이것과 유사한 삶을 산 사람이 한국에 수백만은 되지 않을까. 좋은 신파고, 좋은 감동이다. 있는 사실을 구태여 부정할 필요는 없다.
CJ는 1천만 관객을 자신했다. 그럴만도 하다. 최근 'CJ'식 성공공식과 많이 닮아있는 작품이며, <해운대>보다 나은지 어쩐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떠한 종류의 강렬하고 명확한 감성 코드가 존재하는 영화다. 여기에 문화컨텐츠 전반적으로 복고적 컨텐츠의 지분 증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경향과, 시사회의 기자들 역시 1천만을 자신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포레스트 검프> 코리안 에디션이란 말은 헛말이 아니다.
다만 '요즘 것들' 중 한 사람으로서 이 영화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이 든다. 나는 모든 창작물이 정치적 맥락이나 물적 토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각종 이해관계 역시 반영된다고 믿는다고 믿는다. 이런 면에서 <국제시장>을 단순히 어른들에 대한 감성적인 'CJ식 최루탄'(잘 만든 최루탄이긴 하다)을 팔고 있다고, 만 하는 것은 너무 협소한 질문이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결과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어떤 방향이냐고.
정말 순수하게 즐기면 되나요?
좋다. 영화의 의도대로 현대의 청년들이 격동의 세월과 늙어버린 아버지의 기억을 바라보며,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는'것. 비록 그 이해는 노인 지하철 무상이용을 위한 늘어나는 부채와 노년층 복지부담을 견디고, 어르신을 보면 90도 인사하고, 국민연금 내라면 입이나 다물고 내는 그런 종류의 실물적 기반에 기초하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건, 이 영화가 단순히 그런 꼰대이즘과 신파의 혼종만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영화 속 '아버지'의 ?모습이 현실과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베트남전 파병은 경제 건설과 외화 벌이를 위한 목적이 컸다. 정부가 동맹국의 군사적 필요에 대응하여, 미국 시민들 대신 살인의 과업에 사람이 수출된 것이었다. 서독 이민도 그러하였다. 60년대 초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실업자를 선진국의 3D 업종에 팔아넘겨 복지 부담을 덜고, 외환을 얻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들은 광산에서 겪을 수 있는 각종 산업재해를 당했지만, 독일 광업회사는 마치 지금 한국이 외노자를 다루듯 보상을 주지 않고 후려칠 궁리만 할 뿐이었다. 덕분에 당시의 광부들에게 장애는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간호사가 된 여성들은 어떠한가. 향수병으로 인해 정신착란에 빠진 사람이 많아도 국가는 개인의 문제로 취급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베트남 혹서의 전장과 서독의 갱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단지 정말로 죽이고 죽느냐, 아니면 죽을 만큼 힘드냐의 차이였을 뿐. 경제 건설과 조국 근대화라는 이명,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오듯이 '아버지'는 독일에 이끌렸고, 누군가는 성공했지만 많은 사람은 버림받았다. 그 와중에 조국은 어땠을까. 정치적 반대파와 못 살겠다며 파업을 한 노동자들은 린치와 고문에 시달렸으며, 그렇게 얻은 질서와 외환은 경부고속도로와 산업보국의 주체인 재벌로서 탈바꿈하였다. 공교롭게도 그 와중에 일어난 주체 중 하나가 바로 <국제시장>을 배급하는 CJ 이기도 하다.
정작 나와 '아버지'를 멀어지게 하는 자들
<국제시장>이 그리는 역사는, 국가가 근대화의 이름으로 '아버지 세대'에게 행해졌던 구조적 폭력이 철저하게 탈색되어 있다.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선택해야 했던 일이며,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곧 아버지의 위업에 대한 모욕이자 배부른 소리로 취급되게 한다.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어색하게 국민의례를 하는 그 한 장면만이, 마치 윤제균 감독의 마지못한 변명처럼 들린다. 자신이 과거를 윤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 세대이해를 꿈꾸는 것이라는.
그렇다면 이 사실과 탈색 사이에서 웃고 있는 건 누구인가. 살인과 폭력의 대가를 선진국에게 넘기고 '문제'를 처리한 정부, 그리고 그 위대한 아버지 세대의 피값으로 대재벌이 되어 청년에겐 프로파간다를 팔고, 노인들에겐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기억을 추억과 위대한 업적으로 포장해 돈까지 받고 팔아넘기고 있는 배급사뿐이다.
과연 청년을 떠나, 그 산업화를 일구어낸 세대는 구조적으로 내몰렸던 과거의 기억에 대해서 "이만하면 잘 살았지요"라고 말하는 덕수의 대사밖에 받을 것이 없었는가? 산업화 세대는 조국 근대화와 부국강병만을 위해 자신을 바친 것이 아니다. <국제시장>의 카피라이트가 그랬듯, 그런 40년을 견디게 만든 건 그들이 가족의 가장이었으며, 가난이 싫었고 지독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 사람들이라는 데에 있다. 이 영화의 '비정치성'은 그렇기에 더욱 지독하다. 무엇이 아버지 세대에 대한 감사일까. 아버지 자신이 치른 고역을 어떠한 정책을 통한 보답이 아닌 자기가 돈을 내고 영화를 보는 것?
그리고 남은 이야기
이 영화 이후 '우리 때는 이랬다'는 꼰대 아저씨가 늘어나긴 하겠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베트남으로 떠나 고엽제를 얻어맞은 참전용사, 금의환향이 아닌 타향의 개척자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뿐만이 아니라 자국의 하층민에게 강요되어야 했던 폭력과 비인간성에 대해서 아무런 의식없이, 감동과 웃음으로 윤색하는 누군가를 응시해야 한다.
결국 영화는 '덕수'가 말하는 '덕수'의 서사가 되지 못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용납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자본이 이용하는 '덕수'의 서사는 훌륭하게 노인과 청년을 분할해 지배하려 든다. 이 와중에 인간의 존엄과 더 나은 처우는 어느새 마치 누군가는 얻을 자격이 있고 누군가는 얻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세대를 막론하고 다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포레스트 검프>라 칭송하는 평가는 그럴듯한 하지만 동시에 청년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대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희생자였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모욕이다. 난무하는 세대담론은 시시하지만 세대담론을 소재로 정치와 역사를 윤색하고 사회적 맥락을 숨기는 것은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된다. 그렇기에, 나는 <국제시장>의 대박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
김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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