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먹어 보면, 의외로 “병맛”이 아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웃을 일 넘치는 SNS도 그런 것 같다

야 너네 본편을 보기는 보고 얘기하니?

처음부터 이런 제목 이런 칼럼을 쓸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일드’가 보고 싶어졌다. 이유도 단순했다. 안 본 지 꽤 됐으니까. 말도 안 되는 서민적인 상황극, 뻔한 연애담 없이 진행되는 이야기, 세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연출과 시선, 그런 게 그리웠던 것 같다. 너무 생소한 건 싫고, 적당히 재밌을 만한 게 뭐 있을까 찾다가… 데스노트 2015년 드라마판이 제작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래? 반응을 살펴볼까?

흔한 원작 팬의 멘붕

아니 이게 뭐야.

이번에 나온 드라마판 데스노트에 대해서는 인터넷 세상의 모두가 확실하게 합의하고 있었다. 그 똑똑하고 잘났던 야가미 라이토가 아이돌이나 쫓아다니는 멍청이로 돌아왔다고. 그리고 원작이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고. 잘 걸렸다 싶었다. 원작은 마침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원작이 있는 드라마가 작품을 열화시킨다는 것쯤은 일드 시청자에게는 상식이니까. 그 열화된 병맛이 아주 기대가 되었다. 시청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한 편씩 보기 시작했는데…

데스노트 드라마 5화 캡처

ⓒntv.co.jp

…결과는 실패였다. 그러니까, 그냥 재밌게 보고 말았다. (사실 지금도 마지막회를 기다리며 그냥저냥 재밌게 보고 있다.)

분명 저 짤 속 문제의 장면이 1화 맨 처음에 나오긴 나온다. “와!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병맛이다!”라고 외치며 좋아하기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 한순간은 훅 지나가 버리고, 이어지는 45분 동안, 그리고 회차를 거듭할수록, 이 드라마는 지극히 평범하고 합리적인 ‘범죄물 일드’의 왕도를 걷는다. 주인공은 그렇게까지 ‘사기캐’가 아니고, 주인공의 아버지는 일본 드라마에 정말 흔하게 나오는 경찰 일이 바쁜 가부장이다. 어떤 것들은 만화에서나 받아들여질 뿐 실제 배우가 연기해야 하는 화면 속에서는 “에이 저건 말이 안 되지”라고 느껴지게 되는데, 그런 요소는 단 1초도 등장하지 않는다.

최근에 방영된 10화를 봤다. 이제 막 모든 숙적이 제거되려던 차에 라이토가 그 아버지에게 정체를 들키는 이야기다. 여러분은 아마도 그 본편보다 “데스노트_드라마_근황.jpg”로 돌아다니는 위의 짤을 먼저 보셨겠지만, 대단히 유감이다. 위의 9컷은, 이 짤방이 일축한 것과는 매우 다르게, 당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진지한 장면이다.

아버지 역의 마츠시게 유타카가 배신감과 분노를 못 이겨 라이토의 이름을 무섭게 외치며 한바탕 꾸짖는 장면이, 그의 이름의 마지막 획 긋기를 앞두고 두 사람이 나누는 처절한 말싸움이 저 짤에서는 완벽하게 편집돼 있다. 그가 자기 이름을 적는 것 역시 라이토의 일그러진 정의를 바로잡아 주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이건 하나도 병신 같은 전개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렇게 급전개도 아니었다.) 그런데 본편을 보고 나서 사람들이 이 짤만 돌려보며 한바탕 “ㅋㅋㅋㅋㅋ”로 조리돌림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역으로 내가 오잉???인 것이다. 야 너네 이거 보기는 보고 얘기하니?

 

‘캡쳐’와 ‘짤방’으로 구축되는 현실 보완 계획

데스노트 드라마를 그냥저냥 “원작과 꼭같을 필요 없지 ㅇㅇ 열심히들 하네 ㅋ” 하면서 볼 수 있게 되자, 슬슬 다른 캡쳐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의심을 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은 진지하게 존재하는데, 그 사실과 다른 쪽으로 상황이 몰리고 정황이 성립해 ‘병맛’이 구축되는 것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조선일보

먼저는 잘 모르고 잘 보지 않으면 오해하기 좋은 광경이 선행한다. 아버지의 인터뷰에 아들을 ‘들러리’ 세운 것처럼 보이는 사진, “솔직히 해부학 연구실은 의대 출신 조교를 구하기 힘들다”, “순전히 나를 위해 아들놈을 꾀어냈다” 등의 뭔가 미묘한 발언 등등 말이다. 기왕 “꽉선생” 정민석 교수님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저번 인터뷰 기사에서도 비슷한 의미의 농담이 나왔었다. 그리고 Twenties' Timeline 데스크는 정범선 님에 대한 그 부분을 편집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궂은 일 함께해 주는 아들이 고맙다”라는 우회적인 의사 표현이, 기사의 형식을 통하면 아무래도 어떻게든 오해를 살 것이라는 판단에서였었다.

데스크의 판단은 옳았다. 저 표현이 기사의 형식으로 나가자마자, 조선일보 클라스가 무색하게, 현실 보완 계획 2단계가 실행됐던 것이다. 영향력 있는 사람의 멋들어진 오해와 결론짓기.

예전부터 근대를 못 벗어난 한국의 미학이라든가 퀴어에 대한 차별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떤 분이, 이 기사로 이분을 딱 접하자마자 한두 줄 적어 올린다. 그는 그가 본 광경에서 자연히 도출되는 그의 판단과 해석을 적어 놓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광경 자체가 착시를 일으키는 광경임은 인지하지 못한 상태다. 드라마판 데스노트 1화 첫 부분을 보다 짤 몇 개 찍고 그만둔 사람들 역시 그랬을 것이다. 원작과 너무 다르다는 한 가지 착시 요소 때문에 다른 수많은 줄거리의 톱니바퀴를 다 병맛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었을까.

뒤이어 3단계와 4단계가 거의 동시에 진행된다. 그 오해를 보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거나(3단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떠든다고 비웃고 말거나(4단계). 이 단계에서 ‘캡쳐’의 박제가 시작된다. 어느 쪽이든, 실제 사태가 어떻든, 그냥 지금까지 자기가 받아들인 정보만 가지고 세상을 보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현실 보완 계획은 완수된다. 펌글과 움짤 속 당사자가 해명을 해서 오해가 풀리는 일은 극히 드물다. 현실은 그렇게 좀더 복잡한 상황을, 더 간결하게 오해한 사람들의, 사방으로 흩어지는 영향력으로 인해, 좀더 병신 같은 소문의 형태로 굳어져 간다.

 

세상은 ‘캡쳐 짤’ 너머에 있다

드라마 최신화를 다 보고 나서 시간이 좀 남길래 미국계 유머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협동 능력 FAIL’이라는 제목의 짤방 하나가 올라온 것을 봤다. 공사 현장처럼 보이고, 한 남자가 구덩이에 들어가 있고, 구덩이 밖에서 사람들이 그 구덩이로 흙을 밀어넣는 사진일 뿐이다. 그밖의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그래서 쉽게 생각하게 된다. ‘엌ㅋㅋㅋㅋ 저거 저러다가 사람 파묻히는 거 아니냨ㅋㅋㅋ’ 하고. 참 오해하기 좋은 광경이다.

epicfail.com/2012/10/17/teamwork-fail/

그런데 여기 달린 댓글 하나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노가다를 해 봐서 아는 건데 이거 웃긴거 아님. 파이프 위에 흙 다시 덮을 때 저렇게 안 눌러주면 배관이 자꾸 위로 솟아오름. 원래 이렇게 하는거 ㅇㅇ

현실 보완 계획은 국적을 막론하고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듯하다. 그럴 것이다. 지나가다 흘깃 본 걸 사진 찍어 올리는 건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현대인들은 그 사진이 보여주는 것만 가지고도 사태와 정황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므로, 누군가가 유머 사이트에 올린다든지 ‘좋아요’나 리트윗을 많이 찍는다든지 해서 대세가 된 내용이, 병맛 양념을 잔뜩 뿌린 소문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중 진짜 병맛은 흔치 않다. 다 큰 사람들이 저토록 차분하게 사람 들어가 있는 구덩이에 흙을 채우는 것이, 의대 교수라는 사람이 제 자녀와 함께 해부학 연구자로 인터뷰를 하는 것이, 라이토가 흔한 아이돌 덕후 일반인으로 해석된 것이 그렇게까지 한순간에 비웃음의 대상을 삼을 일은 아닌 것이다. 현실이 실제로 미쳐 있을 확률보다는, 우리가 현실을 오해할 확률이 좀더 높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짤방 폴더가 좀 과하게 두껍다면, 한번 점검해 볼 일이다. 나는 실제 상황이 벌어지는 세상에 얼마나 관심이 있지? 혹시 나는 그 복잡다단한 사태의 미묘함을 쳐다보기 싫어서 그냥 몇 개의 캡쳐로 퉁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혹시나 싶어 점검해 보니…

아무래도 나 역시 한동안 너무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살았던 모양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공영방송 저녁 뉴스를 보고 자려고 한다. 사람들이 뉴스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거 떴다고 짤로 만들어서 요약해 주지만, 뉴스가, 현실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딱 짤방으로 해석된 내용까지만이지는 않을 것 같아서다. 피사체로서의 현실은 언제나 그 너머에 있다. 데스노트 드라마 10회차가 어떤 짤로 소문이 났는가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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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진

김어진

Twenties Timeline 피처 디렉터. 상식이 모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