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1일, 세인트 매리스 스타디움.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사우스햄튼 FC의 잉글리쉬 프리미어 리그 최종라운드, 상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빅클럽. 경기결과는 일 대 일 무승부였다. 팬들은 실망하지 않고 이내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사우스햄튼의 최종 성적은 리그 8위. 승격 두 시즌 만에 이룬 쾌거였다. 비록 ‘꿈의 무대’인 유럽대항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불과 3년 전만 해도 3부 리그를 전전하던 팀이던 걸 생각해보면, 크게 아쉬울 결과는 아니었다. 팬들은 기뻐했고, 또 즐거워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쁜 소식임과 동시에 나쁜 소식이었다. 팬들의 마음속에서는 어떤?불안감이?피어나기 시작했다.
1600억 짜리 엑소더스의 시작
그리고 그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되어 다가 왔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토트넘 핫스퍼, 아스날 등 빅클럽들의 ‘합법적 약탈’이 이어졌다. 돈만 있다면, 사오지 못할 ‘약팀’의 선수들은 없었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심판’이었다. 감히 빅클럽들의 자리를 위협한 죄. 그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리키 램버트와 데얀 로브렌, 루크 쇼와 아담 랄라나, 칼럼 챔버스 등 13-14 시즌에 리그를 30경기 이상 소화한 선수만 다섯이었다. 훌륭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팀을 안정적으로 이끌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마저 ‘빅클럽’으로 그 적을 옮기고 말았다. 잉글랜드의 현지 언론들은 이를 두고 엑소더스(exodus, 대탈출)라고 명명할 정도였다. 그렇게 사우스햄튼이 선수들을 떠나보내고 받은 이적료는 약 1억 파운드, 한화로 1600억에 가까운 돈이었다.
사실 시즌 동안 좋은 폼을 보이던 선수들이 ‘빅클럽’으로 이적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알만한 스타들을 이야기해보자.
머지사이드(Merseyside) 주에서 나고 자란 에버튼의 로컬보이(였던) 웨인 루니를 상기해보자. 그는 프로데뷔 후 첫 두 시즌 동안 에버튼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친 끝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해 갔다. 그의 이적을 지켜보던 빌 켄라이트 에버튼 구단주가 이적 협상 테이블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건 이미 많이 알려진 에피소드다.
스페인 라 리가에서 뛰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의 가레스 베일도 마찬가지다. 그는 당시 2부 리그에 있던 사우스햄튼에서 수비수로 데뷔해 ‘프리킥 스페셜리스트’로 이름을 알리는 등 인상적인 시즌을 보냈다. 여러 스카우터의 눈길을 사로잡은 그는 결국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했다. 안드레 비아스-보아스 감독 체제의 토트넘에서 그는 ‘미친’ 활약을 펼쳐 ‘빅 클럽’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게 된다.
공 위에 선 거대자본
빅클럽들이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는 게 나쁜 일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선수에게 '유럽대항전'이라는 큰 무대를 제공하는 동시에, 더 높은 주급을 보장해 줄 수 있으니까. 그러나 거대기업의 축구사업 진출로 약간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EPL을 예로 들어보자. 맨체스터 시티에는 윌프리드 보니가, 첼시에는 로익 레미가 3(혹은 4)순위 스트라이커로 자리하고 있다. 웬만한 구단에서?주전으로 뛰던 그들 아닌가. 그들은 디에구 코스타나 세르히오 아구에로, 에딘 제코가 부상으로 경기에 나오지 못할 때에야 출전할 수 있다.
그 결과, 축구의 매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면 너무 지나친 과장일까. 이미 우리 삶 속에서 활기를 띄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자본주의의 룰(rule). 나는 이 룰을 깰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곳이 축구장 위라고 생각했다. 약팀도 강팀에게 승리할 수 있다. 그렇게 '언더독'의 위치에서 강한 팀에게 승리를 거두는 '명장'들의 전략과 전술은 팬들을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요즘의 축구는 전략과 전술 위에 '자본'이 더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축구계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구단이 바로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다.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맨시티는 어느새 프리미어 리그의 빅4로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10년 전만 해도 맨시티는 말 그대로 딱 중위권 구단이었다. 맨시티의 오랜 팬이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10위를 하는 것도 대단한, 그런 구단이었단다.?이때 맨시티를 ‘구원’한 이가 그 유명한 '만수르.' 풀네임으로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이다.
오일머니, 그라운드를 뒤덮다
30조 원, 그리고 1,000조 원. 만수르 개인, 그리고 그의 가문이 가진 재산의 액수다. 이런 만수르가 맨시티를 매입하자, 맨체스터 시티는 하루아침에 '부자구단'이 되어 버렸다.
08-09 시즌의 시작과 함께 호비뉴를 영입해 그 현질의 시작을 알렸고, 이어 09-10 시즌엔 카를로스 테베스, 엠마뉴엘 아데바요르, 로케 산타 크루스, 뱅상 콤파니, 파블로 사발레타를 영입했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제롬 보아탱, 야야 투레, 다비드 실바, 에딘 제코 등 축구 팬들이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결국 10위에서 5위로, 5위에서 3위로 뛰어오르더니 마침내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젠 어떤 구단도 쉽사리 무시 못 할 클럽이 된 것이다.
첼시의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 역시 막대한 부를 지닌 인물이다. 물론 첼시가 맨체스터 시티처럼 강등권을 맴돌던 팀은 아니었으나, 스쿼드와 구단 시설, 주변 환경 등에 그의 '돈'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페트르 체흐, 디디에 드록바, 마이클 에시앙, 아르엔 로번과 미하엘 발락 등의 선수들이 로만 이후의 첼시가 영입한 선수들이다. (셰브첸코나 토레스도 있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대상을 EPL만으로 한정한다고 해도, 리버풀의 존 헨리(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 토트넘의 조 루이스(ENIC 그룹) 등 부자들이 소유한 소위 빅클럽의 재력은 엄청나다. 부유한 구단주를 소유한 구단은 계속해 좋은 선수들을 공급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좋은 성적을 얻어낼 수 있는 기반이 있지만, 가난한 구단은 좋은 선수를 영입해 올 여건이 되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빅클럽이 구단의 ‘에이스’를 데려가는 걸 막을 길이 없다. 그냥 선수가 자기 팀의 광팬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지.
만수르와 로만 같은 거대한 자본을 등에 업지 않는 이상, 영국의 흔한 중소규모의 클럽이 ‘뻔하지 않은’ 성적을 얻기는 힘들게만 보였다.
소튼의 ‘예정된 추락’ 그러나…
사우스햄튼. 줄여서 소튼도 마찬가지였다. 13-14 시즌이 끝나자 팀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감독과 주축 선수들이 ‘빅클럽’으로 떠나버리자, 미드필더 모르강 슈나이덜린은 자신의 빅클럽 이적을 막는 팀에게 불만을 드러내며 훈련을 거부하기도 하는 등 선수단의 분위기는 땅에 떨어졌다.
심지어 구단용품 제작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선수들은 구단 자체 제작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해야 했다. 악재는 계속된다. 팀을 운영하던 회장 코르테스마저 14년 1월 구단주 카타리나 리베르와의 불화로 사우스햄튼을 떠나며 팀은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을 때까지 추락하는 듯 했다.
시즌 첫 경기가 다가왔다. 전통의 명가 리버풀과 사우스햄튼의 경기. 장소는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 아담 랄라나와 리키 램버트, 데얀 로브렌 등 지난 시즌 소튼의 주축이었던 선수들이 적이 되어 돌아온 경기였다. 드라마는 없었다. 너무도 현실적으로 이 경기에서 패하면서 소튼은 ‘당연한 수순’을 걷는 듯 했다. 그러니까,?다시 ‘약팀’으로, 또는 강등권을 전전하는 팀으로의 회귀.?축구 전문가들은 소튼의 회생이 쉽지 않을 것이라 말했고, 나와 내 친구 역시 “소튼, 강등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라고 비관했다.
그러나 소튼은 그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었다.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패한 이후로 승승장구하며 박싱데이 전까지 우승후보 첼시를 추격했다. 12월 이후 빅클럽들을 만나 패하며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이내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지금, 소튼은 ‘그’ 첼시와, ‘그’ 맨시티의 뒤를 바짝 쫓는 리그 5위를 기록하고 있다.
사우스햄튼, 그 흥행의 의미
소튼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몇 개 꼽을 수는 있겠다. 감독을 보는 안목, 적절한 선수 영입, 그리고 무엇보다 훌륭한 유스 시스템(소튼은 시오 월콧, 알렉스 옥슬레이드-챔벌레인, 레온 베스트, 웨인 브릿지 같은 선수들을 배출했다.) 까지. 여기에 때마침 일어난 경쟁팀의 부진 등 ‘운빨'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지금의 소튼이 보여주는 폼과 성적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소튼의 선수를 영입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아스널, 토트넘 모두 사우스햄튼의 발밑에 있거나, 비슷한 승점을 기록하고 있다. 돈이 지배하는 잉글리쉬 프리미어 리그에서 ‘돈 없는 구단’이 생존을 넘어 경쟁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소튼의 존재 자체가 ‘머니 게임’이 되어버린 축구판이라는 호수에 던져진 하나의 돌멩이가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직은 작은 파문이며, 작은 놀라움에 불과하겠지만, 이런 ‘약팀’들의 반란이 축구팬들에게 진짜 ‘축구’를, 돈 대신 전술과 전략이 앞서는 축구를 찾아다 줄 시발점으로 우리에게 기억될지도 될지 모른다.
물론, 모든 약팀이 사우스햄튼이 될 수 있으리라는 쉽고 편한 낙관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의 소튼이 이 상승세를 이어나가, 어느 약팀도 언제까지나 약팀이기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아마 순위를 꾸준히 유지한다면, 리그컵 결과에 따라 6위까지 주어지는 유럽대항전(챔피언스리그, 유로파리그)에 진출하게 될 가능성이 크고, 사우스햄튼의 로날드 쿠만 감독은 또 다른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들이 건승해 나가기를 빈다.?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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