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탐사대] 노량진 육교를 위한 마지막 송가

노량진 보도육교가 없어지기 직전, 꼭 전하고 싶었던 말들.

사실은 다들 어렴풋이 기념하던, 그 보도육교

1999년 봄 노량진역.
우리는 햇살을 받아 마른 버짐처럼 하얗게 빛나는 육교 위에 앉아 농담처럼 그랬다.
되고 싶은 것? 대학생.
존경하는 사람? 대학생.
네 꿈도 내 꿈도, 그러니까 대학생.

작가 김애란의 소설 『자오선을 지나갈 때』에서 담아낸 노량진 육교의 모습이다. 35년간 제 자리를 지켜온 노량진 보도육교. 그 오랜 시간 동안 보도육교는 얼마나 많은 수험생들의 속내를 들어왔을까.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오늘의 위로를 찾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내일의 희망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량진 보도육교는 공간이기 이전에 하나의 추억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 트웬티스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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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980년 신설 후 지금까지, 노량진과 역사를 함께해왔던 노량진 보도육교. 노량진의 상징이었던 이 다리가 오는 17일과 18일에 걸쳐 철거된다. 철거의 이유는 안전 문제 때문이다. 그동안 전동차로 인한 진동과 흔들거림으로 꾸준히 문제가 됐던 육교는 안전등급을 C등급으로 판정받게 되면서 철거가 불가피하게 됐다.

더불어 교통약자가 이용하기 힘들다는 민원과 함께, 차량 중심이던 차로 정책이 보행자 위주로 바뀌면서 육교를 없애고 건널목을 설치하자는 얘기가 나오면서 철거가 추진됐다.

ⓒ 트웬티스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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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시설이니만큼 더 안전한 것이 있다면 대체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노량진을 지켜온 만큼, 노량진의 상징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육교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 역시 같은 마음이다. 주민들은 아쉬운 마음에 육교에? 현수막을 걸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육교를 찾으며 그 마지막 모습을 담아내었다.

ⓒ 트웬티스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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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노량진 보도육교에 대한 어떤 추억을 갖고 이 자리에 다시 온 걸까.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보도육교의 마지막을 담아내었을까. 공간이기 이전에 추억으로 자리해왔던 노량진 보도육교. 35년간 제 자리를 지키며 노량진을 지나치는 모든 사람에게 공간과 추억을 선물해준 육교. 노량진 거리로 향하는 거점이면서도 만남의 장소였던 육교.

이것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의 기록이며,
노량진 보도육교에게 보내는 우리들의 마지막 송가다.

 

1.?흔들리던 스무 살의 나침반 - 서영

서울 노량진역에서 학원가로 가기 위해선 노량진 육교를 건너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다리를 보며 ‘속세로 가는 다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난 육교의 초입에 빼곡히 붙어있는 학원 전단을 보며, 모두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는 생각에 오히려 이곳이 희망의 섬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육교 위에서 보이는 수 많은 학원을 내려다보면서는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곳에서 청춘을 잠시 덮어두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위안이 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육교 위에서 희망 만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육교 위에서의 내 모습은 이런 긍정적인 생각들보다도 항상 많은 것들에 다 투덜거리는, 그런 나날들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블로거 '스피아민트'

ⓒ 블로거 '스피아민트'

수능이 100일도 안 남았을 무렵, 육교 위에서 내려다본 노량진 거리의 모습을 기억한다. 노량진 육교의 모습은 참 낯설다. 한 편에서는 화려한 63빌딩의 모습이, 다른 한 편에서는 학원 건물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거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며칠 안 남은 수능을 앞두고 막막함과 불안함이 가득했던 그때엔 그 풍경이 참 야속했다. 왜 나는 저 너머에 가지 못하는지, 저기는 저렇게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데 왜 내가 속한 이곳은 낡은 건물들과 학원 전단만이 가득한 건지.

심지어는 육교 아래에서 내다보이는 파스쿠찌를 바라보면서도 마음속 불안의 화살을 돌렸던 적도 있다. 굳이 노량진에 와서 한 잔에 밥 한 끼 하는 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누굴까?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 보면 정말 저곳에 갈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괜스레 육교 위에서 짜증도 내보고, 죄 없는 카페 속 사람들을 한 번 흘겨보고 지나가기도 했다. 조금은 철없었던, 하지만 치열했기에 더없이 소중했던 지난 날의 기억이다.

하지만 이 추억들 속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육교 위에서 친구와 노량진 너머의 63빌딩을 내다보았던 기억이다. 육교 위에서 친구와 여의도 방향에 보이는 높고 화려한 빌딩들을 바라보며, 각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꼭 저기를 가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육교는 우리에게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그 시절에 질투와 동경의 대상이었던 저 멀리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꿈을 다잡았었기 때문이다.

ⓒ 블로거 '스피아민트'

ⓒ 블로거 '스피아민트'

그렇게 꿈꿔왔던 그곳을 방문했을 때의 감회는 참 새로웠다. 꼭 가보고 싶었던 63빌딩 전망대로? 가서는 역으로 노량진 위치를 찾아보기도 했다. 항상 육교 위에서 화려한 건너편의 모습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던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노량진을 바라보고 있다니. 그만큼 시간이 흘렀기도 했지만, 결국 이곳에 왔구나, 그때의 나도 내 나름대로 뜨겁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함마저 들었다.

이렇게 나와 수험생활의 맥락을 함께 해왔던 육교가 이젠 철거된다고 한다. 육교가 많이 노후화됐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육교 지나갈 때 가끔 무섭기도 했다. 열차가 지나갈 때 즈음이면 약간 흔들리는 느낌도 들었으니까. 하지만 육교가 버텨온 35년의 세월을 믿었다. 그렇기에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보다는 그저 흔들리는 것 정도는 이 육교의 일부라 생각했다.?마치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처럼.

누군가는 내 얘기를 듣고 안전불감증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매일 살짝 느껴지던 육교의 진동이, 노량진에서 수험생로 살아가던 시간을?익숙하게 만들어준 것이라 생각한다.

ⓒ 트웬티스 타임라인

ⓒ 트웬티스 타임라인

이제는 오르지 못할 보도육교의 계단, 그리고 건너지 못할 노량진 도로 위의 그 거리. 노량진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내고 돌아오는 길, 보도육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큰 메모판에 인사말 하나 적지 못하고 온 것이 지금에서야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서 이곳에서 이제는 추억 속에만 남아있는 육교에게 뒤늦은 작별인사를 건넨다.

육교야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너무 투덜거리기만 했던 것 같아.
그리고 학원 지각한답시고 맨날 뛰어다니기만 해서 미안했어. 그때 나 무거웠는데 말야.
네게 내 모습이 볼멘소리 가득한 투덜쟁이의 모습으로만 기억되지 않길 바라며.
이젠 사진으로 기억될 육교야, 안녕!

 

2. 3년의 서울살이를 지켜봐 준 친구 - 승국

어느덧 10월이 왔고, 보도육교가 철거되는 그 날이 다가왔다. 나에게도 추억이 깃든 장소인 이 육교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철거 전의 사진이라도 남겨놓자는 마음에 노량진을 지나는 길, 육교의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이승국

ⓒ 이승국

내가 서울에 올라온 것은 2012년 가을이었다. 어느덧 서울살이도 3년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서울에서 처음 생활했던 곳은 노량진역에서 9호선으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노들역 인근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1호선으로 갈아타거나, 9호선 급행열차를 이용할 때 노량진역을 자주 거쳤다.

ⓒ 이승국

ⓒ 이승국

당시 살던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가장 번화한 곳 역시 노량진이었다. 수산시장도 있고, 값싼 음식점들도 많아서 서울에 갓 상경한 주머니 얇은 청춘이었던 내게 노량진은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마치 고시생들처럼 밥도 사 먹고, 생필품도 샀던 기억이 있다. 지금 살고있는 곳은 중앙대 후문이다. 노량진역에서 육교 건너에 있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동작 01번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가기 때문에 지금 집으로 이사를 와서도 이곳은 일주일에 3-4번은 꼭 거쳐 가곤 했다. 그래서 노량진은 내게 서울살이의 역사와도 같았고, 제 2의 고향과도 같았다.

ⓒ 이승국

ⓒ 이승국

서울에 올라와서 들쭉날쭉한 수입과 거침없이 드는 생활비로 인해 절약하는 습관이 강제로 생길 수밖에 없었던 서울 생활. 이런 내가 유일하게 지갑을 열 수 있었던 공간이 바로 노량진이었다. 캔커피 하나를 250원에 파는 초 저렴한 마트도 있고, 진수성찬 한식뷔페를 4500원에 먹을 수 있는 곳도 있다. 빵 하나에 500원 정도 드는 곳에서 간식을 사 먹을 수도 있으며, 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를 1000원에 마실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집 근처에 있어 그나마 팍팍하고 넉넉하지 못했던 서울생활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었고, 갑갑한 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창구가 됐다.

그래서 노량진에 가면 항상 익숙한 기분이 들었고, 편안함마저 들었다. 내가 노량진에서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육교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역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보도육교. 버스 안내방송을 듣지 않아도 이곳이 노량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육교였다. 익숙한 풍경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감정. 서울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 감정이 있어 조금 더 서울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나는 이곳을 지나는 고시생들의 애환까지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인근 동네 주민으로 3년을 거주하면서 내 나름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었다.

ⓒ 이승국

ⓒ 이승국

‘35년... 잘 버텨줘서 고마워!’ 노량진 2동 주민들이 현수막으로 내건 이 한마디.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해 노량진 육교에게 수고의 인사를 건네주는 듯했다. 수도 없이 건너다녔던 이 육교. 1호선을 타고 오면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자연스럽게 건널 수밖에 없었던 이 육교. 철거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철거된 모습을 보고 나면 짠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을 것 같다.

나에게도 많은 추억을 남겨준 육교야,
나의 첫 서울살이를 함께해준 육교야,
수고했어.
그리고 굿바이!

 

3. 지친?마음을 위로받던?장소 - 소희

며칠 전, 노량진 보도육교가 철거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육교를 찾았다. 육교에는 35년간 잘 버텨줘서 고마웠다는 말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난관 안쪽으로는 육교에게 작별을 고하는 말이 담긴 메모판이 놓여있었다. 사실 단 한번도, 육교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일상의 한 부분이었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그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사라진다는 얘기를 들으니 목에 미처 삼키지 못한 가시가 박힌 것 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 트웬티스 타임라인

ⓒ 트웬티스 타임라인

노량진 보도육교는 당시 재수종합반에서 강사를 하던 몇 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차가 없어 매일같이 지하철로 출퇴근하던 나에겐 육교는 항상 거쳐 가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내게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존재였던 노량진 보도육교. 아침에 도착하자마자 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던 것 역시 육교 근처의 도장 파는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육교를 건너가면 내 하루는 시작됐다.

바쁘고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어느새 어둠이 짙게 드리운 늦은 저녁이 된다. 시끌벅적하게 붐비던 노량진 길가는 어느새 한산해지고, 도로에도 몇 대의 버스와 택시만 있을 뿐이다. 낮과는 또 다른 노량진의 얼굴이다. 나는 그런 노량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육교 위가 참 좋았다.

ⓒ 트웬티스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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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이맘때였을까. 가을의 느낌이 물씬 느껴질 무렵에 살짝 취기가 오른 상태로 육교 위에서 노량진의 짠내가 섞인 밤바람을 맞았던 기억이 있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육교를 떠올리면 그때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과로 피곤함에 지쳐있던 내게 순간적인 위로가 됐던 것일까. 지금도 그날을 기억하면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내게 육교는 위로의 의미로 남았다. 매일같이 지나치는 장소이지만, 그 장소에 서면 어떠한 말보다 내게 위안이 됐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내일을 다짐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육교는 내게도 특별한 존재로 남았다.

아직도 육교가 사라진 노량진역의 모습이 잘 상상가지 않는다. 처음엔 분명 낯설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없어졌을 때 오는 상실감도 클 것 같다. 버릇처럼 눈은 이제는 없어진 노량진 육교를 찾아 헤맬 것 같다. 그것도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익숙해지겠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추억 속의 육교를 계속 그리워할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육교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돌아오는 길, 메모판에 육교에게 보내는 마지막 한 마디를 적고 발걸음을 돌렸다.

항상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서 날 위로해 줘서,
그동안 내 고민의 무게를 받아내어 줘서 고마워.
수고했어, 육교야

 

더는 없다, 아니다, 앞으로도 있다

이제 더는 노량진 육교 위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노량진 육교 위에서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경험도, 친구와 술 한 잔 걸치고 육교 위에서 노량진을 내려다보는 경험도, 이제 더는 없다.

하지만 공간은 사라질지라도, 추억은 영원하다.
그렇게 보도육교는 앞으로도 계속 모두의 추억 속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35년 간 늘 그래 왔듯이.

ⓒ 트웬티스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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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주

강연주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분수 같은 거 모르고 삽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