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치인의 20대 ① 김문수와 이재오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기억들

한국의 레닌, 김문수

고교 재학 시절 부터 반독재 시위를 주도하고, 대학 진학 후 학생운동을 하던 중 제적당한 사람이 있다. 한 노동자의 분신에 충격을 받고, 공장에 뛰어들어 노동운동으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 했던 그 혁명가의 이름은 김문수라고 한다. 의심할 필요 없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나 도지산데, 거 누구요’의 그 김문수, 맞다.

경북고 3학년 재학 중, 대구에서 최초로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던 김문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로 진학한다. 그리고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기다리던 새내기 김문수 앞에 한 선배가 나타나 연설을 시작한다. 현 강동구 국회의원인 심재권이었다. “당신들은 출세하고 싶어서 대학에 왔습니까? 당신들 눈에는 이 나라가 처한 문제와, 어려운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길로 선배를 따라나선 김문수는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유신헌법의 그림자가 짙던 1972년, 모두가 침묵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가는 유신에 반대하는 개헌운동을 준비하며 조금씩 민주주의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김문수 역시 학교는 물론,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조직하는 등 열성으로 유신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해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긴급조치를 내린 것이었다. 그 여파로 학생운동가 김문수는 대학에서 제적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식인들만의 운동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던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김문수는 대학생 신분을 숨긴 채 공장 노동자로 위장취업을 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 지식인만의 운동에 한계를 느낀 대학생들이 대거 공장으로 위장취업을 하게 되는데, 1970년대부터 일찍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김문수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존재였다.)

청계천, 구로공단의 현장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등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을 목격한 김문수는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78년, 구로공단의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에 선출되기에 이른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여덟, 약관의 나이에도 특유의 친화력과 사람들을 휘어잡는 언변으로 위원장이 된 그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직접 이끌게 된다. 물론 이로 인해 회사에 의해 해고 당한 것은 물론, ‘노조하는 빨갱이’를 가만 둘 수 없었던 군사정권은 그를 고문하고 구속시켜버렸다.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김문수는 노동운동활동을 통해 연을 맺은 세진전자 노조위원장 설난영씨와 결혼한다. 봉천동에서 열린 결혼식에 가장 많이 온 하객은 식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전경들이었다고 한다.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김문수는 노동운동활동을 통해 연을 맺은 세진전자 노조위원장 설난영씨와 결혼한다. 참고로 봉천동에서 열린 김문수의 결혼식에 가장 많이 온 하객은 식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전경들이었다고 한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해고자 김문수는 심상정(역시 우리가 아는 심상정이 맞다) 등과 함께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핵심간부로 활동한다. 1985년 최초의 노동자 연대 파업이었던 구로동맹파업에 가담한 김문수는 다시 경찰의 수배망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경찰의 수배 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뽀글머리 가발로 여장을 감행하면서까지 시위대 사이에 나타나곤 했다.

유김심-오마이뉴스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는 한나라당의 김문수 vs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vs 진보신당의 심상정 3자 구도로 진행되었다. 심상정은 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시민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직에서 사퇴했고, 김문수는 52%의 지지율로 진땀승을 거두었다.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오마이뉴스

1986년. 그날밤의 인천시내는 나뒹구는 화염병과 페퍼포그 연기로 기억될 것이다. 노동자, 대학생, 재야단체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5.3 직선제 개헌 투쟁은 그만큼 격렬했다. 며칠 뒤 시위를 주도한 김문수 등 핵심 간부들은 숨어있던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경찰에 체포된다. 악명 높은 보안사령부로 끌려간 김문수는 모진 고문을 받고, 다시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 때 김문수가 갖은 고문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심상정의 행방을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참고로 심상정의 남편을 심상정과 소개시켜 준 사람이 김문수이기도 했다. 또한 김문수와 함께 잡혀가 고초를 겪은 이는 유시민의 동생 유시주였다.)

그러나 아마도 이 때가 마지막 불꽃이었던걸까. 김문수는 출소 후 군사정권 이후 최초의 합법적 진보정당인 민중당 창당에 힘을 실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한 때 한국의 레닌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김문수는 이제 현장만을 외치던 ‘경험주의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현장주의자'' 김문수. 일일 택시운전수가 되어 도민들의 삶의 현장으로 뛰어든 것을 단순히 1회용 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현장주의자'' 김문수. 일일 택시운전수가 되어 도민들의 삶의 현장으로 뛰어든 것을 단순히 1회용 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오마이뉴스

혁명가 김문수의 끝은 소련의 붕괴와 함께 찾아왔다. 현실의 준거가 붕괴했다는 혼란 속에서 많은 운동가들이 무너졌다. 무너진 이상 앞에 새로운 준거가 필요했다. 김문수는 김영삼과 보수세력이 연합한 민자당의 입당 제의를 받아들이고 만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간다.”는 그 유명한 말을 남기고. 그리고 약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여전히 호랑이를 잡고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호랑이가 되고 있는걸까.

정답은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정답은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농민이 중심되는 나라를 꿈꾸던 왕의 남자 이재오

노동운동에 김문수가 있었다면, 재야 정치운동에는 이재오가 있었다. MB의 킹메이커, 왕의 남자, 친이계의 좌장으로 불리고 있는 이재오. 지금은 그냥 욕심 많은 국회의원 아저씨라며 댓글에서 놀림받기 일쑤지만 그의 청춘은 농민운동가의 꿈과 열망이란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막 덮은 강원도 산골소년의 눈이 얼마나 반짝거렸을지 상상할수 있겠는가. 어려운 농민의 처지를 이해하고, 현실을 바꿔보려던 농민계몽운동가 박동혁은 이재오의 오랜 우상이 된다. 그렇게 농촌운동가의 꿈을 품은 그는 중앙대 농촌사회개발학과로 진학한다. 여유롭게 대학생활을 즐길 수 있는 시국이 아니었다.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경제 성장이란 가치를 전면적으로 내세웠다. 이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1963년,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일본으로 가 무상차관 3억 달러, 유상차관 2억 달러 등 6억 달러를 일본으로부터 제공받는 대신에 대일청구권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합의를 하게 된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은 상황. 회담 내용이 발표되자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선두에 선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단식 투쟁으로 촉발된 학생 시위는 서울의 다른 대학들로 확대되었다.

특히 김종필이 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6월 3일에 시위는 최고조에 달했다. 곳곳에서 경찰과 학생들의 충돌로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청와대 앞 저지선에서는 일본 총리 이케다, 박정희, 김종필 등의 모형을 불태우는 화형식까지 벌어졌다.

모르는 사람은 어색한 민중당 사무총장 시절의 이재오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어색할 민중당 사무총장 시절의 이재오

그 날, 군사정권은 저녁 서울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학을 강제휴교 조치했다. 이어 대학생, 언론인, 정치인 등 주요 인물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란 및 소요죄로 잡혀 간 대학생 중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꽤 있다. 이재오 뿐 아니라 이명박 전 대통령, 손학규 전 의원 등을 들 수 있겠다. 특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재오와 이명박의 인연은 ‘6.3 동지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대에 입사하여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이명박과 달리 이재오는 계속해서 재야운동의 길을 걸었다. 고교 국어교사가 된 이재오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족통일위원장을 지내며 모진 고문과 여러 차례의 옥살이에 시달려야 했다.

이재오 역시 군사정권의 잔혹한 고문을 피할 수 없었다. 의 엔딩 크레딧 인터뷰에 이재오가 등장하는 이유다. - newspim

이재오 역시 군사정권의 잔혹한 고문을 피할 수 없었다. <남영동 1985>의 엔딩 크레딧 인터뷰에 이재오가 등장하는 이유다. ⓒ newspim

이재오는 이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을 거쳐 김문수, 장기표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하고 당의 대표 격인 사무총장이 된다. 그러나 이후 현실의 벽을 실감하며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로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입당,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가난했던 농부의 아들, 기나긴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력이 화려하게 걸려 있다. 그리고 그는 지난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건설 계획과 관련해 "대운하 건설의 꿈은 버릴 수 없는 역사적 과제"라고 강조한 바 있다.

2013년, 전라남도 국정감사에서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수질악화와 농경지 침수는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났다. 현재 전남 나주시 동강 일대의 농지는 사업 이후 산성과 염도가 높아진 탓에 정상적인 벼의 발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영산강 인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농지가 늪지화되었고, 주민들은 생업으로 삼고있던 농사를 포기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직도 그는 박동혁이 꿈꾸던 세상을 기억하고 있을까. 2008년 초, 자신의 명예박사 수여식에 반대하는 시위 끝에 끌려나가는 중앙대 후배들을 바라보던 그의 곁에는 상록의 냄새가 여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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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흑석동을 좋아하는 밥버러지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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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제 시선을 잡아끈 글은 ?‘어느 정치인의 20대 ? ① 김문수와 이재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