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 소라넷 구경?

내게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누군가는 소라넷을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아냐

소라넷이라는 웹사이트가 있다. 2003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했고, 한국 성인 음란물 사이트로서 부동의 1순위를 지켜 온 곳이라고 한다. 남의 말을 인용하듯이 설명한 데는 이유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소라넷을 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2003년 11월 소라넷 웹 아카이브.

2003년의 소라넷. 이런 게 아직도 남아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가 본 것은 중딩 때였다. 메인화면을 딱 보자마자 가입도 해야하고, 뭔가 복잡하다는 생각에 끄고 나와 잊어버렸던 걸로 기억한다. 십여 년 뒤 트위터 계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역시, ‘아직도 저러나 보다’ 하고 지나치는 정도였다.

문제의 소라넷 계정

소라넷 트위터 공식(?) 계정.

그래서, 나는 적어도 ‘소라넷’에 한정해서는 지극히 떳떳하다고 할 수도 있다. 가입? 눈팅? 심지어 트윗 계정 팔로우 이력도 없으니까. 이를테면, 누가 나한테 ‘어진이 소라넷 하니…?’ 물어보더라도 ‘네 안 하는데요 왜 그러시죠?’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걸 자랑이라고 쓰고 있느냐고? 아니, 그 반대다. 나는 이제, 내가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위치에서 가만히만 있었다는 사실에 민망함을 느끼고 있다.

이런 드립을 자주 써먹곤 했었다. 오밤중에 ‘치킨 위꼴사’를 단톡방에 뿌리면서 “[한국][有모]속살터지는_영계.avi” 같은 텍스트를 뿌리는 식의 장난 같은. 죄의식은커녕 사실 문제로 느끼지도 않았었다. 내가 정말로 어떤 종류의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모욕하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모두가 음란물을 보지만 아무도 안 보는 체하는 세태에 기대어 반쯤 풍자를 버무린 유머를 구사하고 싶을 뿐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SNS에서 요즘 유행하는 ‘소라넷 하니…?’ 계정들을 만난다. 그리고 알게 된다. 내게는 행위상의 문제는 없어도, 태도의 문제는 분명 있었다는 것을.

 

아 그렇구나 이게 '형법'상 죄목이구나…

2015년 한 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가장 중요하게 떠올랐던 화제 중 하나는 여성 인권의 확립,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성 및 성소수자의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고” 할 권리를 확대하는 일이었다. 그 중심에는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를 점거한 ‘메갈리안’들이 있었고, 그들을 기점으로 ‘씹치남 미러링’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적 반격들이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며 전개되고 있다. 그 한 축으로 ‘소라넷 하니…?’ 계정이 있다.

그들은 ‘악령 퇴치 예식’을 주제로 한 최근 개봉 영화의 주연배우가 정색하고 있는 표정을 프로필 사진으로 내어걸고, 소라넷 트위터를 팔로우하는 계정들을 언급하며 “너도 소라넷 하니…?”라고 묻는다. 사회적 입지가 상당한 인물들도 워낙 많은 탓에, 그들의 활동을 보고 놀란 사람이 참으로 많았다. 하지만, 내가 이 계정들을 지켜보다가 움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몰카라는 것은 단순한 장르가 아닌 모두 범죄이며 처벌 대상이고 이것들은 절대로 개인의 자유도 성문화도 아닙니다?같은 것들을 몰랐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욱 컸다.

사실 세상에 놀랄 것은 더 있지만서도.

사실 세상에 놀랄 것은 더 있지만서도.

그리고, 생각해보면 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을 건너 불 구경하듯 ‘참 큰일이네’, ‘다들 왜 저럴까 저러면 안 되는 건데’ 운운 혀를 차는 정도, 그리고 간간이 그 모든 상황들을 뒷짐 지고 물러서서 써먹는 정도로 살아 왔다는 생각에 미쳤다. 살짝 현기증이 일었다.

 

저는 그동안 신사 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 글을 통해 누군가를 정죄하려는 것은 아니다. 역시 누군가가 잘 말했듯이, 죄책감이란 고귀한 것이지만 강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다만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다시 돌아보니, 나는 게으른 사람이었다. 소라넷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얼마나 나쁜 것인지,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난 그저 명백하게 나쁜 일들을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며 점잖게 손가락질하는 인터넷 신사의 모습에 취해 있었다.

신사

“흠, 그들은 그렇군요. 오, 물론 나는 아니에요.”

나쁜 의미에서의 ‘신사’란 이런 사람이다.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 흠결이 없고, 어디서나 점잖게 말하고 행동하며 적당선 안에서만 사뿐사뿐 걸어다닌다. 울고 웃고 싸우고 떠드는 서민들을 아주 조금 경멸하며, 충분하게 거리를 두고, 그들에게 ‘그러면 안 됩니다’ 따위 고귀한 에티켓 한 자락을 자선하듯 던져 줄 뿐이다. 딱히 팔을 걷어붙이지는 않고, 남의 말을 듣는 법이 없으며, 자기 상황에 매우 흡족해한다.

그렇게 따지면 소라넷과 소라넷 피해자들 앞에서 나는 그저 나쁜 신사에 불과했다. “이봐요, 나는 소라넷도 하지 않고, 당신들이 포착된 영상 역시 보거나 유포한 적이 없습니다. 대체 지금 뭐가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아무 문제 없이 살아 오다가, 누군가가 드디어 ‘야 이 똥멍청이 김어진 새끼야! 지금 우리는 강간 추행을 당하고 있다고!’라고 벌겋게 드러내어 알려 주자, 그제서야 혼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얼떨떨해져서 사고방식을 고치기 시작한 셈이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관련 뉴스 갈무리

비단 소라넷뿐일까? ‘일간베스트’, 소수자 조롱,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하는 죽음들 등등 이루 셀 수가 없다. 어떤 문제 때문에 피해를 보는 타인들이 있고, 구조든 개인이든 가해자가 분명히 있을 때,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일 때, 자기는 그 문제에 대해 알리바이가 있음을 입증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며 무엇을 해결한단 말인가? 개인의 우월감을 올려주는 것 말고 말이다.

이걸 깨닫지 못하는 이상, ‘도촬은 나쁘다’, ‘만취한 여성을 골뱅이 취급하며 초대남을 부르는 것은 범죄이다’ 등의 단편적 사실이 아무리 암기되어 보아야 소용이 없다. 이 모든 사실들이 문제시하고 있는 어떤 사태를 내가 문제시하지 않는데, 내가 그 사실들이 가리키는 어떤 지향을―이를테면 소라넷 가해자 고소 고발 같은 것들―알아볼 턱이 있겠는가. 나의 부끄러움은, 이것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히 ‘응 그래 소라넷이 좋은 건 아니지’ 정도로만 적당히 올바르려고 행세했던 데서 비롯하는 것 같다.

 

‘문제’를 정말로 문제시할 수 있는 시대를 위하여

내가 소라넷을 처음 알게 된 이후로 족히 10년이 넘었다. 그땐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 사이에 모든 게 이렇게 잘못되어 버렸단 말인가? 아니, 그 사이에 변한 것은 없다. 도촬은 범죄고, 임의의 사람을 성적으로 모욕하는 건 범죄다.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서야 공론화되고 문제시되는 것들은 뭐든 다 마찬가지다. 더 악화되면 되었지, 사람들의 무관심과 몰이해 속에서 상황은 한 번도 좋게 변한 적이 없었다.

소라넷 고발 프로젝트

ⓒtwitter.com/soraeliminate

다만 한 가지 나아진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그냥 그런 거려니 하고 대충 넘어가던 것을 이젠 그냥 넘어가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기로 결심한 ‘메갈리아의 딸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고, 어떤 의견이든 확산될 가치만 있으면 확실하게 확산되는 2015년의 끝자락에서, 이제 ‘선량한 사람들한테까지 그러지 마시고 피해 준 사람들에게 직접 따지세요.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나한테까지 불쾌감을 주시는 건가요?’ 와 같은 태도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시민 사회가 성숙하고 일반 교육 수준이 올라가면서, 이제 대한민국은 더 많은 문제를 굳이 문제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이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불길을 끄는 사람까지는 못 될 것 같다면, 적어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소라넷’ 등을 구경하면서 가만히 뒷짐 진 채 ‘난 잘못 없어요’를 되풀이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건 훌륭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며, 당신이 구경하고 있는 그 불은 저 멀리 바깥 어딘가가 아닌 우리 사는 세상 안의 어딘가에 붙은 불로서 존재하고 있다.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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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진

김어진

Twenties Timeline 피처 디렉터. 상식이 모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