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기억하는 어떤 방법들

모든 것이 두렵던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해야 옳을까요?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와 일제 위안부 강제 동원의 만행이 미디어와 예술과 각종 작품을 통해 소개될 때마다 느낍니다. 아, 정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지구는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을 하고 있었구나. 참 혼란스럽고, 무섭고, 잔악했구나.

그리고 시간이 지났습니다. 2016년의 우리는 이제 그 일들을 간접 체험하고 있습니다.

WW2

WW2

‘귀향’, 모두가 아는 비극을 모두가 아는 방식으로

일단은 모두가 아는 비극을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방식과 모습 그대로 재현해서 전승하는 방법이 하나 있겠죠. 전쟁이란 건 집단에게 일어난 일이고, 다같이 목격한 일의 교집합은 틀림이나 의심의 여지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14년 동안의 제작 과정을 견딘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일본군에 징용되었던 조선 소녀들의 이야기를 극영화 형태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가 ‘교육용 영상자료’로 손색이 없습니다.?어디가 슬픈 장면이고 어디가 애틋한 장면인지 너무도 알기 쉬운 연출 때문에 그렇습니다.?제작진이 ‘지옥도’라고 불렀다는 위안소와 같은 곳의 디테일을 비롯하여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다, 황군을 위한 암캐다”와 같은 구체적인 대사들이 관객들이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향’은 우리가 제국주의 일본군의 조직적 성노예 착취 범죄에 대해 몰랐던 것을 새로 알려주는 영화는 아닙니다. 본연의 임무가 그게 아니거든요. ‘소녀들을 산 채로 태워 죽였다’, ‘매일 수십 명이 한 사람을 겁탈했다’ 등 우리가 그 전쟁범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선명하게 시각화하는 것으로 그 기능을 다합니다. 그렇게 머릿속에나 있던 고통을 눈앞에 꺼내 놓으니, “이런 걸 보고 안 우는 사람이 있”기가 더 어렵게 되지요.

현 서울시장 박원순 SNS 시사회 감상 후 소감문

가서 보고 감동했다며 뭔가 약속하면 되는 ⓒ 서울시장 박원순 페이스북

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이러한 방식은 누군가에게 영화적 미학보다 “감성”이 앞선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거기서 끝이면 다행이게요? 이 추악한 전쟁범죄에 대한 고발은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할 영화라거나, 이 영화를 보면서 팝콘을 먹는 일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식으로 환기되기 시작합니다. 작품 자체보다 작품 외적인 부분이 앞서게 되는 순간이죠.

 

‘사울의 아들’, 모두가 아는 비극을 한 사람의 시각으로

그런가 하면, 모두가 어렴풋이나마 두루 기억하는 참혹함에 대해서, 소수의 구체적이고 주관적인 시각을 빌려서 그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기억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증언을 하는 것이지요. 입장과 경험이 분명하고 생생한 몇몇 사람들의 재구성은, 모두의 어렴풋한 기억을 보강해 주니까요.

가장 적절한 예로는, (주로 예술영화 상영관에서) 개봉한 헝가리 영화 ‘사울의 아들’이 있겠군요.

이 영화는 감독이 처음부터 의도했던 그대로, ?‘아우슈비츠 대량학살 수용소’의 일을 감정없이 그려냅니다. 그렇게 모든 샷을 구식 40mm 카메라로 찍은 ‘사울의 아들’은 시종일관 감동적이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추악하고, 괴롭고, 절망적이고, 갑갑하며, 아픈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아우슈비츠의 풍경을 잡아내는 방식으로는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가스실에서 학살당한 동포들의 ‘토막’을 끌어내 소각로에 집어넣는 일을 억지로 하다가, 자기 아들의 시체를 마주친 어떤 아버지의 이야기니까요.

ⓒ영화 '사울의 아들'

ⓒ영화 '사울의 아들'

'사울의 아들’은 한 사람이 목격한 어느 하루의 기억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없이 무자비하게 제시합니다. ?이러한 불친절함 덕분에 관객들은 '왜 굳이 랍비를 찾아서 장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맥락도 영화 내적으로 설명 받지 못하고, 그저 갑갑한 심정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다수가 경험한 사건에 대한 소수의 기억으로 모두를 설득시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려운 법입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생각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인식의 충격을 선사할 수 있겠죠.

 

‘제국의 위안부’, 다수가 모르는 비극을 한 사람의 시각으로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을?고발하는 식으로 기억하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위안부 문제’가 왜 해결되지 않는지를 연구하며 이 전쟁범죄에 대한 소수의견으로서의 기억을 종합한 ‘제국의 위안부’가 이러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저자 박유하 교수는 제국주의 일본의 성착취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해 온 학자이며, 친일파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박유하 교수는 일본군을 ‘위안’하려고 ‘지원’한 ‘정신대’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걸까요. 대다수 사람들에게 “정신대”란, 일제가 식민지에서, 강제로 끌고 와, 강간한 사람들로만 기억되는데 말이죠.

이 교수는 350쪽이 넘는 책으로 이 전쟁범죄에 대한 다른 기억을 설득해 내려고 시도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일본 병사들 하나하나가 짐승이어서가 아니라, 일본에서든 어디서든 전시에 민간 여성의 성을 헐값에 가져와 ‘사용하고’ 착취해도 좋다고 허락하고 조장한 제국주의 체제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그렇게 말해야 '불쌍한 조선 소녀'의 동정론을 넘어 그 다음의 역사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박유하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는, 많은 부분을 삭제당합니다.?ⓒ '제국의 위안부' 삭제 2판

지금 박유하 교수는 ‘한국인도 아니다’, ‘학술적 매춘을 한다’ 같은 비난을 듣고 있으며, ‘제국의 위안부’가 호출한 어떤 종류의 전쟁범죄는 기억되거나 언급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민족' 이라는 이름 안에서 호출되고 있는 하나의 기억 앞에서 다른 ‘위안부’를 기억하자는 '학술적인 주장'은, 여전히 험난하기만 합니다.

그 속에서 묻혀버리는 수많은 전쟁 성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제국의 위안부> 논란은 좀 더 진지하게 전개되며 승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논란’에서 사회적 ‘논의’로의 필요성 - 주간경향

 

모두가 동일한 기억을 갖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요?

어떤 엄청난 일이 모두에게 들이닥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이고 공포이던 그 순간들을, 과연 누가 이쪽부터 저쪽까지 아울러서 완벽하게 말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밥 한 끼를 먹어도 서로 다 다르게 기억하는데, 하물며 전쟁범죄라는 대규모의 비극은 어떠할까요.

ⓒ영화 '라쇼몽'

ⓒ영화 '라쇼몽'

언급조차 할 수 없던 생채기의 시간을 지나. 영화로든 드라마로든 연극으로든, 그 기억의 방법들을 이제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왔습니다.?그렇기에, 이런 방법 저런 방법들을 가지고 기억의 합집합이 더 다양하게 모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전승해야 할 일체의 참혹한 비극과 죄악을, 당신은 어떻게 기억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기억들의 합집합을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의 다양함이 모이는 세상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성노예’는 성적 혹사 이외의 경험과 기억을 은폐해버리는 말이다. 위안부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측면만 주목해서 ‘피해자’로서 기억 이외를 은폐하는 것은 위안부의 전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된다. 그것은 위안부들에게서 스스로 기억의 ‘주인’이 될 권리를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타자가 바라는 기억만을 가지게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종속을 강제하는 것이 된다.”

"아사히신문, '제국의위안부' 서평 게재" - 한국일보

 

 

Tweet about this on TwitterShare on FacebookShare on Google+Pin on PinterestShare on TumblrEmail this to someone
The following two tabs change content below.
김어진

김어진

Twenties Timeline 피처 디렉터. 상식이 모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