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왔던 수줍은 나의 특기 이젠 고백할래 (feat. 취준생)

보고 비웃지 마라.

intro) 특기 하나 없는 Ne-ga

하반기 공채가 끝났다. 빠른 곳은 벌써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력서 앞에서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가을비처럼 내 마음을 적신다. 눈 앞에 놓인 빈칸들은 왜 그렇게 막막하기만 한지. 그중에서 제일로 곤란한 곳이 있다. 1000자도, 800자도 아닌 단 몇 자로 자신의 개성과 다양성을 뽐내야 되는 ‘취미·특기’ 칸.

취미 특기 어려워요!

ⓒ조선비즈, 잡코리아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취업준비생 48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이력서를 쓸 때 취업준비생이 대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항목(복수응답) 중 1위가 ‘취미·특기란’(39%)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이력서 쓸 때 없었으면 하는 항목’을 물었을 때도, 전체의 39%(복수응답)가 ‘취미·특기’를 선택했다고.

몇 글자로 자신의 개성과 다양성을 뽐내야 하는 한 칸짜리 취미·특기란. 오늘도 그 칸을 채우지 못한채 비워둔, 그런 당신을 위해 트웬티스 타임라인 에디터들의 (조금은 이상한) 특기를 들려주겠다. 누군가는 이게 뭐냐며 혀를 찰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신에게 당당했다. 그러니까 우리, 좀 더 당당해져 봅시다. 적어도 이 특기들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슈퍼파워

트웬티스 타임라인은 당신의 특기를 응원합니다.

 

verse 1) 유라 of the LTE sleep

Q. 본인의 B급 특기는?
A. 어디서든 10초 안에 잠들기.

Q. 왜 그것을 특기라 생각하는가?
A. '자야겠다'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스킬을 발동하면 그 곳이 어느 곳이든 앉거나 누워 있으면 10초 안에 잘 수 있다. 이건 진짜 엄청난 특기다. 보통 잠자리가 바뀌거나 주위가 시끄럽고 불안정한 상황이면 많은 사람들이 잠을 설치곤 한다. 근데 난 그런 상황에도 10초 안에 잠들어 버린다. 심지어 원하는 시간에 얼추 맞춰 일어나는 것도 된다.

불면증?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불면증?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Q. 이 특기를 면접관, 혹은 본인이 지원한 기업에게 어필한다면?
A. 혹시 내가 밥 먹듯이 출장을 가는 직무라면, 시차적응이나 잠자리로 인한 컨디션 난조는 절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것. 아,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순식간에 잘 수 있기 때문에 야근을 하더라도 남들보다 쌩쌩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그래도 야근은 사양입니다)

Q. 본인이 생각하는 ‘진짜’ 특기란?
A. 솔직히 자기소개서 취미/특기 란에 독서 아니면 음악 감상으로 쓰이는 특기들은 사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특기지, 진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특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짜 특기는 남들이, 혹은 나 자신도 인정할 만큼 잘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뿌듯하거나 자랑스럽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진짜 특기라 생각한다. 남들에게 말하긴 좀 병신 같아도 내 진짜 친한 친구한테는 막 자랑하는 그런 것. 솔직히 쾌변하면 제일 뿌듯하고 막 자랑하고 싶지 않은가. 그니까 한 마디로, ‘쾌변하기’도 내 자랑스런 특기란 말씀!

트탐라는 이런 특기도 조… 존중합니다…

조… 존중합니다…

 

verse 2) 정은 the 고기디렉터

Q. 본인의 B급 특기는?
A. 완벽한 고기 굽기.

Q. 왜 그것을 특기라 생각하는가?
A. 아부지께선 늘 주말에만 서울에 올라오신다. 가끔 주중에 외식을 하러나가면 세 남매 중 가장 큰언니이자 누나인 내가 고기를 구울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막내 이것저것 챙겨 먹이느라 정신없었고 둘째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연차가 쌓이다 보니 우리 집에서는 내가 고기를 제일 잘 굽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것이 특기가 됐다. 버릇 때문인지, 친구들이랑 있을 때도 주로 내가 고기를 뒤집기 때문에 스스로 고기 굽는 것을 특기라 생각하고 (사실 우기고) 다닌다.

그래서 가끔 완벽한 타이밍에 고기를 뒤집을 때 뿌듯함을 느낀다. 육즙이 모여 있으면서도 뒤집었을 때 고운 때깔이 나온다면 그 성취감은 장난 아니다. 가족 분들 이것 보시라고, 내가 이 정도라고. 이런 완벽한 고기의 자태를 보신 적이나 있느냐며 육성으로 내뱉으면 우리 가족은 나를 정말 한심하게 쳐다본다. 하지만 그래놓고 고기 한번 잘 구웠다며 맛있게 먹는다는 거.

엄지척

고기디렉터를 만난 굽알못들

Q. 이 특기를 면접관, 혹은 본인이 지원한 기업에게 어필한다면?
A. 회식 때 죽은 소도 혀에서 뛰놀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회식 때 불판은 제가 담당할 테니, 맡겨만 주세요!

Q. 본인이 생각하는 ‘진짜’ 특기란?
A. 진짜 ‘나’ 라고 생각한다. 나도 요새 사람이지만 요새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겉모습마저 다 다른데 그 속에 알맹이는 얼마나 세분화되어 있겠는가. 살면서 특기가 책만 잘 읽는 거라면 그 얼마나 재미없고 따분한 인생인가. 분명 각자의 삶은 롤러코스터일 텐데.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잘 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한편으론 어느 정도 그 이상을 해야만 잘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칭찬에 조금은 인색하지 않는가. 칭찬을 해야 더 잘하는 법인데. 앞서 말했듯, 어느 정도의 자뻑은 인생을 즐겁게 하고, 빛나게 만든다. 잘하지 않아도 잘한다고 얘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뭐 어때. 어차피 확인불가다.

 

verse 3) 최희선 straight outta SNS 수치사

Q. 본인의 B급 특기는?
A. 페이스북에 글 쓰려다 관두기

Q. 왜 그것을 특기라 생각하는가?
A. 그러니까, 미래를 위한 투자 같은 느낌이랄까? 오늘만 해도 사랑니를 뽑았는데 너무 아파서 페이스북에 욕을 한 사발 적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의 싸지름이 내일의 흑역사가 될 수도 있다는걸 깨닫고 엄청난 인내심으로 나를 억눌렀다. 이렇게 개인의 SNS에 수치사가 쌓여가는 시대에 난 이 특기로 잘 빠져나가고 있는 셈이다. 훌륭해, 훌륭해.

Q. 이 특기를 면접관, 혹은 본인이 지원한 기업에게 어필한다면?
A. 잊혀질 권리를 호소하는 이 시대에, 저는 예상치 못한 흑역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업무 중간에 흑역사가 생각나서 앞사람 책상을 차는 일도, 일하다 빡친다는 글 하나 SNS에 올릴 일 없는, 그런 완전무결한 사람이죠.

그 빡침이 SNS 흑역사가 아니라 다음날 새벽 악몽이 되어 돌아온다는 건 안 자랑…

이럴 필요가 없어서 좋다

Q. 본인이 생각하는 ‘진짜’ 특기란?
A. 요즘 너나 나나 비슷한 특기를 쓴다지. 독서하기, 연주하기 등등.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특기를 적을 수 있다는 게 부럽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것. 바이올린이라던가 가야금이라던가. 뭐가 됐든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하나 있다는 건 참 좋은 능력이니까. 특기란 그런 것 같다. 가치의 유무를 따질 수 없는 것. 뭐가 됐든,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단편적인, 그런 것.

 

verse 4) Haikaishi Sein (하이쿠시인 자인)

Q. 본인의 B급 특기는?
A. 하이쿠 짓기.

17자 안에서 계절감도 넣고 풍류도 넣고 리듬도 맞춰야 한다는 바로 그 일본 고전 시문학 장르!

계절감도 넣고 리듬도 맞춰야 하는 최소 힙합 조상님

Q. 왜 그것을 특기라 생각하는가?
A. 지금까지 이거를 취미나 특기로 민 사람을 한 번도 못 봤으니까. 그리고 고2때 일본어회화 시간에 하이쿠 쓰라고 해서 써봤는데 원어민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아 봤다. 솔직히 내가 봐도 좀 잘 썼더라. 흔치 않은데다가 잘 하기까지. 이 정도는 되어야 특기라고 할 수 있지.

Q. 이 특기를 면접관, 혹은 본인이 지원한 기업에게 어필한다면?
A. 인문학적 마인드로 회사를 채우고 싶으시죠? 제가 쓴 하이쿠를 벽에 걸어놓으면 아무도 안 보는 작품일지언정 회사에 인문인문한 분위기가 퐁퐁 솟아날 것처럼 보일 것이며, 직원의 행복과 회사 이외 분야에서의 성취까지 고려하는 좋은 회사 이미지를 챙길 수 있습니다.

내 글빨 #로맨틱 #성공적

물론 다음과 같은 표정도 만날 수 있다는거.

Q. 본인이 생각하는 ‘진짜’ 특기란?
A. 이력서를 쓰다보면 가장 쓰기 싫은 항목 중 하나가 바로 취미·특기라지. 자기소개서에 쓸 때, 업무랑 잘 맞을 만한 걸 생각하고는 싶은데 할 말이 없으니 이렇게 되는 것 같다. 솔직히 업무랑 잘 맞는 특기를 가지고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회사 중심적 인간도 아니고 뭐여. 그니까 개인적으로는, 그냥 쓰라고 안 했으면 좋겠다. 자기 특기를 쓸모없이 여기지 않고 ‘진짜’ 특기를 혼자 잘 가지고 놀 수 있게.

 

verse 5) 낮춘해찬

Q. 본인의 B급 특기는?
A. 자기비하하기.

Q. 왜 그것을 특기라 생각하는가?
A. 어감이 이래서 그렇지,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자신을 낮추는 편이다. 요즘은 자기 PR의 시대지 않는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하지만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걸 숨기기보다는 먼저 타인에게 털어놓는 편이다. 내 고민을,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털어놓다 보면 어색한 사람과도 깊은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지더라. 세상이 바라는 A급은 아니지만, 타인에게 솔직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그렇기에 낮출 줄 아는 것이 내 특기다.

못나서 죄송합니다 얼굴이 못 나서 얼굴을 못 들어서 거듭 죄송합니다

얼굴이 못 나서 얼굴을 못 들어서 거듭 죄송합니다

Q. 이 특기를 면접관, 혹은 본인이 지원한 기업에게 어필한다면?
A. 일단 제가 스스로 못난 걸 알기 때문에, 상사에게 혼나더라도 정신적인 충격이 크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제가 부족한 게 뭔지 계속 고민하고 물어볼 자세가 준비되어 있어요. 게다가 자기비하가 회사 비하는 아니니까. 이게 바로 타고난 노력형 아니겠어요? 뽑아만 주신다면 제 ‘못남’이 ‘잘남’이 되도록 열심히 뛰어다니겠습니다!

Q. 본인이 생각하는 ‘진짜’ 특기란?
A. 초등학생 때 선생님에게 내야 했던 자기소개서에도 특기 칸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잘하는 것 하나를 적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사실 내가 어떤 것을 어느 정도 잘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난, 진짜 특기란 단지 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상에서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면접 때 감춰졌던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 그렇기에 솔직하고 일상의 내 모습을 담아낼 수 있는 것. 그것이 특기고, 취미-특기 칸이 담고 있는 의미일 것이다.

 

hook) 기죽지마! B급 특기자 crew

처음엔 그랬다. 조금은 바보같기도 하고, 또 조금은 너무 일반적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게 왜 특기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얘기를 듣다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히려 나 자신을 속이며 독서, 운동 따위을 적어 놨던 내 이력서가 부끄러워졌더랬다.

남들이 보는 이력서에 내 취미를 적어야 하고, 심지어 그 취미가 평가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여전히 조금 언짢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 작은 칸이 가장 '나' 다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야말로 온전히 나만의 것을 적으면 되는 공간이니까. 누군가는 그게 바보 같다 말할지라도, 그게 나니까. 그게 진짜 내 얼굴이니까.

https://goo.gl/naMtaw

작년 이맘때의 “맨정신 면접 프로젝트”에 실제로 제출됐던 어떤 응답.

그러니, 내 취미가 뭘까 생각하다가 오히려 취미를 고민하는 취미가 생겨버린 전국의 취준생들이여. 잠자는 당신의 B급 특기를 일깨워 보라. 항상 공란으로 남았던 그 칸이, 오늘따라 유난히 좁아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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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주

강연주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분수 같은 거 모르고 삽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