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줌마와 함께하는 저녁식사
토요일 오후?2시. 겨우 눈을 떴다. 배는 고픈데, 집엔 딱히 먹을 게 없고, 그나마 있는 콘프레이크나 먹으려했지만 우유가 없다. 나가자니 춥고 귀찮다. 습관처럼 TV를 켜고, 밥 대신 콘프레이크를 우적우적 씹으며 채널을 돌린다.?마침 요리의 신 ‘차줌마님’이 나오는 <삼시세끼>가 재방 중이다. 차승원이 돼지고기에 양념을 넣고 슥슥 볶아 제육볶음을 만들어 낸다.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낸다.
대박 맛있겠다. 나도 먹고 싶어ㅠㅠ
TV속의 그들은 제육볶음을 먹고, 그런?그들을 보며 나는 우적우적 프레이크를 씹는다. 우린 서로 다른 걸 먹지만, 내 마음만은 벌써 저들과 함께 제육볶음을 씹고 있다. 차승원과 유해진과 호지니가 따뜻하고 겹게 식사를 하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진짜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처럼 정겹고 따뜻하다. ?그리고, 아마 엄마는 이런 나를 보고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겠지.
외로우니 시청자다
그 때는 몰랐다. ‘남 노는 걸 보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일상을 이렇게나 침범할 줄은.?처음엔 ‘결혼’을 보여주던 텔레비전은?2010년엔 ‘테이스티로드’라는?이름과 함께 '맛집’을 대신 찾아가주었다. 맛있게 먹는 연예인들을 보면, 나는 삼각김밥을 씹고 있어도 어쩐지?기분이 좋았다.?다음엔 ‘육아 프로그램’이었다.?결혼할 나이가 가까워진 언니들의 카톡 사진은?온통 윤후로 바뀌었고, 사랑이의 애교짤이 페이스북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
그뿐인가. TV는 이제?‘여행’(꽃보다 할배, 2013)과 ‘동거’(룸메이트2014), 그리고 ‘귀촌’(삼시세끼 2014)까지 대신 하기 시작했다. 현실에선 해외여행을 떠나기 위해 몇 달의 알바를 하며, 실제 나는 삼시세끼를 지어먹을 시간도 없었지만, 방송 속의 일상은 참으로 행복하고 편리했다. 그렇게 집에 편히 앉아서 맛있는 걸 먹고, 연애하고, 도전하고, 여행을 가고, 아이를 돌보고, 전원의 여유를 즐겼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도 그랬다.?편의점에서?라면을 사들고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보지 못한 먹방 프로그램을 찾아보다가 문득 내가 지금 뭐하는 걸까, 하는생각이 들었다. 배는 라면으로 채우고, 마음은 방송으로 채우는 현실이 웃기면서도 슬펐다. 하지만 그렇다고 ‘티비를 끄고, 요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시간은 벌써 늦었고, 내일은 또?출근을 해야 했다.?적어도?방송을 보는 동안엔 이런?‘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
?물론 주말에 시간을 내어 장을 보고, 미리 요리를 해두고, 아침에 좀 더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한다면, 삼시세끼를 챙겨먹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한 끼를 챙기는 것보단, 야근에 지친 몸에게 늦잠을 허락하며?한 끼를 굶는 게 더 편하다. 물론 이게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하지만 현실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지금 내가 즐길 수 있는 행복'이다.
TV말고 누가 날 위로해준다니
노력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준비하기 전까진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 정도 일상이야 노력하면?얻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모순적으로도, 우리는 이제 그 ‘일상’을 누리기 위한 ‘노력’을 하느라 일상을 소비하고 있다. 잠잘 집, 삼시세끼, 친구와의 관계, 연애, 결혼, 아이, 행복한 가족, 그리고 내 꿈까지 ㅡ?그 모든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린 오늘의 소소한 일상을 포기한다.
그러니 어느 누구에게 ‘대리 만족’이 가짜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미디어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을 이용해 시청률을 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사람들은 그 ‘잃어버린 것’을 보여주는 미디어를 통해 아무도 주지 않는 위로를 얻는다.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갔고, 벌써 아쉬운 예고편이 나오고 있다.그렇게 맛있게 느껴지던 콘프레이크의 과한 단내만이 갑자기 입 안에 맴돈다. 시간은 벌써?6시 반. 창밖은 벌써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던 기분이 가라앉으려는 순간, 재빠르게 날 즐겁게 해줄 프로그램을 찾아 채널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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