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그 여자의 겨울

이 계절은 근본적으로 어딘지 외롭다.

오늘도 눈이 왔다

길 가면서 핸드폰 보기에는 너무 추워진 계절이다. 어디 나가는 것도 힘들고, 이거저거 껴입고 힘내서 나가기보다는 그냥 방구석에 웅크려 있고 싶은 계절. 친구들과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고 송년회니 신년회니 이름을 붙여 봐도, 먹고 마시고 소리지르다 혼자 남아 집에 갈 때면 그냥, 좀 그런, 그런 겨울. 모자란 것 하나 없는데도 쓸쓸한 기분이 들고, 아무 문제 없는 일상에도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순간들.

ⓒryanhsuh31

있는 것만으로도 울적하게 하는 계절. 괜히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이 김에 그냥 푹 잠겨 보자. 혹시나 당신이 ‘나만 괜히 겨울 탄다고 유난 부리는 걸까’ 걱정할까 봐, 당신을 닮은 몇 사람의 어떤 겨울의 장면들을 소개한다.

 

진심으로 외로웠던 강 모씨의 겨울

지난 10월. 뼛속을 스미는 겨울 바람이 불기 전. 나와 친구들은 나름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사주를 보러 갔다. 어떤 사주냐고? 그야 당연히, 매서운 겨울바람 앞에 내 옆구리가 더 얼어붙기 전에 메추라기 보일러 하나 놔주기 위한, 연애 운이었다.

“촉이 좋네. 이번 12월에 뭔가 있어.”

그 말을 믿었다. 그렇게 믿고 있다가, 어느새 내 옆구리는 보일러 하나 들여놓지 못한 채 12월의 겨울을 맞았다. 남들은 올해 겨울이 가장 따뜻하다고 하는데, 글쎄. 내 옆구리만큼은 작년보다 더 춥고 시리기만 하다.

그래서 이 서러움 한 번 잊겠답시고 알차게 약속들을 잡았다. 일을 마친 저녁 늦은 시간, 혹여나 우울함과 쓸쓸함이 내 머릿속에 맴돌까봐, 그게 무서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약속을 잡았는데도 솔로에게는 그 어떠한 자비도 없었다. 25일 크리스마스만큼은 채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해서 딱히, ‘크리스마스 때 뭐 해?’ 라고 먼저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외로움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솔로의 마지막 자존심이고, 나쁘게 말하면 솔로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loufi

자고로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랑 보내야지! 그래. 이김에 차라리 집에서 따뜻하게 전기장판 켜놓고, 가족들이랑 맛난 거 먹으면서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자.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 무렵. 엄마가 말했다.

“24일에 넌 일하지? 우리는 여행 갔다 올게. 집 잘 보고 있어.”

세상에. 완벽하게 혼자다. 솔로도 이런 솔로가 없다. 내 사주가 뭐랬더라. 12월에 뭔가가 있다고? 그놈의 돌팔이 점쟁이 덕분에 올해가 가기 전에 배운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점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새삼 깨달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사주를 보는 것이 연례 행사였는데 올해는 처음으로 하지 않았다. 괜한 기대감은 내려놓고, 다만 지금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일단, 이번 겨울은 너무나도 시리다. 내년에는 반드시 따뜻한 보일러 하나 들여놔야지.

ⓒmatsuyuki

 

차갑게 끝나버린 마음만 남은 김 모씨의 겨울

언젠가의 종강파티 비슷한 어느 술자리. 이번 학기도 무사히 버텨낸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내 친구들과, 내 친구들과 친한 사람들, 또 그 비슷한 사람들이 다같이 모여 하하호호 술도 마시고, 친한 듯 친하지 않던 사이가 간신히 모여 말도 놓던 그런 자리.

마침 친해지고 싶었지만 아직은 좀 어색하던 사람이 나를 불러 먼저 말도 놓자고 얘기해 주고, 자기 얘기도 해 주며 간신히 말을 트기도 했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은 다 된 상황이었다. 그 사람이 적당히 놀다가 아홉 시쯤 학교로 도로 가야 한다는 것을. 나도 때마침 학교 앞에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자리가 하나 있어서 따라 나가서 같이 좀 걸으면 된다.

계획은 완벽했다, 다만 감정이 완벽하지 않았을 뿐. 아홉 시가 될수록 입술은 바작바작 타들어갔고, 친구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게임 프로그램을 진행해 댔다.

1418258006_97

ⓒtvN

그러다 아홉 시. 나랑 같이 갈 그 사람은 담배를 한 대 피고 가겠다고 했다. 내 속이 타들어가는 걸 얘는 당연히 모르겠지. 나도 태울까 그 담배… 그 때 눈이 왔었나, 안 왔었나. 발을 동동 구르도록 추웠던 건 기억이 났다. 아닌가, 내가 긴장해서 덜덜 떨고 있었던 것뿐인가?

자리에서 학교까지는 약 1km 정도. 미친 듯한 속도로 골목골목을 빠져나가 결국 학교 앞 마지막 신호등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이 신호등이 자주 바뀌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저기, 할 말이 있는데.”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나는 울산으로 내려가는 심야고속버스에 탔다. 올해가 끝날 때쯤 돌아올 것이었다. 밤 열한 시에 출발해서 세 시 반에 도착하는 버스였던 것 같다. 어차피 안 될 걸 알고 있었으니 뭐 어쩌냐. 일부러 잘 보이기 위해 아껴 뒀던 일회용 렌즈를 쑥쑥 빼버리고 안경을 꼈다. 아이라인도 이제 필요 없으니 번질 만한 부분을 쓱쓱 닦아내고 버스에 올랐다. 잠깐 졸았더니 카톡이 와 있었다.

미안.

딱 두 글자. 딱. 어이구 너다운 답이다, 그럴 줄 알았지만.
오리털 패딩의 북슬북슬한 모자를 뒤집어쓰고 내 몸뚱이만한 가방을 껴안았다.

자고 싶었다. 겨울이 끝날 때까지.

ⓒdbrooksNY

 

이 모씨의 잊고 싶은 어린 날의 겨울

중학교 2학년, 방학이 시작하는 날이었다. 겨울답지 않게 날씨는 청명했고, 나답지 않게 기분은 꽤 좋았다. 방학식은 대강당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대강당이라지만, 모든 학년이 다 들어갈 만큼 크지는 않아서, 행사 때마다 학년별로 돌아가면서 자리를 메워야 했다. 지난번 성교육은 1학년, 이번엔 우리 차례였다. 조금 들뜬 아이들은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마땅히 친구가 없던 나는 바닥만 보고서서, 어제 봤던 소설책의 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냈다.

11시 쯤 되었을까, 딱 5분만 이야기하겠다던 교장 선생님은 정확히 37분을 채우고 자리에서 나왔다. 50분을 잘못 말한 게 아닐까. 그리고 지금 예정보다 13분이나 빨리 끝내줬다고 뿌듯해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망상. 교실에 돌아와 가방을 쌌다. 필통, 공책, 방학 동안 풀어야 할 문제집 따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 없었다. 없었다. 없었다. 내 유희왕 카드.

어디로 간 거야. 내 블랙 매지션. 내 블랙 매지션 걸!

ⓒ집영사

ⓒ집영사

당황스러웠다. 그 카드 뭉치를 사느라고 투자한 돈과 시간, 노력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렇게 없어질 수는 없는 거였다. 누가 훔쳐갔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렇다고 보일 리가 없었다. 몇 개월 전 일이 생각났다.

나는, 왕따였다. 마땅한 친구도 없었고, 누구도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종종 나를 괴롭혔다.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이유였다.

어느 날은 내 안경이 사라졌다. 내 안경, 어떡해. 그거 산 지 한 달도 안 된 건데. 나를 본 몇몇 아이들은 킥킥댔다. 킥킥킥. 안경 없어졌냐, 따위를 태연히 되물으면서. 새 안경을 사고 학교에 가자, 내 옛 안경은 내 책상으로 돌아왔다. 유독 한 친구가 나를 미안하다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 아이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었으므로. 서둘러 교실에서 나왔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킥킥. 그 웃음소리가 귀에서 메아리쳤다.

사소한 것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카드가 담겨 있던 그 통, 예전에 옆집 아줌마가 생일선물로 줬던 로봇 통이었는데. 그 카드 엄마가 독감 걸려서 약국 같이 갔다 오면서 사왔던 건데. 집으로 재빨리 뛰어갔지만, 눈물의 속도가 더 빨랐다. 하지만 여기서 울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보고 있었다. 날 괴롭혔던 그 아이들이.

집 근처 경비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서러웠다. 눈물로 잔뜩 젖은 뺨에 차가운 겨울공기가 와 부딪혔다.

추웠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mathieujarryphoto

 

이 모씨의 이해할 수 없었던 겨울

시험을 평소처럼 말아먹은 뒤에, 언제 한 번 밥 먹기로 입버릇처럼 이야기한 동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간단하게 한 끼 식사를 생각했지만 그녀는 조금 더 늦은 시간에 만나고 싶었나 보다. 그녀는 대뜸 술을 마시자고 했다. 같이 들었던 과목 교수님을 씹으면서 슬슬 술안주가 고플 무렵에 마침 오뎅탕이 왔다. 내가 급하게 숟가락을 뜨려고 할 때 어쩐지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때서야 친구와 단 둘이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 기억났다.

그래서 넌지시 물어본, 요즘 무슨 일 있냐는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을 연 순간부터, 난 오뎅탕이 식은 줄도 모르고 그녀의 악의에 찬 눈과 바르르 떠는 손만 보았다.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친구는 지난 봄에 지금처럼 다른 남자와 술을 마시다가, 깨보니 어두운 곳에서 자신을 만지려는 악마를 보았다. 나무가 색깔을 바꾸고 완전히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이 사실을 가슴에 묻어두던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지금도 그 새끼 잘 지내고 있어.
이미지도 나쁘지 않고.
정작 나는 잠도 잘 못 들었단 말이야.
그게 너무 화나. 왜 나만 힘들어야 하는 거야?”

ⓒ루미넌스

고개를 숙인 뒤 일어난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다니면서 느낀 좋은 점들을 다 털어놓았다. 웃는 모습이 예쁘고 그래서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내 친구는 그 말을 다 듣고 나서야 겨우 웃었다. 그때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많은 사람이 짊어지고 있고, 정작 고통을 준 사람들은 너무나 편한 얼굴로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 그녀가 말한 남자 아이가 나와 함께 일해왔던 친구 중 하나라는 사실에, 그걸 전혀 모르고 있던 나에게 특히 더 화가 났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세상, 모두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는 세상을 나는 어렴풋이 믿었다. 그 말을 꺼내자 그녀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맺혔다.

그 날 뒤에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아름답지 않았다. 세상 모든 걸 시허옇게 ‘덮으려는’ 의도가 궁금했다. 밀가루처럼 소복하게 쌓이는 그 아래에는 남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고통에 몸을 삭히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약자의 편이 아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모멸감을 주고 아무 자책을 느끼지 못한다. 죄책감과 반성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게 환경에 적응하는 인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내가 살아갈 시간이 더욱 두려웠다.

예전에 내가 이해한 세상은 ‘그럴 수도 있는’ 일들만 있었다. 이 짧은 생각이 너무 부끄러워서 어디에 털어 놓으려고 해도, 사람들은 올 해 자신에게 좋았던 기분 좋은 일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거기에서 안주는 후배에 대한 질투와 잠깐 같이 잤던 여자들에 대한 푸념이었다.

이 겨울이, 진짜 싫고 견딜 수 없이 쓸쓸하다.

ⓒSandoCap

 

Outro: 백모 씨의 겨울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家主]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겨울 눈 가로등

 

Tweet about this on TwitterShare on FacebookShare on Google+Pin on PinterestShare on TumblrEmail this to someone
The following two tabs change content below.
허자인

허자인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못하는 것 빼고 다 잘하는 그냥 대학생.
허자인

허자인의 이름으로 나온 최근 기사 (모두 보기)