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수능을 친 내가 나에게 말했다

‘나’를 만들어갈 시간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엄마가 정성스레 싸 준 불고기를 다 먹지 못했다. 공들여 준비한 보온 도시락 안에서마저 차갑게 식어버린 것은 둘째치고, 어쩐지 바깥보다 더 추운 교실 공기에 손가락이 꽁꽁 얼어 젓가락질을 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주섬주섬 도시락을 정리해 교실 앞부분에 가져다 두고,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냥 모의고사 보는 기분일 거라고, 웃으며 말하던 선배의 말이 꼭 맞았다. 달마다 꼬박꼬박 보던 모의고사를, 11월에도 이어서 보는 것 같았다. 수험 생활이 끝난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늘이 지나고 12월이 돌아와도 시험을 볼 것 같은,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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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의 수능이 끝이 났다.

성적표가 나왔다. 걱정스런 표정의 담임 선생님 앞에서도, 밤새워 고민하는 엄마 앞에서도, 나만 의연했다. 주변에서는 하나 둘 내년부터 들어갈 곳의 이름이 정해지고 나만 혼자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을 때에는 내심 불안했지만, 그래도 ‘큰일났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애써 지웠다. 그 불안함을 잊기 위해, 차라리 영화 몇 편을 연달아 보고,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지금까지 켜켜이 쌓아온 '나'라는 존재가 한 번에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무엇보다, 앞으로의 시간들은 지금까지 견뎌온 시간보다 훨씬 무거울 게 분명하니, 겨우 이 정도로 기 죽으면 안 될 거라는 생각으로 매일을 버텼다. 그렇게 해가 바뀌어갈 때쯤, 지루한 겨울방학의 끝자락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_상상했던_대학수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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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없이 시작한 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지루한 학과 수업 틈틈이, 꿈꿔왔던 재밌는 교양 수업들을 골라 들었다.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궁금했던 미학에 대한 수업을 들었고, 평생 만나볼 수나 있을까 싶었던 좋은 교수님들도 많이 만났다. 꼭 배워보고 싶었던 전공은 복수전공을 이수하며 더 즐겁게 수강했다.

길고 긴 방학은, 생각만 하던 것들을 실제로 하는 것으로 보냈다.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해외 봉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어학점수와 자격증을 위해 방학 내내 도서관에 처박혀있어 보기도 하고, 인턴 생활을 하며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고생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성장시켰던 것은 타지에서 홀로 보낸 시간들이었다. 주변에서는 무슨 고생을 사서 하냐며 뜯어말리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고시원에 자리를 잡고 좋아하는 것들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근처 도서관에 가기도 하고, 주머니에 여유가 생기면 하루에 두 개의 전시회를 연달아 보러 가기도 했다.

그렇게, 어떤 것이 되었든 생각으로 그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부족하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하려고, 하고싶은 것을 찾으려고, 그렇게 조금씩 문을 열고 길을 만든 결과가 지금의 내가 사랑하는 내 모습이다.?

내가 만든 지금의 내 모습을 나는 긍정한다.

내가 만든 지금의 내 모습을 나는 긍정한다.

수능을 마치고 가장 많이 들은 것은, 큰 고비를 넘겼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뭔가 끝난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았고, 수능만 끝나면 해결될 것 같던 모든 문제들은, 내 노력 없이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막연하기만 했던 그 순간은 순식간에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답답하기만 했던 그 시절도, 내가 쥐고 있는 열쇠에 가장 잘 맞는 열쇠구멍을 가진 문을 찾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나 열어야 할 다음 단계를 위해 놓여 있는 수없이 많은 문들 중에서, 내가 갈고 닦아 온 열쇠의 모양에 딱 들어맞는 문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그 문을 금세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디지만 마침내 찾아내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각자 다른 시간이 필요할 뿐.

각자 다른 시간이 필요할 뿐.

엄마의 몸으로부터 세상에 나왔던 것이 첫 번째의 문을 연 것이라면, 이제 막 수능을 본 열아홉들은 겨우 두 번째의 문을 찾기 시작한 것뿐이다. 그 문을 찾는 시간은 (누누이 말했듯) 금방일 수도, 오래 걸려 지루할 수도 있다. 혹, 고생 끝에 찾은 문의 모양이 조금은 맘에 들지 않더라도, 그 문을 열고 나서 새로운 길을 열심히 닦아 나가면 된다.

그 어떤 결과를 떠나, 이제 겨우 두 번째 문을 열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힘주어 새로운 문을 찾아 나서는 길을 닦아 나가길 바란다. 그러다 보면, 새롭게 만날 문들은 이전보다 훨씬 반짝이고 있을 거라 믿는다.

누군가가 그랬었고,
앞으로 당신이 그럴 것처럼.

아직 갈 길이 많고도 멀다. 짐을 챙길 시간이다.

아직 갈 길이 많고도 멀다. 짐을 챙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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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여름

문여름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좋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