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평균 상주 인구 1만 명, 유동 인구 25만 명. 2015년 현재 노량진의 인구 관련 데이터다. 수산시장에 대형 학원과 고시촌까지 즐비한 노량진은 이렇듯 매일 바삐 돌아간다. 개중에는 당연히 고시, 혹은 공시(공무원 시험) 등 여러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의 시대에서는 노량진이 ‘공부의 메카’로 인식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과거에는 어땠을까?
대한민국에 입시 제도가 틀이 잡히고서야 노량진이 그렇게 변했겠지, 처음부터 노량진이 그런 동네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노량진은 언제부터 한 해의 노력을 한순간에 쏟아 붓는 시험이라는 거사(?)를 준비하는 곳이 된 건지, 또 그 이전에는 어떤 동네였는지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해서 이 글은 그 내용을 크게 고시촌이 되기 전과 후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며, 좀 더 흥미롭게 내용을 풀어내기 위해 픽션적인 요소가 가미된 가상 편지 형식을 차용했다. 물론, 편지 속 노량진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사실에 기반을 두어 작성했다.
과천 현감 이노량, 주상 전하께 아뢰옵니다
주상 전하, 신 과천 현감 이노량이라 하옵니다. 전하께서 노량진(鷺梁津)이 소상히 궁금하다 하시어 감히 이렇게 서한을 보내옵니다. 내용에 미진한 점이 있더라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전하, 노량진은 백로 로(鷺), 징검돌 량(梁), 나루 진(津)이라 하여 본디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을 품고 있는 지역이옵니다. 수양버들이 울창한 나루터라 하여 노들나루라고도 하며, 외에도 노도진(露渡津), 노량진도(鷺梁津渡)라고도 불리우고 있사옵니다.
이 나루는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듯 사대문 밖에 위치해 경기 과천과 시흥, 수원을 도성과 연결하고, 충청과 전라로까지 나갈 수 있는 길목이옵니다. 한성으로 통하는 한강 나루터 중에서도 상류의 한강진 하류와 양화진과 함께 가장 주요하여 전하의 옥체를 보존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하는 진을 설치하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고려 때부터 행인들의 왕래가 잦았고, 그 때문에 선왕이신 태종께서는 특별히 별감을 파견하여 나루 관리에 신경을 쓰셨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별감 파견과 함께 짐과 사람을 실어 나르는 진선들이 뱃삯을 받지 않게 하도록 관선 15척도 비치하셨지요. 이는 근본적으로 백성들이 도강을 편히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와 함께 수상한 자를 기찰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전하, 이곳 노량진은 과천, 시흥, 수원, 더 나아가 충청, 전라, 인천, 개경까지 통하는 만큼 각 지방의 갖가지 특산물이 한데 모여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기도 하옵니다. 이는 노량진이 나룻배가 발착하는 도선장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한 취락이라는 뜻의 도진취락(渡津聚落)이라 불리우는 연유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사고파는 상인들로 가득하고, 그 덕에 도선 시설은 물론이거니와 주막과 객주 집이 많이 들어서 있사옵니다.
하지만 노량진이 이리 마냥 기쁨만 가득한 곳은 또 아니옵니다. 나루의 북쪽 강변에는 새남터라 하는 넓은 백사장이 있는데, 그곳은 왕조 대대로 죄인들을 벌하는 사형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선왕이신 세조께서는 즉위 2년에 반정을 꾀했던 여섯 명의 신하, 사육신(死六臣)을 이곳에서 처형하기를 명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사육신묘 역시 노량진에 있사옵니다.
노량진은 항시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하여 전하께서 행차하시기에는 다소 번잡할 수 있습니다. 하오나, 태종께서는 노량진을 관리하기 이전에 사냥을 끝내고 환궁하는 길에 노량진 나루터에서 배를 탄 채로 술과 함께 풍류를 즐기신 적이 있사옵니다.
혹여나 전하께서도 노량진에 행차하실 일이 있으시거든 신이 다른 관리들과 함께 버선발로 나와 맞이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만수무강하옵소서, 전하.
乙未年(1895년) 正月
가상 서한에 나와 있듯이 노량진은 고려 시대 때부터 백성들의 왕래가 잦았고, 강북과 강남의 중간에 위치해 조선 시대에도 지리적, 상업적,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한강만 건너면 곧바로 임금의 거처로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니 두말 할 것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많은 이들이 이곳에 함께 머물며 (조선시대의 고시라 할 수 있는) 과거를 준비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노량진에 학원이 몰려들고, 고시촌이 형성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 해답은 시간을 많이 건너뛰어 1970년대에서야 찾을 수 있었다.
각하, 관악구청장 강노량 보고드립니다
각하, 관악구청장 강노량입니다. 수년 전, 각하께서 종로구를 비롯한 강북 도심지역이 그곳에 밀집한 대형 학원들 때문에 학생들로 시끌벅적했던 것을 타파하기 위해 그들을 중심부 밖으로 밀어낸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한샘, 정진, 대성 등의 그때 밀려났던 그 학원들이 지금 저희 관악구 노량진에 터를 잡고 지역 상권을 활성화시키고 있다는 보고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들 학원은 아무래도 노량진을 중심부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한반도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시발지라는 건 둘째치고, 한강 철교와 인도교, 또 몇 년 전에 개통된 수도권 전철 1호선까지 더해지니 학생들이 오고 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라 판단한 듯합니다. 노량진에서 상도동을 연결하는 터널도 곧 준공될 예정이라 교통적인 측면에서 지금보다 더 발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시다시피 사실 노량진은 서울수산, 노량진수산(주), 삼호물산이 1975년 한국냉장(주)에게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 수산시장이 이미 잘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형 학원을 따라 학생들이 많이 몰려오니 이전에 비하면 지금은 말도 안 되게 유동 인구가 많아졌습니다. 그에 더불어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유흥 거리인 오락실이나 술집, 저렴한 가격의 분식집이나 일반 음식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 한 가득입니다. 덕분에 학생들이 아닌 일반 주민들도 소비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노량진이 지금은 제가 맡고 있는 관악구 소속이지만, 이제 새로운 구를 신설하여서 분리될 예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제 관할 구역이 아니라 뭐라 이야기하기 어렵겠지만, 각하께서 신설되는 구를 맡는 청장에게 노량진에 관해 이야기해주심이 어떨지요?
노량진은 분명 지금보다 더 커지고, 더 활발해질 것입니다. 각하가 꿈꾸는 도시와 나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노량진이 꼭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각하의 국정 계획에 이곳을 염두에 둔 사항을 넣어두심이 어떨지 싶습니다. 주제 넘는 말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국정에 참고하실 만한 일이 있으면 또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각하, 건강하십시오.
1979년 6월
이 가상 편지를 쓴 사람은 현재 노량진이 속해 있는 구인 동작구가 아닌 관악구청장이다. 실제로 노량진은 1980년, 동작구가 관악구에서 분할되기 전까지는 관악구 소속이었다. 또한, 수산시장이 형성되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강북 중심가 일대의 학원들이 그 주변으로 내쫓기던 것도 모두 1970년대에 일어났던 일들이다.?물론, 독재 정권하에 대형 학원들이 강제로 타 지역으로 내쫓긴 것 자체는 부당한 사실이지만, 어쨌든 노량진은 이로써 지금의 학원가와 고시촌을 형성하게 됐다.
그 이후의 노량진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도다. 대치동을 중심으로 한 강남 대형 학원들의 성장에 비교적 약세에 접어든 적도 있었고, 또 2010년대 초반에는 공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지금은 재수생보다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이 많아졌다는 것 정도가 큰일이라면 큰일이었다. 그렇게 노량진은 과거 전략적 요충지에서 ‘공부의 메카’로 변한 채로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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