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랑 오락실에서 동전을 넣고 게임을 했다. 피카츄 돈까스를 손에 들고 뭐가 그리 좋은지 동네를 돌아다녔다. 어른이 되면 내가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 상상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자기소개서 비슷한 종이 아래 ?‘장래 희망’이라는 부분은 언제나 고민이었다. 내가 좋아하던?것들을 적기로 했다. 4강전에 올라 가족들이 두 팔을 들고 소리를 지를때는 축구 해설가를 꿈꾸었다. 예능 프로그램의 재방송 시간까지 기억하며 챙겨볼때는 PD를 적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내 장래 희망에는 '영화감독'이라는 글자가 적히기 시작했다.
캐이블 영화TV의 스케쥴을 빠짐없이 체크하고 ?근처 독립 영화관을 혼자 찾아가기 시작했다. 극장에 앉을 때 불이 꺼지는 순간이 견딜 수 없이 좋았다. 하지만 대학진학을 앞둔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문과, 그리고 이과밖에 없었다. 취업 걱정 가득한 철학과를 선택했다. 언젠가 내가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되었을 때 이 선택이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하지만 꿈이 흔들리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지 않는 현실
1995년에 동숭시네마텍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영화관이 있다. 국내 최초의 예술영화 전용관이다. 문화부가 인정한 예술영화전용관 1호였던 그곳에서 ‘씨네필’들은 비디오테이프로만 보던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화들을 실제로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다 내려갈 때까지 불을 켜지 않는 예의가 여유가 마음에 든 곳, 마치 하나의 해방구와 같았던?그 영화관의 이름은 하이퍼텍나다라고 한다.
하이퍼텍나다의 10주년 행사 ‘2010 나다의 마지막 프로포즈’에 참여하면서 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큰 극장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감성을 일깨웠던?추억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 그 영화관은 이제 없다.??마지막을 지켜볼 틈도 없이 사라졌다. 대중들의 취향을 마음대로 정하고 배제하는 어떤 사람들이 밉다고 생각했다.
매우 추웠던 겨울의 어느 날, 시나리오를 쓰는 몇 달 동안 월세가 밀렸던 작가가 자기 몸이 아픈 줄 알면서도 병원은 고사하고 한 끼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을 뒤로 한 일이 있다. 시나리오를 일단 넘긴 뒤 제작에 들어가야만 잔금을 받을 수 있는 구조 안에서 돈을 제대로 벌지 못했던 작가는 스스로를 5타수 무안타에 그치는 야구선수에 자조적으로 빗대었다.
피나는 노력과 빛나는 재능이 결합될 때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영화를 날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 마다 나는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명물, ?‘그린 몬스터’가 떠오른다. 타자들의 홈런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높히 지어진 그 커다란 담벽 말이다.
지난 9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표한 '예술영화관 운영지원 사업' 심사 결과는 지역의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야 하는 영화관들보다 멀티플렉스가 더 큰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 결정에 대해 독립영화전용관 확대를 위한 시민모임의 원승환 이사는?"영화 문화의 종 다양성과 지역의 다양성 등은 모두 끔찍하게 훼손될 것이다"고 평가했다.
?최대 200석까지 좌석규모에 연동해 좌석 점유율의 6~10%를 운영보조금으로 지원하고 온라인 홍보도 돕는 이 사업이야 말로 영화의 다양성을 지켜온 '작은 영화관'들에게 필요한 제도였다. 특히 대구에서 많은 역할을 해온 동성아트홀의 경우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작년 폐관을 선언했다가 올해 겨우 문을 열었을 정도로 지원이 필요한 곳이었다. 하지만?이들을 대신해서 지원 대상에 선정된 영화관은 롯데시네마였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하여
문화체육관광부는 2013년 부터 근로기간과 세부 업무 명시, 매월 정기적인 임금 지급, 4대 보험 가입 및 휴식시간 보장 등 영화 제작진들의 근로 여건과 관행을 개선하는 ''영화산업 근로분야 표준계약서'를 ?고시했다. 그리고 2014년에 조사한 근로표준계약서 사용률은 23.0%로, 시행 첫 해에 5.1%였던 것에 비해 4배 이상 증가하는 등 영화 제작 전반에 근로표준계약서의 도입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 효과는 어떨까?
꼰대들을 위한 천만 영화라는 오명을 얻은 <국제시장>은 사실 우리나라 영화 제작 과정 전체에서 모든 스태프가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최초의 영화이다. 하루에 12시간 촬영 및 추가 촬영시 수당 지급, 주1일 휴일, 그리고 4대 보험 보장이라는 규칙이 지켜진 현장이었다. 이로 인하여 3억원 가량의 추가비용이 들었지만,?촬영이 끝날 때마다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는 후문이다.
영화계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다. 비주얼다이브 디지털뉴스팀의 보도에 따르면?실제 근로표준계약서 적용을 경험한 영화인들은 "일일근로시간 준수와 충분한 휴식, 안정적인 임금 지급 등, 제작진 친화적인 근로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평가" 하는 한편 제작자 입장에서도 "좀 더 철저히 사전계획을 수립한 후 영화제작을 진행함에 따라 효율성이 높아지는 면도 있다"고 한다.
영화,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형누나들과 영화를 종종 찍던 후배 녀석이 시험기간에 먼저 같이 영화 한 편 만들자고 연락을 걸었다. 오지랖 넓게 벌려놓은 일이 종종 수습이 되지 않을 때도 있어서 망설였지만 우선 조만간 얼굴을 마주보고 만나기로 하였다.
나야 시골 동네 마을회관에서나 틀 수 있는 10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 찍고 만족하겠지만, 일찍이 진로를 정하고 수많은 공모전들에 참여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를 뛰고 있을 내 후배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래토록 카메라를 잡았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일이 곧 천직이라는 순수한 믿음이 지나치게 척박한 현실에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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