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기억이 가득한 각자의 공간

누구에게나 ‘집’은 필요하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학교 축제날이었다.

과 주점에서 열심히 안주를 만들다 잠시 앉아 땀을 식히던 그때, 엄마한테 문자가 왔다.

“중요한 메일을 보냈으니 확인하렴.”

연락이 흔치 않았던지라 웬일이지 싶었던 나는 그 자리에서 인터넷에 들어가 메일을 읽었고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보낸 메일은 우리 집에 불이 나서 모든 게 타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괜찮아요? 그건 다행이긴 한데… 애써서 지었는데 너무 아쉽네요.”

“괜찮아, 그렇게 예쁜 집도 아니었어. 내년 봄에 다시 지어야지.”

“……”

마치 소설의 한 장면 같았다. 하지만 진짜 나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나는 이번 추석을 친가와 외가에서 보냈다. 갈 곳이 없어진 우리 집 개랑 고양이도 외가에서 살기로 했다. 빨간날이 끝나기 무섭게 과제 핑계를 대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게 끝이었다.

그 집이 불타 없어진 지 한 달이 되었다.

분위기는 고요했다. 그럴 만도 했다.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살던 집도 아니었고, 나도 지난 것에 크게 인정을 두지 않는 편이고, 엄마도 꽤나 쿨하신 분이니까. 그렇게 지나가는 분위기였다. 외할머니가 티비 프로그램에서 '집'이 나오기만 해도 가슴 아파 못 보겠다고 채널을 돌리시기 전 까지는. 알고 보니 엄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추석을 절에서 보내신 이유가 '자신의 불행을 아는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하서' 라고 말하셨다. 가서 지낸다고 하셨다.

집은 그런 곳이었다. 가슴 깊이 사랑하고 잃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그런 곳.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영화가 있다. 아이는 친구의 집을 찾아 골목길을 돌고 또 돌고, 카메라는 그 모습을 쉬지 않고 긴 호흡으로 담는다. 집을 찾는 것은 멀고도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집 하나가 재가 되어 버리고 나서야 '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각자의 소중한 공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시간을 다른 사람과도 가지고 싶었다.

 

1. 집을 마음 속에 지은 내 이야기 (한모 양, 20세)

남의 소중한 공간을 묻는데 내 얘기를 하지 않는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우선은 내 이야기부터.

외동딸을 옳게 기르려는 엄마의 뜻이었던 것 같다. 좋은 환경을 찾아다니느라 이사를 많이 했다.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딱히 없다고 했고, 그럴때 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사실 내가 거쳐간 모든 공간들은 나의 고향이다. 다만 그런 것들과 이별하는데 익숙했을 뿐이다.

어린 나는 쉽게 정을 떼는 편이었다. 공들여 만든 점토 인형도 깨지는 순간 안녕이듯.

부모님의 현재 관계를 ‘별거’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될 즈음, ‘나와 엄마의’ 공간에 다른 아저씨가 들어왔다. 그 아저씨와 사이는 무척 좋았지만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기숙 중학교에 지원할 때, 편한 마음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적어도 이틀에 한번 집에 전화를 할 때 난 '집'을 거의 잊고 지냈고 2주에 한번 집에 가는 것도 귀찮아했다.

그렇게 기숙학교에 6년을 살았다. 가끔 집에 가도 공부를 핑계로 도서관을 맴돌았고 집 안에서도 하는 일이라고는 과거의 내가 쌓아놓은 물건을 뒤적이는게 다였다. 머리 두는 곳을 내 집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생각뿐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mary_gaston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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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 타지를 떠돌다 마침내 고향 땅에 묻힌 시체의 마음을 상상한다. 그러면 '친숙함'이라는 약을 먹은 것처럼 편안하고 행복하게 잠들게 된다. 누군가는 나를 두고 어딜 가든 편하게 지내는 나를 아주 씩씩한 소녀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집을 제외한 모든 곳이 편했던 거였다.

떠나오고 싶은 곳이 생긴 순간, 그리고 그 곳이 내가 집이라 부르는 공간이 된 순간 내 집은 곧 나 자신이 되었다. 룸메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나만 텅 빈 공간에 남는다. 연어들이 가는구나, 그리울 것이 있어서 물살을 거슬러 가는구나. 그리고 나는 해파리 같은 것이겠지. 빈약한 촉수 위에 집이라 부를 기억을 한가득 안고 있는 해파리. 어디로 떠밀려 가든 그곳이 내 집일 거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집을 거쳐갈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느 해변에 닿든, 행복한 해파리는 언제나 행복한 해파리겠지.

 

2. 힘들 땐 양화대교를 보러 가세요 (신모 양, 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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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대교에 있는 글귀에요. 노을 질 때 정말 예쁜데 그때 사진이 없어서 아쉽네요.”

현재 거주지는 학교 기숙사입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집, 공간, 제 마음의 고향은 한강공원이에요. 특히 양화대교 근처.

왜 그런가요?

원래 어렸을 때부터 대인기피증에 시달려서 학원이나 사람이 많은 곳을 가야 하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그런 상황이 오면 도피하듯이 혼자 걷기를 좀 많이 했는데 대학교에 와서 그게 다시 도진 거에요. 그래서 너무 힘들어서 또 혼자 걷는데, 어느 날은 걷다 보니까 노을 질 때쯤 양화대교까지 와버린 거에요. 귀에서는 자이언티의 ‘양화대교’가 또 우연히 흘러나오고.

그때 정말 펑펑 울었어요. 엄마 품에 온 것처럼. 그래서 그 후로는 많이 힘들 때마다 걸어서 양화대교까지 가요. 그럼 마음이 진짜 착 가라앉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통 힘들 땐 가족들에게 가지 않나요?

가족들한테 의지를 많이 못하는 편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라는 모토로 교육을 좀 많이 받아서인지. 그리고 부모님 두 분 다 제가 힘든 것보다 더 힘들게 사시는데 굳이 제가 거기에 짐을 더 얹고 싶진 않았어요. 동생도 장거리 통학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하는데 누나가 되어서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괜히 부담 줄까봐 말을 잘 안 해요.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가족들에게 내 얘기를 하기보다는 많이 듣는 편이라 말 자체를 많이 안 해요.

ⓒPaul Kim

ⓒPaul Kim

양화대교에게 한마디 전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시겠어요?

안녕 양화대교야! 이렇게 너에게 말을 건다는 게 어색하다. 마음으로는 수도 없이 말을 건 거 같은데. 우리가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가끔 지나가다 보는 사이인데 나는 너에게 참 많이 의지를 하네. 누구에게 잘 기대지 못하는 성격인 나를 언제나 따뜻한 노을과 함께 맞아줘서 고마워. 너 없었으면 짧지만 길었던 시간들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어.

노래 가사대로, 행복하자, 행복하자… 그렇게 말을 하면, 진짜로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지금 많이 행복하다고 하긴 힘들지만 너 덕분에 나는 그래도 행복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 많이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행복하자~

 

3. 21세기 자취생 (배모 군, 20세)

“난 고등학교 때도 그랬거든. 주말에 잡지 사서 스타벅스 가서 읽고, 백화점 구경하고, 애들한테 줄 딸기 같은 거 사고 그랬어. 아무런 생각 없이.”

“난 고등학교 때도 그랬거든. 주말에 잡지 사서 스타벅스 가서 읽고, 백화점 구경하고, 애들한테 줄 딸기 같은 거 사고 그랬어. 아무런 생각 없이.”

기숙사 나와서 자취한다며. 자취방은 어때?

별로야. 원룸인데, 학교 기숙사보단 낫지만 엄청 좁고 내가 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집 = 마음의 고향, 힘들 때 생각나는 곳, 좋은 기억이 깃든 공간”이라고 했을 때, 네가 생각하는 곳은 어디인 것 같아?

음… 난 백화점이나 스타벅스 같은 데. 힘들 땐 그런 델 가. 백화점을 한 바퀴 돌고 엘리베이터 앞에 의자 같은 게 있어. 그럼 거기 앉아서 계속 있는 거야. 아니면 스타벅스에 가서 높은 의자에 앉아서 뭐 하나 시켜. 난 핸드폰 충전을 잘 안 해서 밖에서는 핸드폰 잘 못 쓰거든. 그러면 거기서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는 거야.

보통은 집에서 쉬잖아, 힘들 때.

집은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있지만 위로가 되지는 않지, 청소가 안 되어 있는 걸 보면 막막하고, 하지만 그런 곳은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지, 또 항상 예쁘잖아. 집에서 어떤 활동을 한다면 모르겠지만, 물론 밖에 나가서도 아무것도 안 하긴 하지만, 집에서 가만히 있는 건 너무 사람을 축 처지게 해. 정말정말 아무것도 안하는 것 같아. 내가 무기력해진다는 걸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야. 근데 그러면 별 생각도 다 들고 힘든 것에 자꾸 빠져드는 게 싫어.

ⓒKat Northern Lights Man

ⓒKat Northern Lights Man

내가 아는 사람은 사람 많은 데를 가서 의욕을 얻는다던데, 그거랑 좀 다른 맥락인가?

나는 사람 많은 데가 아니라 소비의 중심지로 가야 돼. 얼마 전에 이렇게 했었어. 돈이 정말 없었거든? 전 재산이 구천 원밖에 없었어. 그래서 어떤 예쁜 카페에 갔지. 엄청 번화한 데나 비싼 곳은 아니었는데 수제 케이크가 있다는 거야. 그 카페에 들어가서 정말 맛있어 보이는 걸 하나 시키고 에스프레소를 하나 시켰어. 커피를 시킬 만큼의 돈은 없었거든. 그냥 그게 좋은 거야. 단순히 먹는 게 좋은 게 아니라 소비하는 게 좋은 거지.

그렇게 돈 쓰고 어떻게 살았어?

다행히 누가 나한테 돈을 갚았어. 그땐 너무 대책 없이 먹었지. 너무 힘들었거든. 아니면 중고서점 같은 델 가. 책을 보지는 않고 내가 살 만한 게 뭐가 있나 보면서 돌아다니는 거야. 사지는 못하지, 돈이 없어서. 또 러시나 향수 파는 매장에 가. 향을 맡아보고, 골라. 그 직원들이랑 얘기해. 그런 매장은 항상 직원들이 나랑 상담을 많이 해. 그 직원들은 항상 친절해. 이 향 괜찮으세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좀 더 무거운 향 있을까요? 내가 사든 안 사든 그렇게 뿌려 보고 얘기하고 뭔가 받아온다던지 하고 집에 가는 거야.

그렇게 내가 소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뭔가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 그냥 그게 좋아. 집에 와도 별로 허무하거나 그렇지 않아. 충분히 기뻐. 이렇게 말하니까 안쓰러운 것 같은데, (너무 현대인 같지?) 난 나만큼 이렇게 확실하게 스트레스를 없애는 수단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너만의 공간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집을 가지고 싶어?

꾸며야지. 예쁜 장식품 같은 거 파는 데 가서 되게 많이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지금 집은 별로… 꾸미고 싶긴 하지만 별로 의미도 없고, 그럴 돈도 없고. 만약 내 집,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집이 생긴다면 내 침실을 암실로 만들 거야. 방음벽도 달아 놓고. 잠을 잘 못 자거든.

 

4. 세상에 단 한 곳, 벚꽃을 보면 생각나는 우리 집 (황모 양,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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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저희 집이에요. 2008년 4월 사진입니다. 짱 예쁘죠? 진짜 가고 싶네요.”

저는 “집 = 마음의 고향, 힘들 때 생각나는 곳, 좋은 기억이 깃든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현재 주거지와 현재 집이 어디인지 말씀해 주세요!

지금은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의 한 낡은 원룸에서 자취 중이에요. 그리고 집은…제가 사정상 평생 10번 정도 집을 옮겼는데 두번째 집에 가장 오래 살았고, 그 곳이 유일하게 제 집이라고 생각하는 곳이에요. 경북 포항의 시골에 있는 한 전원주택이에요.

왜 그곳이 집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모로 애착이 많을 수밖에 없는 곳이에요. 외할머니께서 밭일을 하며 홀로 사시던 집에 건축일을 하시는 어머니가 집을 설계하셨고, 조경 일을 하시는 아버지가 넓은 밭을 마당으로 일일이 꾸미셨어요. 저를 가장 아끼시던 이모부가 저를 위해서 큰 벚나무에 그네도 직접 달아주셨어요. 집안 곳곳이 저와 가족들을 위한 배려로 이루어졌어요. 세면대도 초등학생인 제 키에 맞았고, 제가 그네를 타는 것을 거실에서 볼 수 있게 거실 한 쪽은 통유리였어요.

지금은 각자의 일 때문에 네 가족이 다 따로 살지만, 그 때의 기억 때문에 저는 우리 가족이 함께인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제는 그 곳이 저희 집이 아니지만요.

그 집에서 있었던 추억 하나 정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8살 때 집 앞 벚나무에 이모부가 그네를 매달아주셨어요. 그 이후에 저는 봄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어요. 벚꽃이 필 때 그 그네를 타면 막 벚꽃잎이 떨어졌거든요!! 그러면 뭔가 제가 핑클이 된 것 같고 그랬어요ㅋㅋㅋㅋ

그리고 하루는 제가 혼자 집에 있는데 처음 보는 차가 저희 집에 오는 거에요. 저는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해서 숨어있었는데, 몰래 보니까 저희 집 마당에서 어떤 가족이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먹었어요… 그 동안 아무것도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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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너무 예쁘니까 그런 일도 생기네요.

또 말하자면 그곳에서 절 키워주시던 외할머니가 저랑 함께 주무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외할머니와의 추억도 엄청 많은 집이에요.

많은 게 깃든 집이군요. 지금 살고 있는 곳과 옛날 집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가장 큰 차이점은 음… 옛날 집은 오직 나와 가족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면 지금 사는 곳은 돈만 내면 누구나 들어가서 2년 계약을 하고 사는 곳이라는 거죠. 창에는 창살이 있고 그 바로 앞에는 골목길과 하수구가 있고, 마당은커녕 햇볕에 옷을 널어놓을 공간도 없다는 거!

옛집은 어떻게 떠나오시게 되었나요?

재수를 하면서 서울에 올라올 때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집에 갔는데, 결정적으로 대학교 1학년 겨울에 부모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아는 분께 집을 팔았어요. 그래서 사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그 집을 꼭 되찾고 싶어요! 언젠간! 그래서 부모님도 다시 그 집으로 모시고, 제 아이들도 그 곳에서 키우고 싶어요. 여건이 안 되면 자주 가는 정도라도요.

사실 (아이들을)서울 아파트에서만 키우고 싶지 않거든요.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글을 쓰고 동물도 키우시고, 어머니는 꽃을 키우고 이것 저것 만드시고… 저는 그 곳에서 무언가 제가 좋아하는 것을 재택근무로 하면서 애들이랑 같이 살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겐 안 되겠죠…ㅎㅎ

집 이야기가 엄청 동화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유일한 제 낭만입니다.ㅠㅠ

 

5. 어머니, 나의 집 (강모 군, 2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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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작은 게 정말 좋아요. 모든 게 쉬워집니다. 청소나 정리도 아주 간편하죠.”

관악구 조원동 옥탑에 살고 있고 집이라 부를 곳은 현재 거주지입니다.

같은 집에서 계속 사셨다고 하는 데 집 자랑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우선 옥탑이다 보니 계단을 많이 올라가고 내려와서 운동이 되는 점이 좋았습니다. 단칸방이라서 부모님이랑 다른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되었고 집이 그리 크지 않아서 청소하는 데에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또 주방도 작아서 항상 상을 들고 방으로 가서 tv를 보며 밥을 먹을 수 있어요. 컴퓨터를 하는 동시에 tv를 본다거나 하는 것도 좋고.

보통 명절에는 다들 고향에 내려간다고 바쁜데 명절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저희 가족은 친척들이 모두 바쁘시고 너무 멀리 사셔서 명절에도 집에서 가족끼리 맛있는 걸 해먹거나 같이 tv를 보는 등 일상처럼 명절을 보냅니다. 저는 부모님이 편해하시는 점이 좋았으니까 명절을 집에서만 보내는 데에 아쉬움은 딱히 없었습니다. 지금에서야 한 가지 부러웠던 점은 여러 곳에서 많은 경험 쌓아보지 못했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서 생각나는 추억들 좀 말씀해 주세요.

그렇게 떠오르는 추억은 딱히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말씀드리자면 대학교 입학 소식을 처음 알렸을 때 어머니가 정말 행복해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팔이 부러졌다거나하는 좀 안 좋은 추억이 약간 떠오르네요.

(헉ㅋㅋㅋㅋ )얘기해 주세요.

(너무 좋아하시네요. ) 제가 6살 때 어머니가 몸살에 걸리셨는데 병원에 약을 사러 가면서 제가 어린 마음에 어머니보다 더 빨리 내려가겠다고 달려가다가 계단에서 굴러 부러졌었습니다. 또 이건 집 관련된 게 아닌 것 같긴 한데, 어머니가 약간 머리가 아프셔서 병원에 갔는데 뇌졸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집에 와서 어머니 몰래 울었었죠.

ⓒ연합뉴스

ⓒ연합뉴스

집이 곧 어머니였던 것 같네요.

(으 오글…) 근데 어머니가 집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집이나 밖에서 저는 뭘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어머니랑 단 둘이 지내다 보니 남들보다는 더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항상 조심히 살았죠. 어머니랑 대화할 때도 최대한 바르게 하려고 했고 학교에서도 소란 피지 않으려고 조용히 있었고.

하지만 그게 어머니 탓이라기보다는 제가 그냥 혼자서 많이 참고 살았던 것 같아요. 나는 어머니를 고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만 강하게 가지고 살았어요. 그런데 항상 건강해 보이시던 어머니가 뇌졸중이라는 큰 병에 걸리셨다는 게 제 잘못인 것 같았고. 그 때는 너무 무서웠죠. 혼자가 된 것 같아서. 그 무서움을 잊을 수는 없네요.

나중에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분가하실 건가요?

(일단 연애부터라도 어떻게….;;;;) 솔직히 그건 어려운 문제라서 제가 지금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저희 어머니는 분가하길 원하시긴 하지만요. 또 나중에 제 아내의 의견도 물어봐야 하겠죠. 저는 솔직히 분가를 하던 안하던 어머니께 연락을 많이 드릴 것이기 때문에 분가 문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많이 걱정하실 것 같긴 해요. 저도 어머니가 걱정이 될 것 같고요.

집에게 하고픈 말이 있으시다면?

잘 버텨줘서 고맙다.

어떤 점에서요?

벽을 때려도 안 무너져줘서 참…

(완벽하게 이해함) 아….

아, 대학도 집 같은 곳이에요. 친구들 만나서 같이 있다보면 힘든 게 없어지니까요. 저한테 집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있는 곳인 것 같아요. 편한 사람이 있는 곳.

 

6. ‘살자리’를 구하고 싶은 당신을 위해

기사를 마감할 때 쯤 정말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내년 봄에 지으려던 집을 그냥 얼마 전에 짓기 시작하셨다는 거다. 남의 집 더부살이도 불편하고 하니, 집이 불타 사라진 그 자리에 그냥 다시 짓는다고.

돈은 어떡하느냐고 물었더니, 불에 탄 집 전에 살던 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으니 걱정 말라며, 부쳐 주시는 돈으로 맛있는 밥 좀 사먹으라고 하셨다. 감사하면서도 조금 부러웠다. 엄마와 나 둘 다 집을 잃을 수 없는 것은 같지만, 나는 어디든 내 집처럼 날 끼워 맞춰 사는 사람인 반면, 우리 엄마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음의 안식처, 진짜 당신의 공간을 직접 짓는 분이셨으니까.

그러나 당장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적어도 마음을 둘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찾기 힘들다. 단순한 주소지나 부동산으로서의 ‘house’가 아니라, 내 마음이 숨 쉬고 살 자리, ‘home’은 불가능하기만 할까?

마침 다행스럽게도, 나와 내 친구들이 갖고 있는 집에 대한 이런 생각은, 여러 단체와 기관도 공감하는 바였다. 서울시만 하더라도 1인 가구 청년들의 주거 빈곤율을 낮추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셰어형 기숙사 모델, 토지임대부 사회주택, 대학생 희망하우징, 빈집 살리기 프로젝트, 한지붕 세대 공감, 자치구 청년 맞춤형 주택 등등, 단순히 임대료 낮게 세를 주는 수준을 넘어 우리가 맘 편하게 살 자리, 진짜 집을 만들어 주려는 공감과 노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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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자인 청년들도 ‘집’을 꾸리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다함께 주택을 임대하고 관리해 보고 싶다면 민달팽이 유니온의 ‘달팽이집’이라는 방안이 있다. 청년들의 주택협동조합인 민달팽이 유니온의 ‘달팽이집’은 요즘 제3호 달팽이집 조합원을 모집하고 있을 정도로 잘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며 거주지도 공유할 수 있도록 셰어하우스 매칭을 도와주는 woozoo라는 플랫폼도 있다. 어쩌면 지하철역이 가깝다, 방이 넓다 같은 것보다 ‘독서 좋아하는 사람들’, ‘집에서 캠핑 분위기 내고 싶은 입주자’ 같은 분위기와 컨셉이 그곳을 ‘집’으로 만들어주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마치며

누구나 힘든 순간이 있고 누구나 기댈 자신의 집이 있다. 그게 어떤 형태이건, 소중한 시간 또는 공간으로 누구나 자기 집이 있었다. 그리고 집 이야기를 하면서는 누구나 자신의 가슴 속 가장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 이 긴 글을 읽었을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의 집은,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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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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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좀 더 잘 살고픈 사람. 브로콜리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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