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스켓-맨이 코트를 영원히 떠난 이유

부질없는 수컷들의 서열 싸움에 농구계의 큰 인재를 잃었다네

저는 바스켓-맨 이니까요

모든 것은 아동용 농구대에서 시작되었다. 그 작은 구멍에 공이 쏙 들어가는 순간 느껴지는 묘한 쾌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러다 운명처럼 ‘슬램덩크’가 내 인생에 등장했다.?마침 내게는?182cm에 0.1톤이 넘는 완벽한 피지컬이 존재했다. 블리츠가 자연스럽게 인베를 가듯, 쉬는 시간과 야자 시간을 가리지 않고 농구를 하는 충실한 바스켓-맨의 생활을 누렸다.

난_바스켓맨이니까

날 위한 대사였다

그리고 서울에 왔다. 모든 이들이 주목하는 대학교 체육대회가 다가왔다. 지금이다. 내 고교 시절의 전부를 보여주리라. 하지만 설레임도 잠깐, 경기 시작 10초만에 선배와 교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아아, 전국의 벽은 이렇게 높았구나. 신발장에?조던8 농구화를 넣으면서, 내 농구 인생 1막도 그렇게 끝이 났다.

새로운 농구 인생은 사회복무요원 시절 찾아왔다. 알고 보니 근무지 주변에 농구 동호회가 있었다.?지역에서 농구 좀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아아, 이곳이라면 내 부족함을 연마할 수 있겠다. 제대 후 체육대회의 화려한 주인공으로 반드시 부활하리라. 그렇게 성공한 복학생의 모습을 흐뭇하게 떠올리며 망설임 없이 동호회에 가입했다.

첫 모임이 다가왔다. 정확한 드리블, 바른 슛 자세, 체계적인 스크린을 경험했다. 오오, 이것이 진정한 바스켓-맨의 세계. 나는 일개 풋내기에 불과했구나. 커다란 배움에 흥분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렇게 식스맨이 되었다가, 가끔 주전을 달았다가, 어느덧 베스트 파이브가 되어서 도 대회의 코트를 뜨겁게 누비고 있었다. ?마치 일본 청춘 영화에서 보던, 화사한 여름날의 냄새가 나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 팀은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때의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코트의 매너를 모르는 무뢰배들이여

다만,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한 주에 두 번 정도 모이던 모임이 네 번으로 늘어나더니, 급기야?오후 4시만 되면 ‘저녁에 번개?’라는 문자가 날아왔다.?고등학생 같은 뜨거움은 너무 좋지만, 그렇다고 고딩처럼 매일 볼 것은 없지 않은가. 거기다가 당시의 나는 20대 초반의 파릇한 막내였다. 형님들이 모이는데 빠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짝사랑이 비참한 까닭은 상대방이 바라지도 않는데도 자기 혼자 정성을 다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다 내 맘을 몰라준다고 새벽 2시에 카톡을 보내지. 그런데, 형님 동생 강조하는 사람들의 착각이 이런 짝사랑과 꼭 같다. 바라지도 않은 술자리, 모임에 끌고 다니며 웃음거리를 만들다가, 스스로도 겸연쩍은지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이런 말을 덧붙인다. 물론, 아낌 받는다고 내가 고달픈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카스트 제도의 가장 바닥인 수드라의 삶을 보내던 어느 날.?결정적으로 동호회를 나오게 된 일이 터졌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번개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문자를 보내고, ?기분 전환 겸 헬스를 갔다. 그 모습을 회원 한 명에게 걸렸고, 대뜸 이런 말을 듣고 말았다.

“야 이 새끼야, 형님들 꼬박꼬박 나오는데 니가 뭔데 자꾸 빠지냐? ”

황당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폭언은 계속 되었다.

“위 아래도 모르면서 무슨 사회생활을 해. 이럴 꺼면 꺼져.”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ㅂㅂㅂ 탈주합니다

ㅂㅂㅂ 탈주합니다

 

사랑했다, 나의 코트여

군대에서는 특유의 갈굼과 상하 문화가 존재한다. 문제는 현역 시절 먹었던 해물소스 통조림이 잘못된 건지, 제대 이후의 한국의 수컷 집단에서도 이러한 문화가 ‘나이‘를 기준해서 무섭도록 소급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종과 충성심을 가장한 집단 폭력과 침묵을 은연중에 학습해온 불행한 생존자들이다. 그리고 그 생존자들이 만든 이곳은 더 이상 동호회가 아니었다. 마치 돌격남자훈련소처럼 자기들끼리 으쌰으쌰 하는 수컷들의 안타까운 도피처, 외로움의 해우소였을 뿐이었다.?무엇보다, 이것을 과연 진정한 바스켓-맨의 정신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내게 남은 선택지는 장발의 정대만처럼 사랑하는 코트를 떠나는 일 뿐이었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장발의 정대만처럼 사랑하는 코트를 떠나는 일 뿐이었다.

몇 년이 지났다. 얼마 전 헬스장을 다시 등록하러 가는 길에 애들이 놀고 있는 농구코트를 봤다.?문득 근황이 궁금해져서 수소문해보니, 그 동호회는 파벌 싸움이 나서 두 개로 갈라졌다고 한다.?씁쓸한 일이었다.

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아무도 없는 코트의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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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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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다 10키로가 쪘습니다. 이제는 가벼워 질 때 인 것 같습니다. Shall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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