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 아래에서 마라톤을 외치다

10km 하프마라톤, 제가 뛰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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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수치가 최고치를 달린다는 소식이 전국을 뒤덮고 있었다. 언론은 황사의 피해에 대한 이야기들로 떠들썩하다.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날씨에 바깥에 나가는 건 자살행위라고 시끌시끌하다.

그리고 나는, 마라톤이 예정되어 있었다. 참가비는 무려 4만원.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충분한 허세를 부릴 수 있는 금액이다. ☆타벅스에서 온갖 호사를 부릴 수도 있는 금액이다. 생돈을 버릴 생각을 하니 자다가도 눈이 떠졌다. 이런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이제부턴 정말 공부뿐이야

아니… 마라톤 뿐이야!

 

AM 6:40

물론 4만원이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마라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 못내 그리웠다. ?완주 후에 느끼는 쾌감을 다시 한번 온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였나보다. 모래바람 가득한 새벽 공기를 비집고 길을 나선 까닭은.

사람들 수가 적지는 않을까, 혹은 광화문 일대가 뿌옇게 보이지는 않을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이게 왠걸. 광장은 마라톤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아, 혼자가 아니구나. 그 순간 어쩐지?날씨가 맑아보였다. 대기 상태도 괜시리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동지들을 보니 벅차오르는 마음

동지들을 보니 벅차오르는 마음

마라톤에는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헐렁한 웃옷에 짧은 반바지의 기본적인 차림을 시작으로, 백발을 휘날리는?할아버지, 엄마 손 붙잡고 함께 온 아이들까지. 거리에서 만났더라면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같은 라인을 뛰는 이 순간,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친숙하다.

안내 방송이 울려퍼진다. 지금 하고 있는 준비운동을 마무리 지으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저 멀리 10km 출발선이 보인다.

 

AM 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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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km는 상암까지. 내 목표는 10km, 여의도공원.

어릴 적, 운동회에서 계주를 도맡아 담당했었다. 다소 늦은 바통을 넘겨받아 다른 주자를 역전하는 순간도 짜릿하지만, 내 심장을 가장 뛰게 하는 순간은 출발하기 직전이다. 이 앞에 무엇이 펼처질지 모르는 막연함이 가져다주는 그 설레임이 견딜 수 없이 좋았다.

오늘 내가 도전한 구간은 10km.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되는 코스는 마포대교를 가로질러 여의도광장까지 진행될 예정이었다. ?초반부터 속도를 냈다간 대번에 피 맛이 울컥 올라오겠지. 그러다 아마 마지막에는 거의 네 발로 걸어가겠지. 이미 경험해 봐서 잘 알고 있다. 속도를 조절해 뛰었다.

이런 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내 앞으로 사람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할 때가 그렇다. ?평정심을 찾기 위해 더욱 호흡에 집중한다. 입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코를 통해서만. 두번 흡입하고 두번 내 쉬고. 계속해서 그렇게. 점점 발걸음이 경쾌해진다. 느낌이 좋았다.

 

5km 구간 돌파

‘음악은 나라가 허락한 마약이다’ 는 허세가 있지 않던가.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인정합니다. 도로를 내달리는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두 다리와 빠른 비트의 음악 뿐이다.

조금 속도를 올려본다. 그러다 턱하고 숨이 막히는 순간이 오겠지. 미리 준비한 음악이 있다. 다이나믹 듀오의 “만루홈런”을 튼다. 신명나게 나오는 욕설이 미치도록 쿵쾅거리는 심장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속도가 나와도 생각보다 숨이 가쁘지 않다.??이 템포를 유지하고 싶다. 이럴 때는 블락비의 “HER”가 제격이다.

내가 이렇게 뛰고 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해.

내가 이렇게 뛰고 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해.

뛰려면 아예 뛰고, 걸으려면 아예 걷는 게 낫다. 줄창 뛰다 걸어버리면 순식간에 퍼져 버린다. 하지만 이런 다짐과 다르게 다리가 무거워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제일 아끼는 노래를 꺼낼 순간이 왔다. THE SCRIPT의?“THE MAN WHO CAN’T BE MOVED”가 시작된다. 감미로운 보컬이 묻는다. “And your heart starts to wonder where on this earth I could be” 나도 모르게 답하고 말았다. 저 앞에 마포대교가 보인다고.

 

8km 구간 돌파

사실 이쯤 되면 다리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누군가 툭 밀기라도 한다면 바로 넘어질지도 모르는 상태다. 거의 허공이 붕붕 뜨는 기분과도 비슷한데, 이때 한강을 건너는 기분이 무척 색다르다. 분명 땅 위를 딛고 있지만, 오래 달리면서 찾아오는 약간의 high한 기분과 함께 마치 강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다. 마라톤을 하면서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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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뿌옇게 63빌딩 모습이 보였다. 기상청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나 보다. 미세먼지, 그리고 황사와 함께하는 마라톤. 그런데 딱히, 목이 칼칼하거나 답답한 기분을 느낄 사이도 없다.?내가 언제 대교를 가로질러 달려볼 수 있겠는가. 차량으로 빼곡한 이 다리를 질주한다는 기분은 쉽게 느낄 수 없는 경험이다.

한강에 걸처진 풍경들이 휙휙 지나간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도 여전히 내 취향이다. 어느 정도 탄력을 받은 다리도 나를 잘 지탱해주고 있었다.

 

9km: DEAD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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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달콤함은 한강 구간이 끝나는 순간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이 리듬을 망치고 있었다. 저 멀리 멈춰서서 거친 숨을 고르는 사람들이 저 앞에 보인다. ?중도포기자가 가장 많이 나온 구간이기도 하다. 동시에 달콤한 유혹도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 이 정도면 많이 뛰었잖아? 그만해도 괜찮아. 아무도 말리지 않는 외로운 싸움이 한참이다.

무엇보다 목이 말랐다. 앞의 주자들이 싹 쓸어간 건가. 살기 위해 동공을 굴려도, 음료는 레이더망에 도통 잡히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이는 족족 한 잔씩 해둘 것을. 마지막으로 물을 마신 게 언제던가. 아무리 전 세계적으로 물 부족 현상이 심하다지만, 너무 가혹한 환경이 아닌가. 말도 아닌 말들이 머릿속을 휘감는다.

심지어 배까지 고프다. 아, 삼겹살에 소주. 지난 주말에 먹은 파스타. 지난달에 먹었던 장충동 족발. 막걸리에 육전, 아니 을지로 동원집의 순대와 머릿고기도 아른거린다. 좋다 오늘 저녁은 양꼬치다.?새롭게 잡힌 목표가 다시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마지막 스퍼트를 내기로 한다.

 

“59분 02초”

위너의 상징

위너의 상징

첫 대회였던 서울국제마라톤 대회에서 뛰었던 기록은 1시간 10분이었다. 이번 기록은 59분이니까 다소 단축된 셈이다. 무엇보다?완주의 기쁨이 컸다. 특히 이 황사를 뚫고 달린 마라톤이라니! 온 몸이 천근만근 무겁긴 했지만, 기분은 너무나 홀가분했다.?만일 내가 지레 겁먹고 침대 속 이불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이날의 기억은 송두리째 날라갔을 것이다. 그저 ‘미세먼지가 극에 달했던 날’ 로 의미 없이 남았겠지.

처음엔 돈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취소한다. 사실 나를 집 밖으로 잡아 끈 것은 마라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수많은 파편들 때문이다.?잠시라도 멈춰서는 좋은 기록을 낼 수 없는, 자신의 페이스로 꾸준히 뛰어야만 하는 외로운 싸움. 거기서 각자 어떻게 달릴지, 어떤 페이스로 달릴지, 혼자 달릴지 함께 달릴지 아무도 모른다. 그냥 나대로 뛰면 그만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해도, 아무도 당신을 탓하지 않는다.

배불리 양꼬치를 먹고 온 다음 날, 다가오는 다음 일정을 찾고 있었다. 그때도 미세먼지 맞아 가며,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는 다리를 이끌며 뛰고 있겠지. 헐떡이는 내 모습은 누군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마라톤은 정말로, 너무 재밌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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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주

강연주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분수 같은 거 모르고 삽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