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팀플 반댈세

어째서 조별과제는 바뀌지 않는 베드엔딩이어야 하는가?

선배, 팀플이 공산주의 같은 거라면서요?

경제학과 새내기 김모 군. 얼떨결에 들어간 사회학 수업에서 드디어 말로만 듣던 “조별 발표과제”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3조 조장이 된 최고학번 선배님의 의견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끄덕이는 것을 보며 김모 군은 흐뭇했다. 그런데 12일 뒤 두 번째 회의 날 김모 군이 약속 장소에 나가 보니, 일곱 명 중 네 명이 사정이 있다며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닌가??그나마 그 셋도 서로 바쁘다 보니 회의는 어느 새 싸이월드 카페에서만 진행되었고, 리허설 한 번 제대로 못 한 발표 담당 복학생 선배는 기껏 김모 군이 준비한 PPT와 조장님이 혼자 밤새 쓴 대본을 제대로 말아먹었다.

으즈므니 그긴 그르크 발표하지 믈르그 흐쓸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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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탈한 B-를 받은 뒤 조장 선배와 단둘이 학교 식당에서 조촐하게 가진 3조 뒤풀이 자리, 김모 군은 우스갯소리로 질문한다. “팀플이라는 게 다 이런 건가 봐요? 어디서 보니까 공산주의가 이런 식으로 망했다던데. 하하.” 그런데 그 조장 선배가 정색을 하고 어려운 말을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단 행동의 실패라고 봐야죠. 제가 정치학과잖아요. OOO 교수님 수업 중에 올슨 나올 때가 있거든요. 그거 한 번 들어보세요.”

 

그래, 그건 집단 행동의 실패였어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던 김모 군. 그러나 그 기억 때문인지 정치학을 복수전공하게 된 그는 이윽고 OOO 교수님의 “지방자치” 수업을 신청한다. 1주차부터 쏟아지는 각종 용어와 이론에 어질어질하던 중 벼락같이 잠이 깨었다.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맨셔 올슨 들어갑니다. 여러분의 팀플이 왜 쉽게 잘 안 되는지 배울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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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때 상상한 대학 팀플의 모습

이후 몇 주 동안 그는 올슨(Mancur Olson)의 놀라운 통찰에 쉴 새 없이 감탄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2인 이상이 하는 일은 뭐든지 ‘집단 행동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 원리를 알고 행동을 조직해야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제야 김모 군은 전말을 파악했다. 그때 3조 사람들이 조장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던 건 자기 발언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취한 합리적 태도였으며, 그들이 출석하지 않은 것은 하나의 무임승차였고, 그 발표를 조장님이 끝까지 해냈던 것은 그 조장 선배가 3조의 지배적 행위자(쉽게 말해 제일 “아쉬운” 사람)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 수업은 김모 군의 해묵은 궁금증도 해결해 주었다. “공산주의와 집단 행동은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행동의 수확을 구성원이 균등 소유한다는 특징 때문에 와해된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전경련 같은 집단은 전혀 공산주의적이지 않지만 정치권을 압박하는 등의 집단 행동에는 항상 성공하잖아요? (웃음) 팀플 역시 공산주의라기보다 집단 행동이 맞지요. 좋은 질문입니다.”

 

교수님, 팀플을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그 다음 학기 동서양 고전 세미나를 신청한 김모 군. 들어가서 보니 자기가 거의 최고 학번이다. 교수님은 첫 수업부터 대뜸 고전 서적 열몇 권의 목록을 화면에 띄우고는 팀을 일곱 개로 짜서 다다음 주부터 발표할 준비를 하라고 시키곤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오십여 명의 후배 학우들이 그저 서로 두리번거리고만 있던 그 때, 김모 군은 문득 손을 들어 교수님께 한 마디 말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강의실에 훨씬 크게 울렸다.

“교수님, 주중에 같은 시간대가 비는 사람들끼리 조를 짜면 어떨까요?”

 

오호?

오호?

수업 조교와 함께 김모 군이 단상에서 즉석 조사를 했다. 수요일 저녁에 시간 나는 사람들이 네 명 있길래 그들을 한 조로 모았고, 주말에 한가하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먼저 발표할 팀 둘과 나중에 발표할 팀 둘로 나누어 편성했다. 나머지는 따로 모여 서로 스케줄 확인해서 5명 이하로 모이라고 했다. 생각보다 발표 팀 편성이 일찍 끝나자 교수님은 당황하시면서 “오늘은 이걸로 마칩니다.”하고는 나가 버렸다.

2주간의 사전 강의가 끝나갈 즈음 김모 군은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 조원이 5명보다 많은 조가 있지 않습니까?”
“있겠죠, 왜요?”
“그 조에서 참여를 잘 안 하고 있는 조원이 누구냐고 조장들에게 물어보시면 어떨까요?”
“할 수는 있는데, 왜 5명 이하 조는 안 물어보나요?”
“거기는 서로 알아서 하게 돼 있거든요.”

교수님은 김모 군이 건의한 대로 조장들의 보고를 받은 뒤 수업 시간에 그걸 발표했다.
그리고는 폭탄 선언을 했다.

“이 사람들은 따로 한 팀이 되어서 저번에 하려다 말았던 책 발표할 준비 하세요.”

탈락한 그 네 명은 수업 시간 내내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고, 생존한 나머지 수강생들은 ‘팀플’하기 훨씬 편해졌다며 결의를 새로 다지고 있었다. 과두제의 효율, 사회적 압박(쉽게 말해 ‘눈치 주기’) 그리고 구성원의 공통 관심사를 만드는 원리들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학기 고전 세미나는 학교 익명 게시판에 “세미나 발표 썰”이 한 건도 올라오지 않고 끝난 유일한 고전세미나의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팀플이 망하는 게 왜 당연하다고 생각해?

지금 김모 군은 평범한 취업 준비생이다. 수업은 한 주에 네 시간만 듣고 나머지 시간 동안 아르바이트와 토플 학원, MOS 공부에 바쁘다. 쉬는 시간에 가끔 페이스북을 열어 보는 게 그의 유일한 낙인데, 예전에 ‘좋아요’ 해 두었던 <대학의 개념원리> 페이지에서 팀플 단체 채팅방 캡쳐 사진이 유머라고 올라오는 것을 볼 때마다, 그리고 거기 달린 숱한 ‘ㅋㅋㅋ’와 ‘ㅜㅜ…’를 볼 때마다 씁쓸하다.

왜요?

왜요?

어느 날인가는 사진 제목이 “역시 팀플은 공산주의.jotmang”라고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결국 참지 못해 장문의 댓글을 적기 시작했다.

왜 팀플 실패 경험담을 자꾸 퍼오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우리가 발표수업 망치려고,
공산주의 폐단 체험이나 하려고 팀플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혼자 배워 혼자 준비할 수 없는 것을 다같이 얻어가는 법을 배우는 게
팀플의 중요 목적 중 하나라면, 마치 망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무의미한 재확인과
조소의 무한 반복 대신 성공적인 팀플 대안을 공유해서
대학 생활의 진짜 개념원리를 가이드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

까지 쓰던 김모 군은, 문득 이런 말 썼다가 분위기 깬다고 차단 먹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나서 쓰던 걸 전부 지우고 학원으로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만약 김모 군이 그걸 진지하게 건의했더라면 어땠을까?
오늘 우리가 팀플을 대하는 태도가 지금보다는 좀더 건설적인 쪽으로 나아졌을까?

우리는 김모 군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므로, 그것은 오늘도 그저 하나의 물음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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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진

김어진

Twenties Timeline 피처 디렉터. 상식이 모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